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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독에 적힌 이름

by Muse · 2026-10-19

승전 소문은 보급 차량보다 먼저 왕청현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마을을 나갔다 돌아온 장사꾼의 입에 실려 왔는데,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이웃 고개를 하나 넘을 때마다 적의 수가 늘고 고려군의 무기도 커졌다. 박한이 처음 들었을 때에는 쇠로 만든 병사가 총알을 먹었다고 했으며, 이튿날에는 하늘을 나는 쇠매가 사람의 성명까지 알아맞힌다는 말이 붙었다.

김 중사는 그 소문을 듣고 김영철에게 물었다.

“네 드론이 그렇게 똑똑했나?”

“어제는 제 얼굴도 나뭇가지라고 했습니다.”

“승진은 소문이 하는군.”

웃고 넘길 이야기는 성문 앞에서 끝났다. 날이 밝자 피란민들이 줄을 섰고, 총알을 먹는 병사와 달리 그 사람들은 밥을 먹어야 했다. 업힌 아이와 지게에 실린 노인, 줄에 매단 닭이 함께 들어왔으며, 마지막에 도착한 사내는 빈 자루를 등에 메고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했다. 돌아갈 때 무엇이라도 담아 갈 생각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박한은 다친 사람부터 의무소로 보내게 했다. 물통을 싣고 온 것은 열차에서 탈취한 일본군 트럭이었다. 군용 표지를 지웠는데도 새로 온 여자가 차를 보고 아이를 등 뒤로 감췄다. 지난번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올 때도 비슷한 차를 탔기 때문이었다.

병사가 내려 조선말로 물을 나누자 그제야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이 하나는 물통보다 군인의 옷을 보다가 어머니를 당겼다.

“저 사람들이 쇠사람을 부린대?”

어머니는 얼른 입을 막았다. 전투 중 부상자를 데려오던 무인차량을 본 사람들이 제각기 전한 말이 이미 먼 마을까지 가 있었다. 보여 주지 않은 물건도 소문 속에서는 커지고 있었다. 박한은 병사들에게 이야기를 보태지 말고 통제 구역의 가림막을 다시 확인하라고 했다. 줄 선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의 해명이 아니라 마실 물과 밥이었다.

* * *

문제는 점심 배급에서 터졌다. 곡식 두 자루가 맞지 않았다. 승환이 작성한 장부와 창고 안의 실물이 달랐으며, 배급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쌀이 모자란다는 말보다 누가 가져갔느냐는 말을 먼저 꺼냈다.

“밖에서 온 자들이 두 번씩 받아 갔소.”

“여기 사는 사람은 배가 하나고 우리 배는 둘이오?”

줄이 흐트러졌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울먹이자 건너편의 사내가 자기 집에도 아이가 있다고 맞섰다. 준채가 언성을 높이며 앞으로 나섰고, 박한은 그를 말린 뒤 배급을 잠시 멈추었다. 멈추라고 말하는 것은 쉬웠으나 그 순간부터 줄 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기에게 온다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승환은 장부를 내밀었다. 안에는 자루 수와 됫박 수, 집집마다 받아 간 양이 함께 적혀 있었다. 박한은 처음에는 숫자를 잘못 더했나 싶어 다시 세었으나, 곁에서 보던 급양병이 두 가지 됫박을 나란히 놓고 물을 담아 보았다. 같은 한 되라고 부르는데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자루 역시 모두 같은 무게가 아니었다.

도둑이 없는 것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장부가 말하는 두 자루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두 자루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쌀이 스스로 걸어간 것은 아니겠지요?”

날카로운 물음이 뒤에서 날아왔다. 박한은 대답 대신 사람들 앞에서 남은 곡식을 전부 달게 했다. 저울 위에 자루가 올라갈 때마다 급양병이 수치를 읽고 승환이 다시 적었다. 그동안 아이는 울었고 불을 지키던 주민은 밥 지을 시간이 늦어진다고 재촉했다.

박한은 확인된 양으로 오늘 배급부터 재개하게 했다. 부족한 몫에는 선발대가 비축한 식량을 보태고, 장부의 차이는 따로 조사하기로 했다. 자기 판단 때문에 솥이 비어 있는 시간을 더 길게 만들 수는 없었다.

