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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밥값

지은이 음악의 신 · 2026-08-31

새벽 산길을 내려가는 무현의 걸음은 나는 듯했다.

험한 비탈을 평지처럼 밟았고, 이슬 젖은 바위를 마른 땅처럼 디뎠다. 서두른 것은 봉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절반은 어젯밤 노인의 말 때문이었다. 골짜기 싸움에서 흩어진 패잔병들이 도적이 되어 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아래에서 마을을 터는 것은 강호의 살성들이 아니라, 한 달 전의 저와 같은 처지였던 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면 서둘러야 했다. 겁에 질린 칼은 일이 커지기 전에 눌러야 하는 법이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개울을 낀 초가 오륙십 채에, 한가운데 기와를 얹은 종갓집이 한 채. 그 종갓집 마당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불길이라 해도 집이 타는 것은 아니고, 마당에 지핀 화톳불이었다. 도적들이 밝힌 불. 그 불빛에 마을의 절반이 잠에서 깨어 문틈으로 숨죽여 내다보고 있었다.

도적들은 서른 남짓이었다.

가죽 조끼에 녹슨 칼, 창대 부러진 창, 낫과 도끼. 행색은 제각각인데 몸놀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훈련받은 자들의 흔적. 무현은 담장 뒤에서 그것을 알아보았다. 낙애곡에서 흩어진 패잔병들. 한 달 전이었다면 무현도 저 무리 중 하나가 되었을지 몰랐다.

마을 장정들은 종갓집 마당에 무릎 꿇려 있었고, 아녀자들의 울음소리가 담 너머까지 새어 나왔다. 곳간에서는 쌀가마가 실려 나오는 중이었다.

마루 앞에서는 백발의 종가 어른이 도적 두목과 맞서고 있었다.

"곡식은 가져가시오. 허나 사람은 건드리지 마시오."

"영감이 뭘 잘못 아는데."

두목이 낄낄 웃었다.

"곡식을 가져가고 말고를 정하는 것도 우리고, 사람을 건드리고 말고를 정하는 것도 우리야. 영감이 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두목의 발이 노인의 가슴을 밀어 찼다. 백발이 마루 아래로 굴렀고, 울음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무현은 잠시 고민했다.

'검이 없는데.'

허리는 빈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담장 밑에 부지깽이 하나가 굴러다녔다. 팔뚝만 한 길이에 끝이 까맣게 탄, 어느 집 부엌에서 튀어나왔을 물건이었다.

'이거면 되겠다.'

서른 해 무공의 결론이 부지깽이라는 것이 어딘가 우스웠지만,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았다. 검이 길이라던 현화진인의 말대로라면, 길은 부지깽이로도 걸을 수 있어야 했다.

무현은 부지깽이를 주워 들고 대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뭐냐, 넌.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냐."

문을 지키던 도적 둘이 앞을 막았다. 무현은 공손히 답했다.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

"예. 이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은 게 있어서, 밥값을 하러 왔습니다."

도적들이 마주 보고 낄낄 웃었다. 부지깽이 하나 든 새파란 젊은 놈이 싸움판에 끼어들어 밥값 소리를 하니 웃을 만도 했다.

"밥값은 무슨. 꺼져라. 오늘은 목숨값 받는 날이니."

"그러지들 마시고."

무현은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낙애곡에서 흘러온 분들 같은데. 살아남으신 것만도 용한 일 아닙니까. 그 목숨, 이런 데 쓰지 마십시오."

도적의 눈빛이 변했다. 낙애곡이라는 말에 찔린 것이다.

"이 자식이 뭘 안다고!"

칼이 날아왔다.

무현은 반 보 비켜서며 부지깽이로 도적의 손목을 톡 건드렸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이어 어깨를 톡. 도적이 픽 쓰러졌다.

'좋아. 이 정도면 조절이….'

두 번째 도적이 도끼를 치켜들기에 가볍게 밀었다.

두 번째 도적은 마당을 가로질러 날아가 볏짚단에 처박혔다.

'…조절이 안 됐다.'

무현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선계에서는 구름 짐승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도 모자랐다.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쓰는 것은 서른 해 만에 처음이었다. 다행히 볏짚단이 두꺼워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짚단 속에서 다리만 버둥거리는 꼴이, 미안하지만 조금 우스웠다.

'조절. 조절을 하자. 여긴 선계가 아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서른 쌍의 눈이 무현에게 쏠렸다. 무릎 꿇은 마을 사람들도, 쌀가마를 지던 도적들도,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두목까지도.

"뭐 하느냐! 쳐라!"

두목의 고함에 도적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다음 광경을, 마을 사람들은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된다. 다만 이야기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과객이 춤을 추더라 했고, 누구는 과객은 가만히 서 있는데 도적들이 저희끼리 자빠지더라 했고, 누구는 부지깽이에서 빛이 나더라 했다.

실상은 이랬다.

