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by Muse · 2026-10-12

덜커덩, 덜컹.

흔들림이 멎었는데도 지은의 몸은 한동안 기차가 달리는 쪽으로 기울었다. 잠을 잔 것인지 기운이 다해 눈만 감고 있었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고, 무릎 위에 기대 있던 순득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야 그녀도 객차 안의 어둠을 다시 보았다. 판자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깨 몇 개를 드러냈으나 바깥이 아침인지 한낮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언니, 도착한 걸까요?”

“모르겠어. 조금만 기다려 보자.”

기다리라는 말 말고는 해 줄 것이 없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누구도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목이 말라도 물을 달라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한다던 사내는 처음부터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약값이 없다는 사정이 그자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지는 않았는데, 지은은 결국 그를 따라나섰다. 아버지가 일본인과 다투다 죽고 오빠가 만주로 떠난 뒤에는, 집안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내주는 일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순득은 열여덟이었다. 도시에서 바느질을 배우면 어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다고 했으며, 객차 옆자리의 여자는 일본말을 조금 알아서 다른 자리를 구할 줄 알았다고 했다. 서로 다른 기대를 가지고 집을 나왔던 여자들이 이제는 같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내려!”

오래 접어 둔 다리가 펴지지 않아 서로의 팔을 붙들고 내려서자, 석탄을 옮기는 사람들과 군수품 상자가 보였다. 지은은 간판에 적힌 지명을 읽어 다롄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적지를 알려 주지는 않았다. 집에서 멀어졌다는 사실만 조금 더 분명해졌다.

병사가 순득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은이 따라붙자 다른 병사가 길을 막았고, 곧 줄을 세운 여자들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순득이 비명을 삼키며 몸을 웅크리자 지은은 그녀를 감싸려다가 뺨을 맞았다. 귀 안에서 소리가 울리는 동안 병사의 얼굴보다 웃고 있는 다른 병사의 입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지은은 순득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자기 팔이 끌려갔다. 뒤돌아보며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무엇을 기다리라는 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 *

역 뒤편의 낡은 창고에서 박한은 막사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중계기를 통해 가까운 관측조가 보내는 영상이었다. 먼 본부가 아니라 이곳의 박무진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고, 여자들을 데려갈 차량과 의무팀은 떨어진 집결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구조조, 위치 보고.”

박무진의 물음에 지 대위가 답했다.

“대기 중입니다. 여자 한 명이 지휘 막사로 들어갔습니다.”

“경비 병력은?”

“무장 인원 확인했습니다. 작업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박한은 자기 총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소총 대신 지급된 레이저 건은 손에 익은 무게부터 달랐다. 작전 전에 보급을 맡은 정헌 소령이 무기 상자 곁을 떠나지 못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거 몇 정 있는 줄 알고 전원 지급을 하라는 겁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소령은 한 정씩 내주었다. 이번에는 탄두와 탄피를 남겨 상대에게 무기의 출처를 짐작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장비를 보호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뒤에도 그는 마지막 상자가 나갈 때까지 따라 나왔다.

박무진은 출발 전 더 짧게 말했다.

“무기 흔적을 줄이는 임무지, 사람을 무조건 없애는 임무가 아니다. 민간인과 항복자는 구분한다. 장비는 한 점도 두고 오지 마.”

박한은 그 말을 기억하며 막사를 보았다. 다른 조의 보고가 낮게 이어졌다. 미리 확인한 사람과 실제 현장에 있는 사람이 맞는지 다시 살피는 동안, 여자들에게 찬물을 뿌리던 병사 하나가 순득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 대위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구조 대상 위협받고 있습니다. 지금 들어가야 합니다.”

박무진은 관측 보고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명령했다.

“작전 개시.”

창고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일본군 병사가 담배를 떨어뜨렸다. 그는 손을 뻗어 주우려는 사람처럼 허리를 굽혔다가 무릎을 꿇었고, 곁의 동료는 술에 취했느냐고 말하려다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다. 큰 총성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의 고려군 사격수가 총구를 옮겼다.

