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은이 뮤즈 · 2026-04-02
지후는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어제보다 굵어진 손목뼈 위로 그의 온기가 스쳤다.
지후: 가자. 샤워하고 바로 자. 내 방에서.
남녀의 대화였으면 분명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말이 될텐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누가 대신 움직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응.
현관 불이 꺼지고, 지후의 집으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발자국 소리만 또박또박 울렸고 내 심장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물론 한 침대에서 같이 자지는 않았다. 난 지후의 침대에서 지후는 소파에서......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반듯하게 앉아 있는 나를, 지후는 말없이 바라봤다.
어제 밤의 혼란이 아직 그의 눈에 남아 있었다. 몸을 만져 보았다.
혹시 밤사이에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어제의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지후: …잠은 좀 잤어?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나: 응. 그런데… 이상해. 자꾸 몸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느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낯설어.
나는 손등을 내려다봤다. 어제보다 더 굵어진 손가락, 붙지 않던 남성복 티셔츠의 어깨선. 뼈와 근육이 아직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지후: 지윤아.
지후가 침대 끝에 앉았다.
지후: 오늘… 집엔 못 돌아가.
나: 왜?
그는 핸드폰 화면을 내 앞에 밀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을 내 앞에 밀었다.
발신자: 네오젠 파마 임상지원팀
부재중 전화 4통.
문자 2건.
그리고 마지막, 새벽 2시 14분.
- 윤지윤 님, 주사 후 경과 체크가 필요합니다. 오늘 중 방문 또는 전화 부탁드립니다.
-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 주소지를 기준으로 확인 절차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나: …경과 체크? 왜?
지후: 몰라. 근데 톤이… 이상해. 병원도 아니고, 이런 시간에?
지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지후: 어제 네 상태… 그 약 때문이라고 했잖아. 제약회사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거야.
나: 숨겨…?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직도 어제 라은의 표정이 선명했다. 죄책감, 공포, 그러나 그보다 강한 ‘지키려는’ 얼굴.
지후: 오늘 라은 선생님이 연락 준다 했어. 다시 검사해보자고.
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몸이 전에 없던 무게감을 품고 있어서, 한 걸음마다 균형이 달라졌다.
지후: 네가 먼저 씻어.
지후: 밖에 잠깐 나갔다 올게.
나: 어디 가?
지후: …너 출근 처리.
그제야 현실이 생각났다.
병원.
데스크.
내 이름이 걸려 있는 사무실.
내 책상 위 마른커피 얼룩.
월말 보고서.
담당 교수의 잔소리.
지후: 지윤아, 너 지금… 버티려고 하지 마.
지후: 너… 어제도 사라질 뻔했어.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딱히 깊게 숨을 들이켜지 않아도, 가슴이 아려왔다.
나: …조심해서 다녀와.
지후: 당연하지. 너는 여기서… 절대 혼자 나가지 말고. 절대로.
그의 시선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했고, 그러나 깊은 곳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이상하게도 내 가슴 어딘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지후가 나간 뒤, 나는 지후의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여자였을 때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던 공간. 향수 냄새 대신 휑한 세제 냄새, 벽에는 아무 것도 없고, 책상엔 축구공 키링과 영양제통 하나.
지후 그 자체 같은 방.
나… 지금 진짜로 여기 있는 거 맞아?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그때 라은의 메시지가 왔다.
- 지윤 씨, 오늘 오전 11시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지후 씨에게도 연락했어요. 꼭… 조심하세요. 꼭.
그 한 단어에서 보이지 않는 무게가 느껴졌다.
************************************************
병원.
* 지후 시점. *
지후: 저… 윤지윤 씨 가족인데요.
지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표정은 걱정하는 오빠처럼 유지했다.
“아, 지윤 씨 아직 출근 안 했던데요?”
동료 직원에게 안내받은 총무팀 상관인듯한 이가 물었다.
그녀가 인사담당자라 했다.
직원: 연락도 안 되고… 혹시 어디 아픈가요?
지후: 네… 갑자기 쓰러져서요.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직원: 헉, 괜찮아요?
지후: 네. 그래서 휴가 처리 부탁하려고요. 한두 달 정도는 회복 기간 필요할 것 같아서.
직원은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내밀었다.
언제든 다시 연락주세요. 지윤 씨… 항상 성실했는데… 하필 이럴 때…”
지후는 그 말에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말이 지윤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어젯밤 울먹이던 지윤, 남자의 목소리로 “무서워”라고 말하던 지윤. 반대로 그 대상이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남자로 살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지후: 지후는 심호흡을 한 뒤 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작은 안도의 숨.
나: …고마워.
그 한마디에 지후는 목 안쪽이 뜨겁게 떨렸다.
*** *** ***
집으로 돌아온 지후가 외출준비를 마치고 침대 모서리에 있는 나를 이끌고 클리닉으로 향했다.
나: 여기… 사람들 너무 많은데…
지후는 모자를 푹 눌러쓴 나를 이끌고 클리닉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후: 괜찮아. 라은 선생님이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했어.
작은 직원 출입문이 삐걱 열리고 흰색 가운 안에 청색 스웨터를 입은 라은이 모습을 보였다.
정라은: …지윤 씨.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놀람과 죄책감과… 어딘가 묘한 감정.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나: 아… 저… 선생님.
정라은: 괜찮아요. 가까이 와요.
라은이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그 순간, 나는 심장이 크게 울려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후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정라은: 안쪽으로 들어가죠. 오늘…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게 있어요.
라은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렸고, 그 떨림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밖의 햇빛이 차단되고 좁은 진료실 안에 우리 셋의 숨소리만 남았다.
라은은 진료침대 옆 모니터를 켜며 말했다.
정라은: 지윤 씨, 제약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받은 건… 딱 두 문장.