무현은 걸었다. 도적들 사이를, 저잣거리 걷듯 걸었다. 칼이 오면 반 보 비켰고, 비키면서 부지깽이로 손목이나 오금이나 뒷목을 톡톡 건드렸다. 위기선생의 판이 보였고, 패천노인이 가르친 무너지는 결이 보였다. 어디를 밀면 넘어지는지 뻔히 보이는 싸움은, 싸움이라기보다 뒷정리에 가까웠다.

도적들 쪽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야! 방금 누가 날 쳤어!"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저놈을 치려다가, 어, 어어?"

"왜 네가 자빠져! 정신 차려 이놈아!"

"뒤에! 뒤에 있다! 아니, 앞에! 아니, 어디 갔어!"

칼을 든 채로 헛손질을 하다 저희끼리 부딪히는 놈, 분명 눈앞에 있던 과객이 없어져서 두리번거리다 뒷목을 잡히는 놈, 무서워서 눈을 감고 휘두르다 동료의 엉덩이를 베는 놈까지 나왔다. 나중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미리 무릎 꿇고 두 손을 올리는 놈들이 생겼다. 그쪽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서른을 눕히는 데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이 걸렸다. 그마저도 힘 조절을 살피느라, 그리고 미리 항복하는 놈들을 가려 받느라 늦어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두목이 남았다.

두목은 과연 두목이라, 제법 검을 쓸 줄 알았다. 내공도 한 줌 있었다. 사파의 하급 무사쯤은 되어 보였다. 그가 이를 갈며 검을 겨눴다. 겨누면서도 눈은 쉴 새 없이 좌우를 살폈다. 도망칠 길을 재는 눈이었다. 부하 스물아홉이 밥 한 그릇 시간에 다 누운 판이니, 잴 만도 했다.

"네놈, 정체가 뭐냐."

"과객입니다."

"어느 문파냐고 묻잖느냐!"

"문파라기보다는… 문지기에 가깝습니다만."

"이놈이 끝까지!"

두목이 검기를 일으키며 쇄도했다. 제법 매서운 일격이었다. 한 달 전의 무현이었다면 눈도 못 떼고 목이 달아났을 빠르기였다.

무현은 왼발을 반 보 내디뎠다.

어깨 힘 빼고. 허리는 곧게.

그리고 부지깽이가 앞으로 뻗었다.

살아남기 위한 한 번의 동작.

서른 해 전, 화산의 공터에서 배운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 그 한 수가 두목의 검보다 먼저 가슴께 혈도에 닿았다.

툭.

두목은 제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굳더니, 장작 넘어가듯 옆으로 쓰러졌다.

무현은 부지깽이를 내리고 숨을 골랐다. 헐떡여서가 아니라, 버릇이었다. 찌르기 한 번이 끝나면 숨을 고른다. 공터에서부터의 버릇.

'형님. 보셨습니까. 그 동작 하나로, 이제는 제가 살고 남도 삽니다.'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윽고 누군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고, 울음이 터졌고, 그다음에는 마을이 통째로 시끄러워졌다.

뒷정리는 요란했다.

무현은 도적 서른을 새끼줄로 엮었다.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엮어 종갓집 마당에 앉혀 놓으니 장관이었다. 정신이 든 도적들은 도망칠 엄두도 못 냈다. 볏짚단에 박혔던 자가 무어라 속닥이자 다들 사색이 되어 고개만 조아렸다.

엮어 놓고 보니 낯빛들이 하나같이 누렜다. 도적질도 먹고 해야 하는데, 이놈들은 굶으면서 도적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현은 종가 어른에게 청해 주먹밥을 돌리게 했다. 도적들이 제가 털던 집 밥을 얻어먹으며 눈물 콧물을 쏟는, 사상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너희들."

무현이 새끼줄 앞을 천천히 걸으며 물었다.

"낙애곡에서 왔지."

우물우물 밥을 씹던 서른 개의 입이 일제히 멎었다.

"몇은 무림맹 쪽 잡졸이었을 테고, 몇은 사파 쪽 말단이었겠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다만."

"…대협도, 골짜기에 계셨습니까."

볏짚단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현은 답 대신 되물었다.

"살아 나와 보니, 어떻던가."

"…지옥이었습니다. 마을은 결딴나고, 품 팔 데는 없고, 관아에서는 패잔병이라고 잡아들인다 하고. 굶다 굶다, 칼이 손에 있으니…."

"그래."

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아서였다. 하늘이 자리를 달리 놓았다면, 이 새끼줄에 엮인 것이 저였을 수도 있었다.

"칼 잡는 법 배운 걸 원망해라. 그리고 이왕 배웠으니, 이제 지키는 데 써 봐라. 마을마다 도적 막을 장정이 모자란다더라. 너희만큼 도적 사정을 잘 아는 파수꾼도 없을 테지."

도적들은 멍하니 무현을 올려다보았다. 도적더러 도적을 막으라는 소리를, 진담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이다.

"대체 뉘시오?"

종가의 백발 어른이 물었다. 무현은 부지깽이를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함자라도."

"진무라 합니다."