객차 옆에서는 병사가 순득의 팔을 놓고 몸을 떨었다. 순득이 주저앉자 다른 병사가 욕을 하며 돌아섰으나, 소총을 들기도 전에 가슴 쪽 군복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순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누가 무엇으로 이들을 때리는지 보이지 않았다.

“객차 쪽 위협 제거.”

“외곽 경계 제압했습니다.”

짧은 보고가 들어오는 사이 역 구내의 일본군이 하나씩 쓰러졌다. 살아 있는 병사들은 총소리가 아니라 옆 사람의 몸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적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경비반장이 호각을 입에 물었으나 소리를 길게 내지 못했고, 그를 부축하려던 자는 무기를 놓고 두 손을 들었다.

“투항자 확인. 사격 중지.”

박한은 그쪽을 다른 병사에게 맡기고 막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 하나가 안에 있었다.

* * *

막사 안의 소좌는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은은 문 앞을 막은 병사와 탁자 너머의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손짓에 따르지 않자 소좌가 다가와 팔을 잡았고, 그녀가 몸을 틀어 뿌리치는 순간 두 번째 뺨이 날아왔다.

“말을 못 알아듣나?”

바닥에 넘어진 지은은 입술의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다가오는 발을 보다가 가까운 그릇을 집어 던졌으며, 깨진 사기 조각과 국물이 흩어지는 것을 본 소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권총을 꺼내자 지은은 뒤로 물러섰으나 등에는 이미 벽이 닿아 있었다.

지은은 권총의 검은 구멍을 보았다. 소좌의 손가락이 움직였으나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굳었다. 미간에 작은 자국이 생기고 몸이 탁자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쓰러졌다. 권총이 지은의 발앞으로 미끄러졌다.

잠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은은 벽을 짚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죽는 순간이 지나간 것인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와작!

천장의 얇은 판이 부서지며 먼지가 쏟아졌다. 검게 칠한 얼굴의 군인 둘이 내려왔다. 한 사람은 지은 앞에 서고 다른 사람은 문 쪽을 확인했다. 문을 지키던 일본군은 이미 그 앞에 쓰러져 있었다.

“막사 확보. 구조 대상 생존.”

군인 하나가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말했다. 지은은 그를 보다가 소좌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권총을 쥐고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이 이제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를 쓰러뜨린 총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새끼가 총을 꺼내서…….”

한 병사가 이를 갈며 말을 삼켰다. 옆의 병사가 손을 들어 멈추게 한 뒤 권총을 멀리 밀어냈다. 그제야 지은에게 얼굴을 돌리고 무릎을 꿇었다.

“조선말 알아들으십니까?”

지은은 알아들었다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검게 칠한 얼굴이 낯설었고 그 얼굴에서 나오는 말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병사는 총구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 물었다.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걸을 수 있겠어요?”

고개는 끄덕였으나 다리가 먼저 접혔다. 팔을 받치는 손에 지은은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가 멈추었다. 그 손이 끌어당기지 않고 기다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밖으로 나온 지은은 걸음을 멈췄다. 큰 총소리도 없었는데 역 구내에 일본군이 쓰러져 있었다. 소총을 쥔 채 엎어진 자와 담벼락에 기댄 자, 객차 계단에 걸쳐진 몸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자기들을 실어 온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사납고 무서운지 알고 있었기에, 이토록 대항도 못 하고 쓰러져 있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 않았다.

멀리서 지은을 본 순득이 달려왔다. 둘은 서로를 붙든 뒤 한참 놓지 못했고 병사가 담요를 덮어 준 뒤에야 조금 몸을 떼었다. 지은은 순득의 손이 차가워 자기 손으로 감쌌다.

