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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다음의 전쟁

by Muse · 2026-10-16

이시하라 중좌는 왕청현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관리들이 먼저 달아났고 남은 조선인 무리가 낡은 소총 몇 자루를 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므로, 성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겁을 줄 만한 소리라고 여겼다. 앞서 지나온 마을들이 모두 그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새로운 독립군 조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관의 설명에 이시하라는 코웃음을 쳤다. 조직의 이름이 늘어나는 것과 총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달랐다. 성벽의 수리가 끝나지 않은 자리와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 포를 쓰지 않고도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두가 멈췄다. 성 가까이 접근한 병사들의 보고가 끊겼으며 낯선 총성이 몇 차례 이어졌다. 부관이 아는 것보다 추측을 더 많이 말하기 시작하자 이시하라는 손을 들어 막았다.

“직접 확인해. 보이는 것만 보고해라.”

* * *

창고 지휘소의 문은 닫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박한이 허락한 지휘관과 연락원뿐이었고, 문 앞의 경계병은 주민들이 가까이 오면 다른 길로 안내했다. 독립군들은 전날 위임한 지휘권에 따라 고려군의 명령을 기다렸다. 손에 든 것은 익숙한 소총이었으나, 이제 그 총을 언제 어디로 향할지는 박한이 결정했다.

박한은 적의 접근 보고보다 주민 대피 상태를 먼저 확인했다. 아직 집에 남은 노인이 하나 있었고 의무병과 연락원이 데리러 갔다고 했다. 그는 그쪽 상황을 계속 알려 달라고 한 뒤 화면으로 돌아섰다. 곁의 윤재가 지휘하는 듯한 장교를 가리켰으나, 박한은 다른 관측에서도 확인될 때까지 기다렸다.

밖에서 총성이 이어지고 성벽의 돌가루가 날렸다. 윤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화면을 보았다. 적병 하나가 엎드리고 뒤의 병사가 그를 넘으려다 주저앉았다.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넘어지는 순간을 이 방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활동사진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것은 정해진 장면을 다시 틀어 주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무심코 화면 뒤를 보았다가 자기 손이 우스워 입을 다물었다.

의무병이 노인을 부축해 들어왔다. 뒤따른 병사의 손수레에는 작은 보따리가 실려 있었는데, 노인은 낡은 물통 하나를 두 손으로 놓지 않았다. 내려놓고 진찰부터 받으라는 말에도 고개를 젓더니 자기 집 물통이라고 했다. 의무병은 더 빼앗으려 하지 않고 물통을 쥔 손부터 살폈다.

대피 완료 보고를 받은 박한이 지장원을 불렀다.

“적 선두 확인했나?”

“확인했습네다. 전부 무장 병력입네다.”

박한은 마지막으로 화면을 보았다. 주민이 빠져나온 길과 적의 전진로가 겹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지장원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성 밖에서 땅이 일어났다.

콰앙!

앞서 달리던 병사들의 모습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뒤따르던 자가 멈추려고 했으나 등을 밀고 오던 대열이 한꺼번에 뒤엉켰고, 뒤이어 다른 곳에서도 폭발이 일었다. 고함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소총을 버리고 엎드렸으며 조금 전까지 앞에 있던 하사관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윤재는 소총을 들고도 한 발 쏘지 못했다. 적은 아직 성문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공격하던 길 자체가 갑자기 적을 삼키고 있었다.

“지뢰요?”

박한은 이쪽에서 통제하는 방어 수단이라고만 답했다. 윤재는 더 묻지 않았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지금 들은 말로는 눈앞의 광경을 다 담을 수 없어서였다.

* * *

이시하라는 새로 들어온 소총이 있는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쪽에서 무기를 받았을 수도 있었고, 달아난 관리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남겼을 수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장비를 떠올리기보다 자기가 아는 장비의 수를 늘려 생각하는 편이 쉬웠다.

그렇다면 더 큰 화력을 쓰면 되었다. 포격 명령이 내려갔다.

