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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梅月)

지은이 최서해 · 2026-04-08

별빛이 막 사라진 푸른 새벽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구름이 흘렀고,

차가운 안개가 걷힌 서쪽 산의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박생의 일행은 그렇게 길을 나섰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끝에서는 새들이 재잘거렸고,

푸른 소나무 사이로는 단풍이 마치 불길처럼 타오르는 듯했다.

들판에는 벌써 농촌의 남녀들이 나와 벼를 베고 있었다.

서리 내린 아침의 싸늘한 기운은 박생의 여윈 뼛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묘한 기쁨이 감돌고 있었다.

한적한 절로 가기만 하면, 자기 뜻을 반드시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시비에 불과한 매월이 보여 준 얼음 같은 태도를 떠올릴 때면 양심이 찔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결국 매월에 대한 애욕이었다.

이토록 강한 욕망이 가슴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박생의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실로 박생은 양반의 체면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매월을 생각했다.

‘나는 상전이고, 매월은 천비다.

나를 거절한 것도 잠시 부끄러워서였겠지. 속마음까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박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거절이 그저 수줍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자꾸만 서운해졌다.

매월은 교군에 실려 박생의 말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동에도 없고 서에도 없고, 남에도 북에도 없었다.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기 몸에도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흔들리고 헤매고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끝없이 밀려와 가슴은 답답했고 정신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에 의지하고, 누구에게 구원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제야 매월은 자신의 외롭고 고단한 처지를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교군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깊고 어두운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매월은 문득 눈을 번쩍 떴다.

하늘에는 솜처럼 흰 구름이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을 타고, 자신의 마음도 자꾸만 저 끝없는 하늘 저편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들판에서는 가을걷이에 바쁜 농촌 여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매월은 마치 솔개에게 채여 끌려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눈앞에 그려 보는 듯했다.

가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상전의 명령이 추상같이 내려오는데, 무엇이 그 위엄을 버틸 수 있겠는가.

따라가면 그물에 걸린 고기요, 새장에 갇힌 새가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몸부림치고 싶었다.

목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감수하더라도, 다 말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은혜를 생각하면 차마 상전에게 노골적으로 맞설 수가 없었다.

박생의 사랑은 받지 않았으나, 박생의 아내와 그의 어머니는 매월을 친딸처럼 아껴 주었기 때문이다.

의리와 충성을 귀하게 여기던 시대였다.

‘화룡도’에서 조조를 베지 않고 돌려보낸 관운장의 의리를 찬미하고,

견마의 충성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란 매월로서는, 은혜라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품는 감정이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천성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한낱 아녀자요 천비인 내가, 저 헌헌장부의 간담을 태우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매월의 희생적인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그렇다고 몸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정조를 내어주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도 참혹한 일이었다.

만약 한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을 위해서였다면,

혹은 논개나 초선처럼 큰 뜻과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면,

그 정조를 바치는 것도 감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전의 한때 성욕을 채워 주기 위해,

정조라는 귀한 비단에 함부로 가위를 대는 일만은 뼈가 갈리고 살이 찢겨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박생의 눈앞에 있는 한, 그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박생의 번민은 더욱 깊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이 괴로운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은혜를 입은 상전의 병세가 더 심해지면, 그 또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천지는 이렇게 넓은데, 이 한 몸 받아 줄 곳은 어디에도 없구나.

매월은 교군 위에서 그렇게 탄식하고, 또 절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무너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실상 그녀의 속은 맑고 흰 사람처럼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