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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핑 지니어스

지은이 외인 · 2026-09-05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

나는 책상에 엎드려서 [스킬 : 근육 회복(쪽잠)]을 시전하고 있었다.

새벽 운동의 여파가 이제야 온다.

그때 누군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민지: ……저기, 설아.

고개를 들어보니, 동그란 안경을 쓴 단발머리 여학생이 서 있었다.

손에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 한 권을 들고 쭈뼛거리고 있었다.

잽싸게 이름표를 스캔한다. 이민지.

뭐 그래봤자 기억에 없다. (당연하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선한 인상이다.

왜 그러니, 하는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이민지: 너 겨울방학 보충수업 안 나왔잖아. 그때 필기한 거… 전해주려고. 이번 시험에 나온대.

노트를 내민다.

받아보니 글씨가 인쇄한 것처럼 또박또박하다. 정성이 가득하다.

그리고 노트 귀퉁이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설아야 2학년 땐 아프지 마 화이팅]

설아: …….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이 삭막한 정글 같은 교실에, 이런 천연기념물이 숨어 있었다니.

아, 귀여운 것. 감동이다.

설아: 고맙다. 잘 볼게.

이민지: 어……? 아, 응.

민지는 내 시원시원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아: 왜 그래?

이민지: 아니… 원래 너였으면 그냥 고개만 끄덕였을 텐데. 목소리 들은 거 처음이라서.

민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이민지: 너… 좀 변한 것 같아. 예전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는데, 오늘은 뭔가… 단단해 보여.

빙고. 사람 보는 눈이 있네, 이 친구.

설아: 죽다 살아나니까, 멘탈이 좀 강해지더라고.

이민지: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민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직감했다.

이 녀석이 나의 [학교생활 1호 파티원]이 될 것임을.

그때였다.

3교시 시작 종이 울리고, 수학쌤이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졸림을 유발하는 나이 지긋한 쌤. 별명은 아마 '수면제'일 것 같다.

칠판에 가득 공식을 쓰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 하품을 참았다.

선생님: 자, 이 문제 나와서 풀어볼 사람?

쌤이 칠판을 두드렸다.

난이도가 꽤 있는 미적분 응용문제였다. 학기 초부터 분위기 잡는 건가.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눈을 피하느라 바빴다.

쌤이 출석부를 훑다가 번호를 호명했다.

선생님: 15번?

15번 남학생이 일어나서 당당하게 말했다.

남학생: 모르겠습니다!~

와아~

아이들이 웃는다.

흠, 요즘은 그냥 당당하게 '모릅니다' 이렇게 하는구나. 세상 참 좋아졌다.

선생님: 9번?

흠, 9번은 풀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본다.

아, 젠장. 내가 9번인가 보구나.

선생님: 9번이 설아구나. 설아야, 모르면 안 풀어도 된다.

쌤이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한동안 학교를 쉰 나를 위한 배려였으리라.

아이들 눈이 '당연하지' 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일어섰다.

쌤이 놀란 눈이다.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설아가 수학을? 쟤 하루 종일 자던 애잖아.'

'쌤 너무하시네. 환자한테.'

터벅터벅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분필을 집어 들었다.

문제를 쓱 훑어봤다.

음? 이거 그냥 공식만 대입하면 풀리는 거잖아? 물리 법칙이랑 비슷한데?

윤 선생이랑 겨울방학 내내 이것보다 독한 걸 풀었다.

[시스템 : '이과 아저씨'의 두뇌가 가동됩니다.]

또각. 또각. 또각.

분필이 칠판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망설임 없는 손놀림. 중간 과정 생략하고 핵심만 짚어내는 간결한 풀이.

마지막에 정답 딱.

= 0

나는 분필을 탁 내려놓고 툭 털었다.

설아: ……다 풀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글씨체가 전혀 내 글씨가 아니다. 아마도 설아의 글씨체일 것이다.

녀석, 글씨체도 얼굴만큼 예쁘네.

내 글씨에 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교실이 조용하다.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칠판과 나를 번갈아 봤다.

선생님: ……맞다. 맞아. 근데 설아야, 이 중간 과정은 어디 갔니?

설아: 머릿속에요.

…….

교실 뒤에서 누군가 "와, 미쳤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오후, 나에겐 별명이 하나 생겼다.

슬리핑 지니어스. 자다 일어나서 문제 푸는 애.

36세 아저씨, 이렇게 아주 조금씩 학교에서 인정받아 가는 거다.

* * *

오늘도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하품을 쩍 하고 있었다.

설아: 하아암…….

아직 민지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는 없다.

하루아침에 '학교 공인 왕따'에서 '핵인싸'가 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까.

게다가 속은 36세 아저씨인 내가, 띠동갑도 넘는 애기들 노는 판에 끼어서 "나도 끼워줘! 꺄르륵!" 하고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체력 비축), 먼 산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인생무상) 게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거나 피해 다녔다면, 지금은 뭐랄까… '신기한 생물' 보듯 관찰한달까.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뭐 나쁘지 않다. 적어도 대놓고 무시하진 않으니.

