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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신데렐라의 일기장

지은이 외인 · 2026-04-02

의사: ……이건, 의학계에 보고해야 할 미스터리입니다.

주치의 양반이 차트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동공이 거의 지진 난 수준이다.

의사: 심장 기능이… 정상을 넘어서, 무슨 운동선수 심장처럼 펌프질을 해대고 있어요. 기적이라고밖에는…….

의사 쌤, 그거 기적 아니에요. 엔진 교체거든요.

연비 구린 경차 엔진 떼어내고, 8기통 트럭 엔진 얹은 거라니까요?

뭐, 왜 영혼 교체뿐 아니라 육신까지 수리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침대 위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세상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오예. 링거 탈출이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동안의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성함이 한지수인 여사님.

또각, 또각. 칼 같은 하이힐 소리.

나이는 40대 후반쯤 됐을 텐데 30대라 해도 믿을 만한 젊음을 갖고 있다. 게다가 설아하고는 또 다른 느낌의 한미모다.

한지수: 그럼, 바로 퇴원해도 된다는 건가요?

목소리에 온기라곤 1도 없다.

'어머, 우리 딸 다행이다!'가 아니라 '스케줄 꼬이기 전에 해결됐군'에 가까운 뉘앙스.

미인이긴 한데, 전형적인 [냉미녀] 스타일이다.

의사: 네, 사모님. 당장 뛰어다녀도 될 정도입니다.

한지수: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알겠어요. 준비시키죠.

그러고는 날 쳐다보며,

한지수: 고생했다.

끝이다.

새어머니는 그렇게 짧게 몇 마디 하고 쿨하게 나갔다.

기쁨을 표현한 문장은 '정말 다행이네요' 딱 하나로구먼.

뒤따르던 이모만 내 손을 잡고 눈물바다다.

나는 겉옷을 챙겨 입으며 생각했다.

'설아 기억 속에선 저 아줌마가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거 콩쥐팥쥐 스타일인가, 신데렐라 스타일인가.'

근데… 마녀치고는 병원비 결제 속도가 너무 빠르다. 5G급이야.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대문을 통과했다.

창밖을 보던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설아: ……와.

이게 집이야, 리조트야?

대한민국에 이런 집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드넓은 잔디밭, 분수대, 그리고 웅장한 저택.

김철수 인생 36년, 옥탑방이 내 우주였는데. 여긴 숨만 쉬어도 수명 연장이 될 것 같은 피톤치드 클래스다.

최 실장: 다 왔다, 설아야.

운전석에서 내린 최 실장이 뒷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세 사람이 쪼르르 나와 인사했다.

서진: 설아 학생, 어서 와요!

미나: 아이고, 이제 왔네. 고생했어요.

나는 속으로 인원을 빠르게 체크했다.

나를 전담하는 이모, 운전과 경호를 맡은 최 실장. 거기에 지금 인사하는 이 세 사람까지.

맨 왼쪽은 40대쯤 되어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아마 주방 담당이시겠지. 어떻게 아냐고? 조리용 앞치마에, 음식 냄새.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자들. 한 명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젓가락처럼 마른 체형이고, 다른 한 명은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앳된 인상이다.

이모: 서진 언니, 미나 언니. 설아 짐 좀 방에 올려다 줘요.

이모의 말에 두 사람이 "네!" 하고 캐리어를 받아 갔다.

오케이. 까무잡잡한 쪽이 서진 언니, 앳된 쪽이 미나 언니. 입력 완료.

'이모랑 최 실장까지 합치면 상주 인원만 다섯이라…….'

아무리 재벌이라도 좀 많은 거 아닌가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 집 안을 둘러보니 납득이 갔다.

입구부터 끝이 안 보이는 복도에, 2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단, 곳곳에 놓인 장식품들까지.

'아, 인정.'

이 정도 평수면 혼자 청소하다간 사람 골병들겠다.

주방 한 명에 청소·살림 두 명. 딱 맞는 밸런스네.

나는 무심한 척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받았다.

'…너무 건방져 보였으려나?'

아니, 억울하다. 이건 내 인성이 터져서가 아니다.

생각을 해 봐라. 평생을 좁은 방구석에서 혼자 지지리 궁상떨며 살던 놈이다.

그런데 현관문 열자마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해대는데, 당황 안 하고 배기냐고.

너무 놀라서 몸이 일시 정지되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목만 까딱거린 것뿐이다. 일종의 고장 난 로봇 같은 반응이랄까.

나는 뻘쭘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집안을 쭉 스캔했다.

천장 조명을 받아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 얼굴을 비추면 모공까지 보일 것 같이 매끈하다.