소녀들은 구조 병력 쪽으로도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일본군을 쓰러뜨린 힘이 지금 자기들 곁에 서 있었다. 검게 칠한 얼굴과 듣도 보도 못한 총을 보며 누구는 뒷걸음질했고 누구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울었다. 가까이 온 여성 장교가 조선말로 이름을 묻고 젖은 옷 위에 담요를 여며 주었으나,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사이 다친 여자를 옮기려고 작은 운반차가 들어왔다. 이미 주저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그것을 보고 뒤로 몸을 밀었다. 운용병은 급히 멈추고 사람이 먼저 곁에 가서 설명하게 했다.

“저건 뭐예요?”

순득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지은도 몰랐지만 의무병이 다친 여자를 그 위에 눕히고 담요를 덮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카메라가 달린 기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 위에 실린 사람이 조금 덜 아프게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 * *

무기를 내려놓은 병사들은 따로 모았고 작업자들과 구조된 여자들은 상태를 확인한 뒤 차량으로 보냈다. 일본인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통역이 국적과 가족을 묻자 누군가 얼굴을 가렸으며, 담당 장교는 사람을 가르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말과 돌아갈 곳을 알아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인들 곁에 서지 못하고 떨어져 있던 일본인 여자 하나가 휘청거렸다. 순득은 잠깐 망설이다가 담요 끝을 내밀었다.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그 끝을 잡았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도 얼마간 같은 추위를 덜어 냈다.

수송대가 들어올 때 땅이 먼저 울렸다. 여자들은 일본군이 다시 오는 줄 알고 담장 쪽으로 모였으나, 지 대위가 자기편이라고 알린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차량의 크기는 그들이 보아 온 트럭과 달랐다. 철판과 큰 바퀴가 창고 옆을 지나가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길을 넓게 비웠다.

“단결. 수송대 임하 중위입니다.”

임하가 뛰어내리자 지 대위가 시계를 가리켰다.

“늦었다.”

“길이 좁습니다. 차보다 길부터 들어내고 와야 할 판이었습니다.”

지 대위는 핀잔을 더 주지 않고 작업을 재촉했다. 박한의 분대는 구조 인원을 차량으로 넘긴 뒤 수송대 주변을 경계했다. 장비를 드러내는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지은은 일본군의 짐을 저 차들에 옮겨 싣는 데 얼마나 걸릴지 생각했다. 역의 군수품 상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객차의 문을 열자 안에도 상자가 가득했다. 그런데 병사들은 짐을 하나씩 내리지 않았다. 먼저 객차 사이로 들어가 연결부를 풀었고, 대형 장비가 옆에서 자리를 잡았다.

철이 맞물리는 소리와 짧은 고함이 오갔다. 객차 하나가 천천히 들렸다. 지은은 눈을 깜박였다가 옆의 순득을 보았다. 순득도 입을 벌린 채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언니…… 저걸…….”

커다란 바퀴를 단 운반대가 객차 아래로 들어갔다. 작업병이 고정 상태를 확인하고 손을 들자 들려 있던 객차가 그 위에 내려앉았다. 열차에서 떼어 낸 한 칸이 이제 선로가 아닌 바퀴 위에 놓여 있었다.

지은은 선로를 보다가 바퀴를 보았다. 기차가 철길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뜯어 가져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처음 하는 일이 아닌 것처럼 차분하게, 다음 객차 앞에 같은 장비를 세우고 있었다.

운반대가 돌아 나오자 쇳소리가 길게 났다. 순득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고 지은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두려운 것인지 놀라운 것인지, 이제는 그 감정조차 가르기 어려웠다.

“언니, 저 사람들 정말 조선 사람 맞아요?”