창밖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교실 안엔 아이들의 춘곤증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때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왔다.

선생님: 자, 종례하자. 오늘 청소 당번 어디니?

반장 영호가 수첩을 확인하며 벌떡 일어났다.

남학생: 3분단입니다.

담임의 시선이 3분단, 그리고 창가에 앉은 내게 머물렀다.

선생님: 3분단이면… 설아는 몸이 약하니 청소 면제고. 대신 다른 학생들이 조금 더 신경 써서 해라. 알겠지?

아이들이 화낼 만도 한 일인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열외 되는 게 당연스러운 일인가 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보슈, 선생 양반. 그건 옛날 백설아고. 지금 백설아는 댁보다 튼튼할걸?'

여기서 얌전히 빠지면 다시 '재수 없는 공주님' 이미지가 박힌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설아: 쌤. 저도 할게요.

선생님: 어? 아니, 설아 너는…….

설아: 저 튼튼해요. 빗자루질 정도는 시켜주셔야죠. 심심해 죽겠는데.

선생님: 그, 그래라. 그 대신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해.

나는 쌤의 만류를 무시하고 빗자루 하나를 꿰찰 수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설아가 빗자루를 잡다니, 고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보는 일일 것이다.

다른 분단 소속이던 유리는 '매정'하게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

흠, 어차피 차에서 기다릴 거면서.

쓱, 싹. 쓱, 싹.

나는 교실 뒤편부터 무념무상으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먼지 구덩이를 몰고 다니는 단순노동. 잡생각 없애는 데는 청소만 한 게 없다.

그렇게 한창 바닥과 씨름하고 있는데, 교실 앞쪽에서 쿵쿵거리는 소음과 함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1: 아, 뭐야. 이거 왜 안 움직여? 아씨, 짜증 나게!

나는 빗자루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여학생1: 야, 남자애들 다 어디 갔어? 축구하러 튀었어?

여학생2: 미친, 이 무거운 교탁을 우리보고 옮기라고?

여학생 셋이서 낡은 나무 교탁을 옮기려다 낑낑대고 있었다.

바퀴가 고장 났는지 꿈쩍도 안 한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도와주자. 빨리 끝내야 집에 가서 소고기 먹지.'

나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설아: 비켜 봐.

여학생2: 어? 설아야, 너 몸도 약한데…….

나는 대답 대신 교탁 모서리를 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낮추고, 하체에 힘을 딱 줬다.

데드리프트 자세.

흡!

드르륵~ 쾅!

혼자서는 꿈쩍도 안 하던 교탁이, 내 손에 들려 가볍게 옆으로 이동했다.

거의 들어서 옮긴 수준이었다.

설아: …….

…….

아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설아: 바퀴 고장 났네. 기름 좀 쳐야겠다.

쿨하게 돌아서는데, 뒤에서 아이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여학생1: 대박. 쟤 힘 뭐야?

여학생2: 와… 설아 쟤 좀 멋있지 않냐? 걸크러시 쩐다.

여학생1: 약한 척 내숭 아니었어?

그날 이후, 나는 우리 반 여자아이들에게 '무심한 츤데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무거운 걸 낑낑대며 들고 있으면 내가 쓱 가서 들어주고, 높은 곳에 있는 걸 못 꺼내면 쓱 꺼내주는 식이었다.

그리고 내가 점점 인싸가 되는 발단이 된 사건도 있었다.

이민지: 아… 이거 해설지 봐도 모르겠어.

내 짝꿍이자 1호 파티원 민지가 수학 문제집을 붙잡고 끙끙대면, 내가 부스스 일어나서 샤프를 뺏어 든다.

설아: 줘 봐. 이걸 숫자로만 보니까 어렵지. 이걸 야구공이라고 생각해 봐. 공을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잖아? 여기서 최고점이 어디야?

이민지: 어? 여기?

설아: 그래. 그게 미분값이 0이 되는 지점이야. 공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니까.

윤 선생 앞에서 써먹었던 '훅 궤적' 설명의 학교 버전이다. 여고생들한테 라이트 훅은 좀 그러니까 야구공으로.

내 설명은 교과서적이진 않다. 다분히 직관적이고, 실생활 예시(주로 야구나 격투기 원리)를 든다.

근데 그게 묘하게 아이들 귀에 쏙쏙 박히는 모양이었다.

이민지: ……헐. 대박. 이해됐어.

여학생2: 야, 나도 알려줘!

덕분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조공(간식)이 쌓였다.

초콜릿, 젤리, 소시지, 우유. 나는 사양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잘 먹는 내 모습에 아이들은 묘한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병약한 설아를 우리가 먹여 살린다'는 이상한 연대감 같은 거?

나는 어느새 2학년 3반의 '웃기는 놈'이자 '건드리면 안 되는(힘세고 똑똑한) 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평범한 여고생의 일상이, 전생의 칙칙한 체육관 생활보다 훨씬 컬러풀하고 마음에 들었다.

딱 한 사람. 백유리만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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