“군인들 먹을 것은 어쩌려고 그러오?”

승환이 낮게 물었다.

“본대에 보급을 요청하겠습니다. 대신 내일부터는 같은 저울로 받는 양과 나가는 양을 같이 적어야 합니다.”

말을 마친 박한은 창고 벽에 종이를 붙였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읽어 줄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배급 때마다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알리게 했다. 총을 든 경계병 옆에 저울이 놓였고, 사람들은 그날 저녁부터 쌀을 받기 전에 저울 눈금을 함께 보았다.

* * *

기지에서 왕청현으로 향한 지원 차량은 바로 도착하지 못했다. 비로 불어난 물에 낡은 교량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차량 무게를 버틸지 확인하지 않고 건너갈 수는 없었고, 정찰 드론의 사진만으로 교각 속까지 알 수는 없었다.

김빈은 지도 위에 다른 길을 표시했다가 지웠다. 돌아가면 시간이 늘고 연료도 더 들었다. 공병은 먼저 가벼운 인원과 장비로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했으며, 임영옥은 의무품과 당장 필요한 식량을 나누어 옮기는 방안을 승인했다. 물자표에서는 한 줄로 적힌 수송이 현장에서는 몇 번의 왕복이 되어 있었다.

보급대의 보고는 띄엄띄엄 들어왔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도 건너갈 다리까지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왕청현에서는 승환이 성 밖 길을 여러 번 보았고, 본부에서는 김빈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트럭의 짐을 다시 나누어 적었다.

김영은 공작실에서 항목 하나를 지웠다. 현지에서 필요한 물건을 모두 기지에서 보내는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청현에 정밀 공장을 세울 수 있다는 말부터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대장간과 목공소, 물레방아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김 중사는 그 요청을 읽고 웃었다.

“박사님은 로봇 가져와 놓고 대장장이를 찾으십니까?”

옆에 있던 지장원이 배낭 끈을 꿰매며 받았다.

“로봇이 고장 나도 솥은 고쳐야 합네다.”

* * *

왕청현의 대장간은 전투 전에 문을 닫았다. 주인 강 노인은 풀무를 밟을 아들이 끌려간 뒤로 큰일을 받지 않았다며 작업장에 들어오는 군인들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박한은 김영이 보낸 기술자와 함께 문턱에서 허락을 구했다. 수리할 도구를 먼저 놓자 노인은 날이 빠진 삽과 금 간 물동이 손잡이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것 때문에 왔소?”

“이런 것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기술자는 군용 공구를 전부 꺼내 자랑하지 않았다. 노인이 쓰는 모루와 화덕을 살피고 어떤 재료가 있는지 물었으며, 노인은 청년의 손을 한번 본 뒤 직접 집게를 들었다. 불이 붙자 어두운 작업장의 얼굴들이 붉어졌다.

도면에 밀리미터가 적히고 노인이 손가락 마디로 길이를 재자 첫 마찰이 생겼다. 기술자가 자를 내밀고 노인이 자기 물건을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한 뒤에야 두 사람은 말의 기준을 맞추기 시작했다. 더 좋은 측정기가 있다는 사실이 손에 익은 기술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수리한 삽으로 주민들이 배수로를 팠고, 목공은 의무소에 놓을 긴 의자를 만들었다. 김영이 원한 첫 생산품은 드론 부품이 아니라 손 씻을 물을 받칠 나무 받침과 일정한 부피의 곡식통이었다. 사람들은 첨단 군대의 주문치고는 시시하다고 했다가 같은 물건을 열 개 더 만들라는 말을 듣고 일감을 세기 시작했다.

노인은 기술자가 빌려준 작은 줄을 돌려주면서 그것이 어느 공장 물건인지 물었다. 날이 고르게 선 것과 손잡이가 손에 감기는 모양이 그가 쓰던 공구와 달랐다. 기술자는 필요한 공구만 쓰도록 허가받았으며 출처는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쇠야 일본 물건도 보고 서양 물건도 보았소. 그런데 이것은…….”