지은은 대답하려다 멈췄다. 같은 말을 쓰고 자기들을 살려 준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자기가 알던 조선에는 이런 군대가 없었다.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녀는 순득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최 하사는 중계기의 배터리를 바꾸며 마지막 차량이 지나간 뒤 회수하겠다고 보고했다. 박한은 짧게 대답하고 버스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자마자 잠든 여자들이 있었고 잠들지 못하는 여자들은 두 손을 무릎에 모은 채 앞을 보고 있었다.

지은은 창밖을 보다가 물컵을 받았다. 박한이 기억나는 지명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간판에서 읽은 내용을 말했고,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조금 오래 걸렸다.

“우리를 집에 보내 주시는 건가요?”

박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은은 그 망설임을 보고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먼저 안전한 곳으로 갑니다. 그 뒤에 각자의 사정과 돌아갈 방법을 확인해야 합니다.”

약속하지 않는 말이라서 서운했으나 쉽게 약속하는 말을 다시 믿고 싶지도 않았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찬물이 목을 지나가는 동안에야 자기가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알았다.

* * *

수송대는 확인된 길을 따라 움직였다. 밤이 깊어지자 선두 차량의 관측 장비와 운전병의 시야가 함께 길을 찾았고, 능선을 돌아갈 때에는 지원차량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 영상 대신 짧은 음성 보고만 오갔다. 화면이 있다는 사실과 화면에 필요한 것이 늘 보인다는 사실은 다른 모양이었다.

지은은 그 낯선 장비들을 보다가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살아 있다는 말만큼은 전하고 싶었는데, 손을 뻗어 닿을 수 없는 곳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달리는 차 안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순득의 머리가 어깨에 기울었다. 지은은 그 머리를 받쳐 주다가 자신도 눈을 감았다.

기지에 도착하자 불빛 때문에 여자들이 깨어났다. 씻을 곳과 잘 곳이 있다는 설명에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도 섞였으나,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그치는 목소리는 없었다. 안내받은 방의 침대를 보고도 지은은 곧바로 앉지 못했다. 이렇게 쉬게 해 주면 다음에는 무엇을 요구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성 장교는 문을 열어 둔 채 도움을 청하는 버튼과 의무실에 갈 시간을 설명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간 뒤에도 지은은 잠깐 문을 보고 있었고, 그 사이 순득이 수도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더운 쪽에서는 김까지 올라왔다.

순득은 손을 물에 넣고 웃다가 갑자기 울었다.

“엄마도 이런 물로 씻으면 좋겠어요.”

지은은 그녀 곁에 앉았다. 따뜻한 물은 이 방까지 와 있었으나 두 사람의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 흘러가지는 못했다.

* * *

다음 날 아침에는 식사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오래 걸렸다. 의무대는 상태를 살폈고 급양병은 조금씩 먹도록 권했으며, 아직 입에 넣지 못하는 사람과 그릇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지은은 병사들의 말투를 들었다. 같은 조선말 안에 고향에서 듣던 억양과 처음 듣는 단어가 함께 들어 있었다.

면담에서는 가족과 건강 상태를 먼저 묻고 그 뒤에 해 본 일을 물었다. 지은은 일본어 문서를 읽을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순득은 바느질을 배우던 중이었다고 했고, 다른 여자들은 장사와 농사와 간호 일을 이야기했다. 누구는 자기 일을 길게 설명했고 누구는 글을 모른다는 말부터 미안한 얼굴로 꺼냈다.

“이걸 적으면 일을 해야 하나요?”

지은의 질문에 담당 장교가 펜을 내려놓았다.

“강제로 일을 맡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겁니다. 지금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지은은 종이의 빈칸을 보다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직 기지에는 가르칠 아이가 없었으나 장교는 그 말을 지우지 않았다. 지은은 자기 이름 옆에 적히는 글자를 바라보며, 여기에서 필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 보았다.

같은 시간 지휘부에서는 작전 성공 보고 뒤에 남은 일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확보한 물자만큼 여유가 생길 줄 알았던 급양대의 계산에는 새 식구가 들어갔고, 의무대의 약품 사용량도 늘었다. 박무진은 돌려보낸 사람들이 다시 일본군의 조사를 받을 위험을 말했으며 김의진은 그렇다고 붙잡아 둘 수는 없다고 했다.