첫 포탄이 성벽 가까이에 떨어졌을 때 창고 천장에서 먼지가 내려왔다. 윤재는 폭음과 함께 아이들 대피소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아직 멀었으나 포탄은 멀고 가깝고를 사람이 바라는 대로 가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 박한의 지시를 기다렸다.

다음 폭음 뒤 지휘소의 화면 하나가 멎었다. 통신병이 예비 장비를 들고 나가는 동안 윤재는 대피소 쪽에서 들린 다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짧고 거친 소리가 지붕 위에서 터졌다. 곧이어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땅에 닿아야 할 포탄 하나가 공중에서 깨졌고, 뒤따른 작은 폭발 뒤로 파편이 쏟아졌다.

“저쪽에 또 떨어졌소!”

윤재가 일어서자 연락원이 대피소 인원은 무사하다고 보고했다. 이 하사가 그를 문 안쪽으로 물리며 밖에 서 있지 말라고 했다. 지붕 위 가림막 뒤의 방호 장비가 다시 울렸다. 두 번째 포탄도 건물에 닿기 전에 빛을 뿜었다.

윤재는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날아오는 포탄을 다른 탄환이 때렸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끊어졌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동안 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야 했던 마을들은 무엇이었을까.

박한은 대피소를 벗어나지 말라는 지시를 반복했다. 보호할 수 있는 구역은 정해져 있었고, 공중에서 부서진 파편까지 사람을 피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까까지 포탄이 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사람들은 이제 지붕 위에서 나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박한이 대응 명령을 내렸다. 독립군 진지 쪽에서는 익숙한 소총 소리가 났지만 고려군 쪽의 소리는 달랐다. 끊어질 듯 잇달아 울리는 총성에 이어 일본군의 공격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윤재는 오래 쏘아 대는 기관총이라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적을 확인하고 명령을 내리고 맞히는 과정이 이토록 짧게 이어지는 전투는 본 적이 없었다.

성벽 아래의 독립군 하나는 사격하다 말고 고려군 진지를 쳐다보았다. 지장원이 몸을 낮추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놀라서 넋을 놓은 사람을 일본군이 기다려 줄 리는 없었다.

“앞을 보시오. 명령 듣고 쏘시오!”

지장원의 고함에 대원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좋은 무기가 있다는 말은 어제도 들었지만, 그 말의 뜻을 몸으로 아는 일은 오늘 처음이었다.

무너진 벽 가까이에 부상자가 생겼다. 사람이 곧바로 들어가기 어려워 박한은 지원형 로봇 투입을 허락했다. 덮개를 걷은 작은 차량이 잔해 쪽으로 움직이자 의무소 앞의 여자가 비명을 질렀으며, 독립군 병사는 자기도 모르게 총을 반쯤 들었다.

“우리 장비요. 쏘지 마시오!”

윤재가 막아섰으나 자기도 눈을 떼지 못했다. 기계는 다친 사람을 실은 뒤 병사와 함께 돌아왔다. 누군가 안에 작은 사람이 타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운용병은 대답할 틈 없이 부상자를 넘겼다. 로봇이 안으로 들어가고 가림막이 닫힌 뒤에도 여자는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박한은 생명을 구하려고 드러낸 장비가 소문으로 남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사람을 먼저 데려와야 했다. 그는 사용을 끝낸 장비를 다시 가리고 불필요하게 밖에 내놓지 말라고 지시했다.

* * *

드론 화면에 새로운 병력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앞줄의 사람들이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서로를 붙들고 걷는 사람도 보였다. 김영철이 확대하자 자동 표시에는 사람과 이동 방향이 떴으나, 그 이상을 알리는 글자는 없었다.

화면 가까이 온 김준채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잠깐. 저 사람…….”

박한이 고개를 돌리자 준채는 손가락을 댄 채 눈을 떼지 못했다.

“용정에서 끌려간 사람이오. 앞줄에 있는 자들은 조선인일 수 있소.”

윤재가 다른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 아는 사람도 있었고 닮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므로, 박한은 공격 지시를 멈추고 접촉할 방법을 준비했다. 지장원이 화면을 보며 낮게 말했다.