"진 대협."

"대협은 아닙니다. 그냥 진가입니다."

어른은 무현의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한데 소협은 올해 대체 몇이시오. 내 눈에는 갓 약관이나 넘겼을까 싶은데, 그 나이에 대체 어디서 이런 무공을."

"보기보다 많습니다."

이 대답을 앞으로 몇 번이나 하게 될지, 이때의 무현은 짐작도 못 했다.

"진 대협.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은혜랄 것이 있습니까. 저 위 약초 어르신 댁에서 밥을 네 그릇 얻어먹었습니다. 그 밥이 이 마을 쌀이라 들었으니, 밥값을 한 것뿐입니다."

종가 어른은 밥값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어쨌든 잔치를 벌이겠다며 소매를 잡았다. 무현은 사양하다 사양하다, 국밥 한 그릇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례 흥정은 그보다 오래 걸렸다.

"백 냥을 받아 주시오."

"많습니다. 노잣돈으로 두 냥이면 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쉰 냥."

"두 냥."

"서른 냥!"

"두 냥. 그리고 짚신이 한 켤레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물에 불어서."

깎는 자와 올리는 자가 뒤바뀐 흥정은 결국 두 냥과 짚신 두 켤레, 주먹밥 한 꾸러미로 끝났다. 종가 어른은 지는 흥정을 하고도 어쩐지 진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

국밥을 먹는 동안 종가 어른이 마주 앉아 세상 이야기를 했다.

"골짜기 싸움 뒤로 관아도 손을 놓았소. 병졸 태반이 그 싸움에 끌려갔다 못 돌아왔으니. 도적이 들어도 봉화나 올리는 게 고작이고, 봉화를 올려도 오는 건 아침나절이 지나서요. 오늘 같은 날 진 대협이 아니 계셨으면…."

어른은 말끝을 흐리고 술잔을 비웠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백성들한테는 관아 방문보다 소문이 더 미덥소. 어느 고을에 의인이 났다더라, 어느 길목은 아무개 대협이 지나다녀 도적이 없다더라. 그런 소문 하나가 관졸 백 명 몫을 하는 세상이오."

무현은 국밥을 뜨며 그 말을 곱씹었다. 소문이 관졸 백 명 몫을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이 이 여정에서 얻은 가장 쓸모 있는 가르침이었다.

떠나는 길에 아이들이 따라붙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무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절벽 아래서."

"절벽 아래에 뭐가 있는데요?"

"폭포가 있지."

"폭포 아래에는요?"

"글쎄다. 나도 궁금하구나."

"에이, 거기서 왔다면서 그것도 몰라요?"

"떨어질 때 정신이 없어서."

"떨어져 봤어요? 진짜로?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그러니 너희는 절벽 근처에 가지 마라."

아이들은 시시하다는 얼굴로 흩어졌다. 대협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기껏 절벽 근처에 가지 말라는 어른 잔소리라니, 시시할 만도 했다. 잔소리는 원래 살아 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법인데, 아이들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마을의 밥상마다 같은 이야기가 올랐다. 절벽 아래서 온 과객이 부지깽이로 도적 서른을 눕히고, 사례로 짚신 두 켤레만 받아 갔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밥상을 건너고 우물가를 돌고 장터로 흘러갈 때마다 조금씩 자랐다.

무현은 그것을 모른 채, 약초꾼의 오두막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더 신세 졌다.

"기어이 내려갔다 왔구려."

노인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저녁상에 나물을 한 접시 더 올렸다.

"거 봉화까지 오른 판이었는데, 마을은 무사합디까."

"예. 도적들이 서로 치고받다 자빠지는 통에, 저는 구경만 하다 왔습니다."

"서로 치고받다 자빠져?"

"세상에는 가끔 그런 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노인은 무현을 한참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산에서 오래 산 사람은 캐물어야 할 것과 덮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았다.

이튿날 새벽, 무현은 길을 나섰다.

"어르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장작을 반년 치나 패 놓고 갔으면서."

노인은 손을 내젓다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화산 쪽으로 간다 했지."

"예."

"요즘 그 길이 뒤숭숭하다오. 골짜기 싸움 뒤로 사방에 패잔병이며 도적이며, 흉흉한 것들이 짐승처럼 돌아다니니. 부디 몸조심하시오."

"예. 조심하겠습니다."

무현은 깊이 허리를 숙이고 산길을 내려갔다.

노인의 걱정은 고마웠으나, 속으로는 조금 다른 셈을 하고 있었다. 흉흉한 것들이 돌아다니는 길이라. 그렇다면 가는 길에 밥값 할 일도, 종종 생기겠구나.

이때만 해도 무현은 몰랐다. 그 셈이 맞아떨어져도 너무 맞아떨어져서, 화산까지 엿새 길이 밥값 하느라 늘어질 대로 늘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밥값이 쌓이고 쌓이면 셈이 뒤집혀서, 나중에는 세상이 저에게 밥값을 치르겠다고 줄을 서게 되리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