그녀는 폰 화면을 보여줬다.
- 시술 대상자의 현재 상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 금일 내에 연락이 없을 경우 직접 방문하겠습니다.
나: 직접… 방문?
입술이 떨렸다.
지후: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온다고요?
정라은: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여긴 너무 눈에 띄어요. 그래서… 오늘은 다른 데로 이동해야 해요.
이동.
그 단어가 귓속에 닿자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나: 저… 어디로 가야 하는데요…
정라은: 지윤 씨.
정라은: 라은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죄책감 대신 결심, 두려움 대신 따듯함.
정라은: 당분간… 여기 머무르는 건 위험해요. 그들이 무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윤 씨의 상태는 그들에게 절대 알려져선 안 돼요.
나: 왜… 왜요?
라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라은: 저도… 전부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알아본 바로는… 그 약이 원래 ‘가벼운 피로회복 주사’와 비슷한 카테고리로 개발되고 있었다는 것 같아요. 단기 효과가 강해서 일반 병원에서는 쓰기 어렵고… 대신 민간 클리닉을 통해 데이터를 모으는 식으로요.
그녀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정라은: 문제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성분과, 제가 본 성분이… 너무 달랐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시술 환자에게 ‘즉각 연락을 요구한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뜻이에요.
지후: …숨기다니, 뭘요?
정라은: 모르겠어요...
라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라은: 다만… 지윤 씨 경우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는 건 확실해요. 그들이 찾으려고 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거고요.
라은의 눈빛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정라은: 지윤 씨 몸은… 그들에게 ‘이상 반응 사례’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제게는 너무 무서워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지후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지후: 지윤아. 지금은… 일단 나랑 있어.
그의 손. 남자의 손. 그리고 그 손을 잡고 있는 나의 손. 남자의 손.
둘의 체온이 뒤섞여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멜랑콜리하게 조여왔다.
*** *** ***
정라은: 오늘 하루는…
정라은: 제가 예약해둔 임시 숙소로 이동하세요.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이에요.
나: 선생님도 같이 가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은은 잠시 멈칫했다.
정라은: …나중에 갈게요. 두 분 먼저 가요.
지후가 나를 바라봤다. 불안과 결심이 공존하는 눈.
지후: …갈까?
나: ...응
나는 작게 대답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남자의 몸으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무게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르는 감정의 강 한가운데로.
클리닉을 벗어나며 뒷문을 나서는 순간, 햇빛이 다시 쏟아졌고 지후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겹쳐졌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후야.
지후: 응?
나: 나… 이제부터 뭐가 될까.
지후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너무나 부드럽게 말했다.
지후: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몸이 아니라. 넌… 윤지윤이니까.
나는 그 말에 숨을 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찔하게 가슴이 흔들렸다. 그리고, 또다른 현실적인 진동. 휴대폰이다. 라은에게서 온 메시지 하나.
- 조심하세요. 오늘… 무조건.
모텔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대신 조용했고, 간판도 작은 탓에 눈에 띄지 않았다. 라은이 “오늘은 여기서 쉬세요”라고 말하며 예약해둔 곳이었다.
지후가 문을 열자, 내 앞에 펼쳐진 방은 밝은 색 벽지, 작은 테이블, 흰색 침대 하나.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지후: …여기 괜찮아?
지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조금… 좁네.
지후: 어쩔 수 없지. 흔적 남기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지후는 문을 잠그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어제부터 내려오지 않는 걱정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지후: 너… 진짜 괜찮아?
나: …괜찮은 척하는 중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목이 뜨겁게 조여왔다. 참으려 해도 작은 숨이 흡 하고 새어 나왔다.
지후: 지윤아.
지후가 다가왔다.
지후: 울어도 돼.
나: 안 울어. 나, 지금 울 일 아니야.
지후: 아니야. 울 만한 일 충분히 되고도 남아.
그 말에, 참던 눈물이 진짜로 스르륵 흘렀다. 남자의 얼굴로 흐르는 눈물은, 예전보다 훨씬 천천히, 더 무겁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후가 말없이 나를 안았다.
조심스레,
나는 그런 지후에게 기대어 울음이 터져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던 것 같았다. 지후에게서 남자스킨과 함께 섞인 약간은 콤콤하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울다가 말고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말없이 나를 다독이던 지후가 말했다.
지후: 지금은 남자고 여자고 그런 문제 아니야. 그냥… 네가 아프잖아.
그 순간이었다. 내 가슴 한가운데가 또 울컥하고 뒤틀렸다.
나: 지후야…
지후: 응.
나: 나… 지금 나 자신도 잘 모르겠어.
지후: 괜찮아. 모르면… 알아갈 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게.
지후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는데 왜인지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그때 내 핸드폰 진동음이 또 울렸다.
정라은.
손이 떨렸다. 전화를 받자 그녀의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정라은: 지윤 씨… 안정됐나요?
나는 코끝을 훔치며 말했다.
나: 네. 지금 지후랑 같이… 있어요.
정라은: …다행이다.
라은의 목소리는 안도와 긴장 사이였다.
정라은: 혹시 통증은 없죠? 체온은… 평소랑 비슷해요?
나: 네. 그냥… 마음이 좀…
정라은: 그건 당연한 거예요.
정라은: 지윤 씨가 겪는 변화는…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당신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락 드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작은 숨이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 …고마워요.
전화를 끊었는데도 라은의 말투가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후가 내 표정을 보다가 떨리는 눈을 좁혔다.
지후: 라은 선생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네.
나: …그런가?
지후: 응.
지후: 뭔가… 환자 대하듯이 아니라… 그냥… 너를…
지후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혀를 깨무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 …뭐라는 건데.
나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심장은 두 배로 뛰었다. 지후가 이유 없이 화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