“군복만 같습네다.”

박한은 처음 구해 온 세 사람을 떠올렸다. 눈앞에 일본군의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는 틀리지 않았지만, 그 보고 하나만으로 자기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앞줄의 사내들은 마을의 총성이 멎자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앞으로 가면 총에 맞고 뒤로 가면 맞거나 총살당할 터였으며, 어느 쪽이 조금 더 늦게 죽는 길인지 셈할 기운도 없었다. 그때 성 안에서 조선말이 들렸다. 무기를 내려놓고 지시에 따르라는 목소리였다. 뒤에서는 일본어 고함이 겹쳐졌다.

누군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 곁의 사람이 총을 놓고 양손을 들었고, 망설이던 다른 사람들이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엄호 아래 접촉 인원이 움직이는 동안 준채가 얼굴을 드러내 이름을 불렀다. 한 사내가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형님, 우리는…….”

“나중에 말해. 이쪽으로 와.”

준채는 설명을 듣지 않고 팔부터 잡았다. 들어온 사람들의 무기를 따로 모으고 의무병이 상처를 확인했으며, 박한은 몸을 떨며 고맙다고 하는 사내에게 먼저 앉으라고 했다. 조금 전까지 총을 들었던 손에 다시 총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윤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조선인 병사들이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이시하라는 이를 갈았다. 폭발이 멎었다. 그의 눈에는 그것이 함정이 다 떨어졌다는 증거로 보였다.

“차량을 앞으로! 전원 진격한다!”

남아 있던 전차가 길을 따라 움직였다. 병사들은 그 뒤에 바짝 붙었다. 살아 있는 강철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 얼굴들이었다. 이시하라는 흔들리는 포탑을 보며 적어도 성문까지는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한은 지휘소를 나와 준비한 자리로 갔다. 얼굴을 들이밀어 밖을 볼 필요는 없었다. 보고가 들어오고, 전차의 엔진 소리가 담 너머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량부터 제압한다.”

가림막 뒤에서 짧은 불꽃이 솟았다. 거의 동시에 전차가 옆으로 흔들렸다. 앞부분에서 불길이 터지고 포탑이 멈췄으며 뒤따르던 트럭이 급히 방향을 꺾었다. 두 번째 충격이 그 트럭을 때렸다. 차체가 들렸다 내려앉고, 싣고 있던 상자가 길 위로 쏟아졌다.

전차 뒤에 붙어 오던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금까지 엄폐물이라고 믿었던 쇳덩어리가 불을 뿜고 있었다. 한 병사는 뛰다 넘어져 기어갔고, 다른 자는 운전석의 문을 잡아당기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 성 안에서 총성이 났다.

독립군의 낡은 소총 소리와 고려군의 사격이 섞였다. 이시하라는 익숙한 소리를 알아들었다. 중국군의 총도 있었고 자기 병사들과 같은 일본군 소총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끊듯 들리는 낮고 빠른 총성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쓰러졌다.

부서진 차 뒤에서 소총을 들던 병사가 어깨를 돌리기도 전에 넘어졌고, 나무를 향해 달리던 연락병은 몸을 꺾은 뒤 일어나지 못했다. 하사관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다시 모았으나 모자 챙이 흔들리는 순간 뒤로 주저앉았다. 사람을 세워 지휘하려고 하면 그 사람부터 쓰러지는 전투였다.

“어디냐! 어디에서 쏘는 거냐!”

부관이 성벽을 가리켰다. 이시하라는 그쪽을 보았으나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은 낡은 옷을 입은 독립군뿐이었다. 낯선 소리를 내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보이는 사람에게 총을 쏘았고, 보이지 않는 사수들은 그 병사들이 몸을 내놓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김 중사가 소총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옆의 독립군 청년은 방아쇠를 당기려다 그의 총구가 옮겨 가는 것을 따라 보았다. 도망치던 적이 장전하려고 멈추는 순간 김 중사의 사격이 끝났다. 청년은 자기가 겨눈 사람을 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다른 곳 봐. 이미 끝난 표적 보고 있지 말고.”