노인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자기 줄과 번갈아 보았다. 도깨비가 만든 물건이라는 소문을 믿을 나이는 지났으나, 어느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는 사실은 마음에 걸렸다. 기술자가 가져가려 하자 아쉬워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노인은 손에 익은 연장을 꺼내 들고도 한동안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 * *

지은이 왕청현에 온 것은 교량 쪽 보급이 일부 풀린 뒤였다. 기지를 나서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현지인에게 안내문을 읽어 주고 학교를 준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자원했다. 순득은 함께 가겠다고 했다가 의무대의 세탁과 바느질을 돕는 일이 밀려 남았으며, 대신 분필을 헝겊에 싸 주었다.

“부러지면 글씨도 못 쓰잖아요.”

지은은 그 꾸러미를 수첩보다 안쪽에 넣었다. 운반차가 교량 앞에서 멈추고 짐을 나누는 동안 병사들과 함께 작은 상자를 옮겼다. 도착한 왕청현에는 승리의 흔적보다 수리할 곳이 먼저 보였다. 무너진 벽 아래에서 아이들이 돌을 골랐으며, 의무소 앞에는 신발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첫 수업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곡식통을 만드는 청년이 자를 읽고 싶다고 왔고, 배급을 맡은 여자는 자기 이름을 쓰고 싶다고 했다. 지은은 칠판에 숫자를 적다가 교실을 구경 온 노인에게도 앉으시라고 권했다.

“이 나이에 배워 어디 쓰겠소.”

“장부 보실 때 쓰시면 되지요.”

노인은 뒤쪽에 앉으며 어린것들이 웃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지은은 학생들을 보았다.

“웃는 사람도 앞으로 나와서 써야 합니다.”

그 뒤로 웃음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남을 가리키며 웃는 사람은 줄었다. 박한은 창고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방해하지 않으려고 돌아섰다.

* * *

오후 수업이 끝날 무렵, 창고 뒤에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불이야!”

지은이 문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포대 끝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연기를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고, 물동이를 들러 뛰던 여자가 서로 엉킨 아이들을 밀어내다가 넘어졌다. 순찰하던 병사가 창고 모퉁이를 돌아 뛰어왔다.

“뒤로 가세요! 길 비우세요!”

지장원이 아이 둘을 양팔로 끌어내자 그 뒤로 병사가 몸을 낮추고 들어갔다. 불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포대 틈에서 다시 솟았다. 그는 가까이 있던 주민을 먼저 밖으로 밀어내고 안으로 돌아섰다. 흰 가루와 연기가 뒤엉켜 한동안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은은 아이들을 벽에서 떼어 내며 계속 이름을 불렀다. 한 아이가 자기 동생이 안에 있다고 울었고, 지장원은 창고 옆 좁은 틈에 쪼그려 앉은 작은 몸을 찾아냈다. 아이는 붙들자 버둥거렸으나 밖으로 나온 뒤에야 울음을 터뜨렸다.

불은 더 번지지 않았다. 병사 하나가 검게 된 소매를 털며 나오자 지은은 아이들 손을 놓고서야 자기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누군가 외지 청년을 가리켰다.

“저놈이 저 뒤에 있었소!”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돌아갔다. 불을 피하려고 모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한 사람 쪽으로 좁혀 들었다. 두 번 배급을 받으러 왔다는 말 뒤에 일본군의 앞잡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준채가 청년의 팔을 붙들고 나왔다. 허리춤에서 곡식이 든 작은 주머니가 나왔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자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박한은 청년을 군인들 뒤로 옮기고 누구도 때리지 못하게 했다. 어디서 불이 시작됐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따로 묻자 사람들의 말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마을의 모든 일을 알아맞힌다던 소문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박한은 그런 능력은 없으며 누가 무엇을 보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장비가 있다는 말보다 없다는 말을 더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저놈이 훔친 것은 맞지 않소!”

준채가 따지자 박한은 주머니를 탁자에 놓았다.

“그것과 불을 낸 것은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어린 동생이 배가 아파 줄에 오래 설 수 없어 조금 더 가져갔다고 했다.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의무병과 연락원이 함께 따라가 보니 아이는 정말 누워 있었으며, 청년의 손과 옷에서는 불을 낸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다.

대신 창고 벽 쪽에서 타다 남은 천이 나왔다. 불씨가 어떻게 붙었는지는 더 조사해야 했다. 박한은 방화범을 잡았다고 발표하지 않았고, 도둑질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았다. 청년은 가져간 양을 장부에 적고 창고 일을 도와 갚기로 했으며 동생은 의무소로 옮겼다. 주민 대표들이 그 처분을 함께 결정했다.

