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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지은이 허균

조선국 세종대왕 즉위 15년.

홍희문 밖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 이름은 문이었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명망이 매우 높았고,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용문에 올라 벼슬길에 나아가 한림에 올랐고,

그 명망이 조정에서 으뜸이 되자 임금이 그의 덕을 높이 사 이조판서에 이어 좌의정까지 맡기게 되었다.

홍승상은 나라의 은혜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해 국정을 돌보았고,

그 덕에 사방이 평온하고 도적이 사라지니,

나라에는 화평한 바람이 불어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날—

승상이 난간에 기대 잠시 졸고 있었는데,

찬바람이 길을 인도하듯 하여 어느 낯선 곳에 이르게 되었다.

푸른 산은 깊고 어둡고,

맑은 물은 넓고 길게 흐르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는 수없이 늘어져 녹음이 짙었고,

황금빛 꾀꼬리는 봄기운을 희롱하며 날아다녔다.

기이한 꽃과 풀들이 만발한 가운데,

청학과 백학, 공작과 비취새가 봄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승상은 그 경치를 감탄하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높은 절벽은 하늘에 닿아 있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은 골마다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오색 구름이 엉켜 흐르는 그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청룡이 물결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머리를 들고 울부짖자 산이 무너지는 듯했고,

입을 벌려 기운을 토해내더니 그 기운이 그대로 승상의 입으로 들어왔다.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승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큰 인물을 낳게 될 것이다.’

그는 곧장 내당으로 들어가 시녀들을 물리고,

부인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려 했다.

그러나 부인은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나라의 대신이십니다. 체통이 이처럼 높으신데, 대낮에 정실에 들어와 이런 행동을 하시니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승상은 잠시 생각했다.

부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꿈을 헛되이 보낼까 두려워 그 뜻을 말하지 못하고 계속 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옷을 털어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상은 크게 탄식했다.

부인의 완고한 성격을 원망하며 한참을 한탄하다가,

결국 외당으로 나왔다.

마침 시녀 춘섬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주변이 고요한 틈을 타,

승상은 춘섬을 불러들여 정을 나누었다.

울화는 조금 풀렸지만,

마음속의 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춘섬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성품이 온순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뜻밖에 승상의 위엄에 눌려 거절하지 못하고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는 바깥에 나가지 않고 몸가짐을 더욱 조심했다.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머무는 방에 오색 구름이 감돌고 향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아이였다.

사흘 뒤, 승상이 와서 아이를 보았다.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그 아이가 천하게 태어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길동’이라 하였다.

길동은 자라면서 점점 비범한 기질을 보였다.

한 번 들으면 열 가지를 깨닫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부인을 보며 탄식했다.

“이 아이는 비록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지만, 천하게 태어났으니 무엇에 쓰겠소. 원통하구나, 부인의 고집이여.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소.”

부인이 이유를 묻자,

승상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날 내 말을 들었더라면 이 아이는 부인의 몸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어찌 천한 신분이 되었겠소.”

그리고 그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길동은 여덟 살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고,

승상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길동의 마음속에는 깊은 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

그는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원망했다.

어느 가을밤—

보름달이 밝게 떠 있었다.

길동은 뜰 아래를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람은 쓸쓸히 불고,

기러기 울음소리는 더욱 외로움을 더했다.

길동은 홀로 탄식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공맹의 도를 배우고,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천하를 호령하고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왕후장상이라 해서 씨가 따로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듯 휘두르며,

솟구치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때—

승상이 창을 열고 밖을 보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깜짝 놀라 외쳤다.

“밤이 깊었는데, 무슨 일로 그러느냐?”

길동은 칼을 던지고 엎드렸다.

“소인은 대감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사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천한 자라 부르며 손가락질합니다.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승상은 마음이 아팠지만,

혹시 그 말이 더 퍼질까 두려워 엄하게 꾸짖었다.

“재상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이 너 하나뿐이냐.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라.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 용서하지 않겠다.”

길동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

잠시 후 물러난 길동은

어머니를 붙잡고 통곡했다.

“어머니, 저는 반드시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천하게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살고자 합니다.

부디 저를 막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찌 어미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길동은 단호했다.

“세상 사람의 말이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게다가 요즘 곡산모의 태도를 보니 우리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난 뒤에는 어머니께 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곡산모는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길동은 말했다.

“세상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을 헛되이 여기지 마시고 앞으로를 지켜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