김 중사의 낮은 말에 청년이 눈을 돌렸다. 손은 떨렸으나 전보다 총을 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이 군대의 명령을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말로 들었을 때와는 다른 무게로 가슴에 들어왔다.

이시하라는 부하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병사는 팔이 아니라 부러진 소총을 보여 주었다. 뒤에서는 의무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앞에서는 다시 일어나라는 명령에 대답이 없었다. 전투를 계속할 병력은 있어도 전투를 이끌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퇴각이 확인되자 마을 안에서 환성이 터졌고, 누군가는 그 소리에 등을 떠밀린 듯 총을 들고 성문으로 향했다. 박한은 전원 위치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준채가 성문 쪽으로 걸음을 떼자 윤재가 팔을 잡았다.

“위치 지키라는 명령이오.”

준채는 멈춰 서서 박한에게 왜 추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민과 우리 피해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뒤쪽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숨어 있는 병력까지 밖으로 나가 보여 줄 이유도 없습니다.”

“다시 오면 어쩔 것이오?”

“다시 올 때 지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분노가 그 말 한 번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준채는 성 밖을 보며 입을 다물었고, 박한은 그를 더 설득하는 대신 의무소의 보고를 받았다. 그곳에는 고려군 병사와 독립군, 주민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더 좋은 무기를 가졌으니 이길 수는 있어도 누구도 다치지 않게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 이름과 상처로 보고되었다.

의무소로 들어가는 들것 곁에서 병사가 걸음을 맞췄다. 부상자는 자기 옷에 묻은 피와 의무병의 손을 번갈아 보았고, 의무병은 멀쩡한 손을 잡게 해 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조금만 더요.”

박한은 환성이 잦아든 뒤에도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의무소 문을 오래 막고 서 있지 않고, 안에 필요한 것을 확인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 * *

해가 기울자 미래 장비는 다시 통제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주민들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탈취한 트럭을 손보고 소총을 닦았다. 전투가 끝난 마을에 남은 이야기는 그러나 트럭과 소총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 없이 움직이는 수레와 멀리 있는 사람을 보여 주는 판에 대해 저마다 다른 설명이 붙었다.

윤재는 박한을 찾아와 자기가 동료들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물었다. 박한은 고려군이 가진 비밀 장비이며 일본군에 알려지면 모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정도만 설명해 달라고 했다. 작동 원리나 수량, 배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야 했다.

“알아도 설명을 못 하겠소. 나는 아직 저 판 안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모르겠으니.”

윤재는 말끝을 흐렸다. 물어보면 어린아이 취급을 받을까 봐 참았던 질문이었다. 박한은 그를 웃지 않고 보았다.

“사람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멀리서 본 모습을 옮기는 장비입니다. 필요한 분들께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안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설명을 들으면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이들의 지휘를 받은 덕에 마을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큼은 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저녁 회의에서 승환은 식량과 주민 상태를 보고했다. 승전 소식이 퍼지면 사람이 더 올 것이었고, 지금 있는 구호품도 그 수에 따라 달라졌다. 박한은 찾아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겠지만 위험과 부족한 사정까지 함께 알려 달라고 했다.

한 젊은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트럭을 고치거나 쇠붙이 다루는 것부터라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도 손 놓고 얻어먹을 수만은 없으니.”

정비병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첫 수업감은 첨단 장비가 아니라 바퀴가 망가진 수레였다. 공구를 너무 세게 쥐는 손을 풀어 주며 작업을 시작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 배울 것이 생기고 나서야 자기 손으로 도울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얼굴들이었다.

* * *

기지에서는 지은이 일본어 문서를 정리하다 만주에 새 국가를 세운다는 대목을 찾아냈다. 김의진은 감청 내용과 대조한 뒤 지휘부에 보고했다. 군주로 거론된 인물의 이름도 그들이 아는 것과 조금 달랐다. 임영옥은 인물의 의도까지 원래 역사에서 가져오지 말고, 실제 접촉할 길부터 찾으라고 했다.