'흠, 좋기는 한데…….'

문제가 생겼다.

방이 너무 많다. 대체 내 방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냐?

주춤거리고 있자 서진 언니가 앞장을 서서 걷는다.

흠, 일단 따라가자.

다행히 2층 내 방으로 안내받았다.

달칵.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었다.

설아: ……여기가 방이라고?

운동장이다.

핑크와 화이트 톤으로 도배된 방은 내가 살던 옥탑방의 정확히 20배는 되어 보였다.

침대는 킹사이즈, 한쪽 벽면은 곰 인형과 피규어로 가득.

나는 침대에 다이빙했다.

폭신. 구름 위에 누우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감탄은 여기까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

곧 저녁 식사다.

'최종 보스'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탁에 무방비 상태로 갈 순 없다.

나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식별 코드가 필요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기억상실 같은 치트키를 썼어야 하는데. 내가 멍청했다.

설아: 자, 어디 보자. 흔적을 찾아야 해.

매력적인 소프라노 목소리에 흠칫.

나는 형사라도 된 것처럼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책상 서랍. 드르륵.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낡은 앨범 한 권이었다.

득템.

표지에 [우리 가족]이라고 예쁜 글씨로 적혀 있다.

앨범을 펼쳤다.

첫 페이지. 젊은 아빠(백 회장)와 우아하게 생긴 미인, 그리고 갓난아기 설아. 셋이서 아주 꿀이 떨어진다.

페이지를 넘겼다.

설아가 유치원생일 때까지는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부터…….

엄마가 사라졌다.

그리고 몇 장 뒤. 새로운 등장인물 출현.

아까 봤던 그 차가운 인상의 새엄마, 그리고 설아랑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또 다른 여자애.

호, 스토리 진행상 아마도 새엄마가 데려온 아이겠지. 짐작.

사진 구도가 묘하다.

새엄마랑 여자아이가 중앙을 차지하고, 아빠는 뒤에 근엄하게 서 있고, 설아는… 구석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이때부터 아빠는 표정이 없어지고 설아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진다.

웃고는 있는데 입만 웃는 억지 미소.

설아: 아하.

나는 앨범을 탁 덮었다.

견적 나왔다.

이거 완전 [주말 드라마 막장 테크]잖아.

친엄마는 돌아가셨거나 헤어졌고, 새엄마랑 데려온 동생이 들어왔고, 설아는 그 사이에서 쭈구리가 됐다.

이 완벽한 신데렐라 구도.

설아: 쯧쯧. 안 봐도 비디오네.

대충 파악은 했는데, 디테일이 부족하다.

설아가 평소에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말투는 어땠는지 알아야 흉내라도 낼 거 아닌가.

그때, 책장 구석에 숨겨진 듯 꽂혀 있는 두꺼운 노트가 보였다.

자물쇠가 달려 있다.

설아: 훗.

대박 아이템 획득.

이까짓 허접한 자물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래 뵈도 내가 왕년에 사물함 좀 따본 솜씨가 있지.

머리핀으로 구멍을 쑤시자 딸깍 하고 허무하게 열렸다.

[아이템 획득 : 설아의 비밀 일기장]

나는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최근 날짜부터 역주행 시작.

[X월 X일]

오늘 유리랑 옷 색깔이 겹쳤다. 새엄마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딱 한 마디 했다.

"갈아입어. 분위기 안 맞게 칙칙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내뱉는 그 말이 칼처럼 박혔다.

유리는 화사한데 나는 칙칙해서 미안하다고 비꼬았다.

그러자 엄마는 "꼬여 있구나, 너."라며 차갑게 돌아섰다.

거울을 봤다. 창백하고 마른 내가 서 있었다.

엄마 말대로다. 나는 칙칙하다.

저 완벽한 사람들 틈에 낀 오점 같다.

[X월 X일]

유리가 학교 친구들을 데려왔다.

방문을 벌컥 열더니 짜증 섞인 얼굴로 쏘아붙였다.

"야. 친구들 왔으니까 나오지 마. 귀신같은 꼴 해가지고 분위기 잡치지 말고."

내가 뭐라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잠시 후 거실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리자, 유리의 목소리가 180도 바뀌었다.

"언니는 몸이 안 좋아서 쉬나 봐요. 제가 나중에 죽이라도 챙겨줄까 봐요."

가증스러운 기집애.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나가서 따질 용기도 없다.

유리 말 틀린 거 하나 없으니까. 난 귀신같은 꼴이 맞으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X월 X일]

아빠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 아니, 나를 귀찮아하는 게 분명하다.