모두가 만족한 결론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이 이미 맞고 난 뒤에 결백을 확인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 * *

불이 꺼진 뒤 의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전투 때 다친 주민이 깨어나 아들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박한이 갔을 때 사내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의무병에게 제지당하고 있었고, 아들은 문밖에서 신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병실의 기계가 무서워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박한은 아이 곁에 쪼그려 앉았다.

“저 소리는 아버지 상태를 알려 주는 거야. 놀라게 하려고 내는 소리가 아니고.”

의무소 안쪽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급히 들여온 의료 장비를 함부로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으나, 아이에게는 그 뒤에서 나는 소리가 더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간호 장교는 기계를 설명하는 대신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아이는 문턱에서 몇 번이나 멈췄다가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에 작은 집게가 붙은 것을 보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를 아프게 하는 물건이냐며 떼어 달라고 했고, 사내도 괜찮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집게 쪽 손을 자꾸 감추었다. 간호 장교가 자기 손에도 대어 보였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곧 풀리지는 않았다. 아이는 아버지의 다른 손만 꼭 잡았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믿고 기다리는 데에는 병을 치료하는 것과 다른 시간이 필요했다.

사내는 아들의 머리를 만진 뒤 치료비를 물었다. 전투 중 다친 주민에게 당장 돈을 받지 않는다는 설명에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의무병이 두고 간 빈 수액 봉지를 보며 저런 값비싼 물건을 자기가 갚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박한은 없던 빚을 만들지 마시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말만으로 사내가 안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마을 대표들과 진료 원칙을 정리해 공개하겠다고 했다. 누구는 공짜이고 누구는 돈을 내는지 군인 한 사람의 호의로 정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설명에 사내는 조금 오래 그를 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박한은 의무대에 쓸 수 있는 약과 앞으로 필요한 약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좋은 치료를 한 번 보여 주는 일보다 다음 환자가 왔을 때에도 치료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는 병실 문에 진료 원칙을 붙일 자리부터 비워 두었다.

* * *

밤에 윤재가 박한을 찾아왔다. 불을 낸 자가 따로 있으면 다시 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박한은 경계를 늘렸고 창고의 불씨와 유류 관리를 나누었으며, 누군가 일부러 했을 가능성도 버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윤재는 창고 벽의 배급표를 보고 한동안 서 있었다.

“총으로는 우리가 그대들보다 못하오. 그런데 오늘 보니 총 말고도 익혀야 할 것이 많겠구려.”

“저희도 잘한 것만은 아닙니다. 장부부터 제대로 맞췄어야 했습니다.”

윤재는 그 답을 듣고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다른 독립군 조직의 연락처와 사람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이들이 만나 보자고 했으며, 누구는 협력하겠다고 하고 누구는 고려군이 정말 조선인의 군대인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총을 보여 주면 믿을까요?”

박한이 묻자 윤재는 고개를 저었다.

“총이 좋으니 더 의심하는 사람도 있소. 누가 대 주었는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테니.”

박한은 종이를 받아 본부에 보낼 보고에 넣었다. 이들의 의심이 쓸데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이름으로 나타난 자들이 언제나 같은 나라를 생각했던 것은 아닐 터였다.

다음 날 지은은 배급표 옆에 수업 시간을 붙였다. 글을 모르는 여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짚자 어린아이가 대신 읽어 주었고, 강 노인은 새로 만든 곡식통을 들고 와 저울 옆에 놓았다. 피란민을 맞는 병사는 전날보다 덜 서둘렀다.

오후에는 첫 손님들이 들어왔다. 총을 멘 사람도 있었고 보퉁이만 든 사람도 있었으며, 그중 중년 사내 하나는 군인보다 창고 벽의 종이를 먼저 살폈다.

그는 박한에게 인사하기 전에 물었다.

“여기에서는 쌀 나가는 양까지 백성에게 보인다면서?”

박한이 그렇다고 하자 사내는 종이를 다시 보았다.

“그럼 군대가 받은 쌀은 누가 들여다보오?”

뒤에서 윤재가 조용히 웃었다. 쉬운 손님부터 찾아오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