임영옥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보고서를 덮었다.

“각자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요.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도 찾고. 우리가 안전한 곳이라고 했으면 오늘 잠자리만 마련하고 끝낼 수는 없지.”

김영은 교육실 사용을 요청했다. 현지인들이 생활 규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문을 고치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글과 숫자, 기초 단위를 가르칠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참이 통신대의 빈 의자를 보내겠다고 하자 임영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창한 설립 계획보다 열쇠와 의자가 먼저 필요한 일이었다.

* * *

지은은 김영의 작업실에서 기지 안내문을 읽다가 첫 문장에 멈췄다.

“접근 금지 구역은 알겠는데, 보안 인증은 무엇인가요?”

박사는 설명을 시작하다가 말을 고쳤다.

“출입 허가를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쓰시면 되지 않나요?”

옆의 연구원이 입을 가렸고 김영은 잠깐 지은을 보더니 새 종이를 꺼냈다. 그 뒤로도 낯선 말이 여러 개 나왔다. 장비를 고치던 책상에서 안내문을 고치는 일이 시작되었으며, 설명을 많이 해야 하는 문장일수록 정작 설명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불친절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영철이 드론 기록을 가져온 것은 그때였다. 역의 모습이 화면에 뜨자 지은의 손이 멈췄고, 김영은 곧바로 화면을 껐다.

“미안합니다. 나중에 보죠.”

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숨을 고르고 나니 역에서 들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조선인 작업자들이 왕청현 이야기를 했어요. 일본군이 들어올 거라서 사람들이 피란을 준비한다고요.”

김영철은 지명을 다시 확인했다. 지은은 기억나는 발음을 종이에 적고 사람들이 서 있던 곳까지 설명했으며, 그가 정보부에 알리러 나간 뒤에도 손끝에 힘이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에서 들은 말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 필요한 말일 수 있었다.

저녁 산책 때 순득은 운반로봇을 보고도 더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저것도 밥을 먹느냐고 물었고, 지은은 다른 것을 먹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가 무엇을 먹느냐는 다음 질문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운용병이 배터리를 바꾸며 전기를 넣어 준다고 설명했다. 불빛과 더운물과 혼자 움직이는 수레에 같은 힘이 쓰인다는 이야기를 순득은 오래 듣다가 물었다.

“배우면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배워 보자.”

지은은 순득을 보고 대답했다. 자신에게도 해 두고 싶은 말이었다.

* * *

왕청현의 자료가 모이자 임영옥은 선발대를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사람을 데리고 기지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날 임무가 아니었다. 현지에 머물며 주민과 독립군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고, 지키겠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필요한 물자와 인원도 따라가야 했다.

차출된 박한은 의무실에 들렀다. 진천이 현지 사정을 돕겠다고 했으나 아직 회복 중이라 데려갈 수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진천은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자기가 아는 길과 지명을 그려 주었다. 박한은 그 종이를 다른 지도 사이에 끼우지 않고 수첩 안에 따로 넣었다.

그날 밤 지은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살아 있다는 말 다음에 어디에 있는지를 적으려다 멈추었고, 만난 사람들을 설명하려다가 다시 지웠다. 끝내 남은 것은 자신이 지금 안전한 곳에 있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보내 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편지를 접는 동안 문밖에서는 경계병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출발을 앞둔 박한은 교육실 앞에서 지은과 순득이 의자를 놓는 모습을 보았다. 글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내일부터 오기로 했다고 했다. 칠판을 닦던 순득의 소매가 아직 낯선 군용 담요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물자 목록을 펴고 빈칸에 분필 한 상자를 더 적었다. 왕청현에서 그것을 쓸 날이 올지는 몰랐으나,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