서재 앞에서 마주쳤는데,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서류만 넘기며 물으셨다.

"약은."

먹었다고 하니 "그래. 들어가라." 그게 끝이다.

유리 성적표를 볼 때는 그렇게 진지하게 상담해주시면서.

나는 그냥 이 집의 '살아있는 시체'일 뿐이다.

투명 인간 취급이 차라리 낫겠다. 아빠한테 나는 치워버리고 싶은 짐짝일 테니까.

설아: …….

일기장을 덮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막혀왔다.

설아: ……하아.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집구석이 콩가루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새엄마는 얼음장이고, 동생이란 건 싸가지가 바가지고, 아빠는 무관심의 끝판왕이다.

그런데 이 일기장의 주인, 설아는…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 화살을 전부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내가 아파서, 내가 칙칙해서, 내가 짐짝이라서.'

일기장 곳곳에 번져 쭈글쭈글해진 종이가, 이 아이가 밤마다 얼마나 자책하며 울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완전…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물론, 설아가 몸이 아파서 좀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피해망상 필터가 좀 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아까 병원에서 봤던 그 새엄마의 눈빛. 얼음장같이 차갑던 그 표정을 떠올리면…….

설아: 친엄마는 없고, 새엄마랑 데려온 동생은 구박하고, 아빠는 무관심하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이 불쌍한 기집애는 그동안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이, 이 넓은 방에서 혼자 삭히고 있었던 거다.

나는 거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울 속의 병약한 미소녀가 슬프게 웃는 것 같았다.

설아: 걱정 마라, 설아. 이 오빠가… 아니, 언니가 대신 살아주는 동안은 호구 짓 안 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내 인생 철학이거든.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진: 설아 학생, 식사 준비됐어요. 내려오세요.

미나 언니 목소리다. 타이밍 굿.

나는 일기장을 제자리에 넣고 일어섰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 내가 아직 교복 차림이다.

집에서 밥 먹는데 교복은 좀 아니지 않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나?

옷장을 열어보았다. 하늘하늘한 잠옷 원피스가 보인다.

저걸 입으려면… 지금 입은 교복을 벗어야 한다. 병원 화장실에서 치른 그 전쟁을 또 치러야 한다는 소리다.

설아: ……못 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밥만 먹고 씻을 건데 뭐.

설아: 그냥 가자. 교복이 뭐 어때서. 단정하고 좋네.

나는 자기 합리화를 시전하며, 교복 차림 그대로 방을 나섰다.

다이닝 룸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서늘했다.

축구장만 한 식탁.

상석에는 백도훈 회장이 신문을 보고 있고, 그 옆엔 새엄마와 백유리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백도훈: ……왔냐.

아버지는 짧게 한마디 하고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새엄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지수: 설아, 너.

설아: ……네?

한지수: 집에 왔으면 옷부터 갈아입고 씻어야지. 병원 균 묻은 교복을 입고 식탁에 앉니?

아. 역시 깐깐하다. 일기장 내용이 맞네. 숨 쉴 틈을 안 주네.

나는 찔려서 딴청을 피웠다.

설아: 아, 그게… 배가 너무 고파서요. 옷 갈아입을 힘도 없어서… 하하.

핑계가 좀 구리긴 했다.

새엄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빠도 의외란 표정으로 잠깐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앗! 말투가 너무 아저씨스러웠나? 제발 그냥 넘어가 줘요.

한지수: 게으른 건 여전하구나. 얼른 앉아라. 음식 식는다.

말투 보소. 얼음 송곳이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 줬으니 성공.

유리는 옆에서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유리: 언니, 교복이 그렇게 좋아? 하긴, 오랜만에 입어서 벗기 싫은가 봐?

저거 비꼬는 거지? '학교도 안 가는 주제에 교복은 무슨' 이런 뜻이지?

나는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세 번 새기며 자리에 앉았다.

곧 스테이크가 나왔다.

나는 전투적으로 칼을 들었다.

문제는 이 몸뚱이의 근력이다. 고기를 썰어야 하는데, 톱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거 같다. 이깟 고기 써는 데 무슨 근력까지 필요하겠냐.

사실은 내가… 이런 건 한 입거리여서 칼질에 약하다.

인간 김철수. 생전 칼질해서 음식을 먹어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은 잘만 썰어 먹고 있다.

끼익- 끽.

접시 긁는 소리가 식탁의 정적을 깼다.

아, 젠장. 가오 안 사네.

새엄마의 눈초리가 또 날아온다. '시끄럽게 구네'라고 말하는 눈빛이다.

서진 언니가 도와주러 다가오려는데, 맞은편에서 탁, 하고 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자기 접시의 고기를 슥슥 썰었다.