* * *

지휘부 회의에서는 승리 다음의 일이 논의되었다. 박무진은 확인된 전력 차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밀어낼 수 있다고 했으며, 김빈은 움직일 병력과 연료, 정비와 산업 기반을 먼저 세었다. 이참이 그 뒤를 이었다.

“군대가 들어간 곳에서 누가 세금을 걷고 재판을 합니까? 함께 싸우자는 말에 동의하는 것과 우리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임영옥은 지도에서 만주를 짚었다. 김의진이 정리한 자료에는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 진행 속도는 그들이 아는 것보다 빨라 보였다.

“건국 자체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박무진의 시선이 올라왔다.

“일본이 만든 나라를 인정하자는 겁니까?”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질 국가를 일본에서 떼어 낼 수 있는지 보자는 겁니다.”

그는 군주로 거론된 이름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꼭두각시가 되고 싶은지, 자기 나라의 군주가 되고 싶은지 알아야 합니다. 책에 적힌 인물이 저 사람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으니까.”

김빈은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이 지배를 굳힐 위험을 말했고, 박무진은 주민을 보호하면서 상대의 국가 수립을 이용한다는 일이 작전으로 가능한지 물었다. 임영옥은 이견을 지우지 않고 적게 했다. 아직은 결정할 수 없는 항목들이 많았다.

“거점 방어와 주민 보호를 중단하지는 않습니다. 손 놓고 기다릴 생각도 없어요. 다만 우리가 부순 자리마다 우리 힘만으로 새것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참은 일본과 결별한 국가를 다른 열강이 인정할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임영옥이 기술 협력 목록을 올리자 김영은 화면부터 자세히 살폈다. 전력과 통신, 의료와 생산 분야의 항목들 사이에서 박사가 몇 개에 표시를 했다.

“만들 수 있는 것과 알고만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실현할 수 없는 기술을 약속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그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기술을 받은 나라는 강해집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강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임영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범위와 대가를 함께 정해야 합니다. 우리와 협력하고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는 편이 이익이 되게 만들 수 있는지 봅시다.”

* * *

이참은 정통성을 설명하는 책의 문장보다 왕청현에서 자기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독립운동 세력과 협의할 기구가 필요합니다. 임시정부와도 연결해야 하고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가르치기 전에 어떤 나라를 원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임영옥은 동의했다. 현대의 정치와 제도에 관해 알려 줄 사람은 부대 안에 있었지만, 그 지식이 이 시대 사람들의 동의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이 시대에 쌓은 역사가 없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군대라는 설명만으로 나라를 이끌 수는 없어요.”

김의진이 왕실을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화면에 경성의 자료가 열렸다. 의친왕에 해당하는 인물의 이름은 이정이었다. 이름이 달라져도 어디에 있는 누구를 말하는지 짐작은 갔으나, 임영옥은 사진을 한동안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우선 신변과 접촉 경로부터 확인합시다. 모셔 오는 일도 어떤 역할을 부탁하는 일도 사람을 알아본 다음입니다.”

이참은 구출 가능성과 교육, 협의라는 말을 적었다. 왕관을 올려놓을 자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생각할 사람을 찾는 일이어야 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교육실에는 불이 남아 있었다.

*** *** ***

왕청현의 박한은 창고 한쪽에서 분필 상자를 꺼냈다. 주민 연락원이 내일 아이들을 데려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먼저 안전한지 확인하고요.”

그는 그렇게 답하고 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오늘의 승리만으로 내일을 약속할 수는 없었지만 내일 해야 할 일은 조금 늘어나 있었다.

기지의 임영옥은 새 지시서에 서명했다. 만주국 군주 후보와의 접촉 경로, 의친왕의 신변, 독립운동 세력과의 협의 준비, 외교에 사용할 기술의 검토가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일본이 세우려는 나라를 일본이 생각하지 못한 나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 아직은 조사와 준비라는 말들 속에 들어 있었다.

문서를 넘긴 그는 왕청현의 부상자 보고를 다시 펼쳤다. 앞으로 만들 나라가 아무리 커진다 해도, 그 첫 장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잊고 시작해서는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