완벽한 한 입 크기.

그러고는 무심하게 내 접시와 툭 바꿔주었다.

백도훈: 먹어라.

설아: …….

뭐지?

새엄마와 유리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설아: 감사합니다…….

고기를 입에 넣었다.

와, 씨. 육즙 팡팡.

새엄마의 잔소리와 유리의 비웃음이 잠시 잊히는 맛이다.

역시 고기는 죄가 없다.

그렇게 숨 막히는 침묵 속의 식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백도훈: 몸은?

설아: ……의사 선생님이 기적이라고 하셨어요. 아주 튼튼하대요.

백도훈: 들었다. 원인 불명의 회복이라더군.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은 차갑다기보단… 뭔가 좀 복잡해 보였다.

백도훈: 다행이구나.

딱 한 마디.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도훈: 건강해졌으니, 다시 시작해야지.

설아: 네? 뭘요?

백도훈: 이번 주말까지 푹 쉬고. 다음 주부터 선생님 오시라고 해라. 놓친 학업 계속해야지.

……학업?

내 손에서 디저트 포크가 땡그랑 떨어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지금 이 양반이, 저승 문턱 밟고 온 딸한테 '공부' 소리를 하는 거야?

백도훈: 이제 고2 올라가잖아. 1학년 때 결석이 잦았으니 기초가 없을 거다. 겨울방학 동안 보충해서 진도 맞춰놔야지.

설아: 아니, 저기, 아버지? 제가 방금 퇴원했는데요……? 환자복 벗은 지 3시간 됐는데요?

하지만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몬스 침대 같았다.

백도훈: 의사가 정상이라더군. 머리도 멀쩡하다니 학생이 공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호박이다. 반박 불가.

이 집 가장의 말은 곧 법이다.

나는 멍하니 맞은편의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는 '꼴 좋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공부?'

솔직히 말해서, 쫄릴 거 하나 없다. 오히려 반갑지.

사람들이 나를 '근육 돼지 격투기 선수'로만 기억해서 그렇지, 사실 내 본캐는 [이과 영재]였다.

어릴 적 꿈이 과학자였을 정도로, 물리학 법칙에 가슴이 뛰고 복잡한 수식이 딱 떨어질 때 도파민이 터지는 뇌 구조란 말씀.

게다가 영어?

훗. 보육원 시절, 주말마다 봉사 오던 미국인 선교사 '마이클 형'이랑 혀 좀 굴려본 솜씨다.

덕분에 선수 시절 매니저 한 명 없이 해외 원정 경기를 나가서도, 통역 없이 심판이랑 룰 따지고 현지 맛집 찾아다니던 게 나다.

이른바 [실전 압축 영어] 만렙이라고.

그 시절엔 "고아가 공부 잘해서 뭐 하냐, 기술이나 배워라" 소리 듣느라 어쩔 수 없이 펜을 놓고 글러브를 꼈지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 잘됐다.'

이참에 못다 한 공부나 실컷 해보지 뭐.

재벌집 딸내미 몸이라 지원도 빵빵할 텐데,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나 보여주겠어.

'뭐, 1학년 수학 정도야. 껌이지.'

내가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는데, 유리가 얄미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유리: 잘됐다, 언니. 이번에 오시는 선생님, 대치동 1타 강사래. 엄청 빡세다던데?

유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확인 사살을 날렸다.

유리: 애들이 언니 얼굴 다 까먹었을 텐데, 공부라도 잘해서 존재감 보여줘야지? 내가 응원할게. 아주 많이.

'허, 저거 봐라?'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일기장에서 봤던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유리는 둘만 있을 땐 나를 '야'나 '너'라고 부른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있으면 세상 착한 동생인 척 '언니'라고 부른다. 가식적이다.]

설아가 일기장에 꾹꾹 눌러쓰며 억울해하던 그 대목.

역시나, 지금 부모님 앞이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언니' 타령이다.

방금 저 멘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감이네.

저 상큼한 미소. '공부 못해서 개망신당하는 꼴 기대할게'라는 선전포고로 들린다.

서른여섯, 김철수.

이제 막 퇴원해서 스테이크 좀 썰어보나 했더니.

집에는 눈칫밥 주는 새엄마와 여우 같은 동생이 있고.

다음 주부터는…… 대치동 1타 강사와의 데스매치가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

'저 그냥 다시 벼락 맞으면 안 될까요? 환불 안 됩니까?'

식탁 위로, 내 깊은 한숨이 스테이크 연기처럼 깔렸다.

김철수의 시련은, 이제 겨우 1라운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