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왜 나만 안 되는데

지은이 영우 · 2026-10-27

다음 날 오후, 이태원 클럽 홀.

영업 전, 차가운 홀 안에 직원 스무 명이 군기가 바짝 든 채 일렬로 서 있었다. 맨 앞줄 가운데에는 그 알바생이 사색이 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바 팀장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범이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그 앞을 천천히 오갔다. 어젯밤 VIP룸에서 잔을 내던지던 매서운 얼굴 그대로였다.

"내가 첫날 뭐라고 했어."

"매, 맥주 주지 말라고……."

"그리고."

"칵테일 안 되고, 술 섞어 주지 말라고……."

"근데 소맥을 따라? 소주에 맥주 섞은 걸?"

알바생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렸다. 범이가 턱짓을 했다.

"박아. 다들!"

스무 명이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범이의 눈이 마지막으로 홀 구석에 선 홍매에게 향했다.

"형도."

"……나?"

"신입 교육 누가 시켰어? 관리 안 한 사람 누구야?"

홍매는 어제 하루 종일 성수동 공장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신입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범이가 홍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아버지 앞에서도 그런 적 없던 범이가, 여화의 일에서만큼은 물러섬 없이 사장의 서슬 퍼런 권위를 세우는 순간이었다.

"……알았다."

홍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뒤통수를 한 번 문지르고는, 조용히 직원들 끝에 가서 머리를 박았다.

그날 이후 클럽 바 뒤편 벽에는 커다란 종이가 붙었다. [최여화(=사장님이 모시는 겁나 예쁜 큰누님). 맥주 X 칵테일 X 섞은 술 X. 어기면 사장이 직접 박게 함.] 그 밑에는 누군가 삐뚤빼뚤하게 덧붙여 놓았다. [홍매 형님도 박음.]

* * *

광고 시사는 일주일 뒤, 여의도 소속사 4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불이 꺼지고 커다란 스크린 위의 화면이 켜졌다. 낡은 인쇄 공장의 기계 사이를 서늘한 눈빛과 오만한 턱 끝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연무의 비주얼이 화면을 압도했다. 그리고 마지막 컷, 연무가 카메라 렌즈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아주 조금 웃어 보였다. 홍시 감독이 고집을 부려 살려 낸 그 마지막 컷에 회의실 안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화면 속 연무가 누구를 보고 웃었는지, 그 자리에서 아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시사가 끝나고 광고주 측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끝까지 여화 곁을 떠나지 않았다. 광고 대행사의 젊은 이사였다. 명함을 두 번이나 내밀었고, 샤아트의 다음 프로젝트 계약을 자기가 밀어주겠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대표님, 이런 얘기는 회의실보다 차 안에서 편하게 하시죠.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괜찮아요. 일행이 있어서요."

"에이, 잠깐이면 돼요. 한 바퀴만."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가 다짜고짜 여화의 가느다란 손목을 강압적으로 잡아끌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정문 앞에 남자의 외제 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여화는 끌려가는 척 걸음을 맞췄다. 손목을 꺾는 데는 0.5초면 충분했다. 구두 뒤꿈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도 생각해 봤다. 다만 박 대표 회사의 귀한 거래처였고, 샤아트의 소중한 첫 광고였다. 소란을 피우지 않고 차 앞에서 조용히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이거 놓으시죠. 실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중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조수석 문을 열고 여화의 등을 떠밀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차 문을 쾅 닫았다.

연무였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찰나였다. 연무가 남자의 손을 여화의 손목에서 신경질적으로 떼어 냈고, 남자가 당황해 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전에 연무의 단단한 오른 주먹이 남자의 안면을 사정없이 갈겼다. 딱 한 번이었다. 남자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 문에 기대 서서히 주저앉았다.

수많은 눈을 의심케 하는 탑스타의 폭행이었지만, 연무의 눈엔 오직 여화만 보였다.

"더러운 손을 어디다 대."

남자가 코를 감싸 쥔 채 뭐라 항의하려 하자, 연무가 여화의 벌겋게 자국 난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이 손목 보고 얘기해. 당신 차 블랙박스에도, 저 위 CCTV에도 다 찍혔어. 경찰서 가서 정신 차릴래?"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무가 여화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차가운 눈이었다.

"넌 이제 별의별 놈을 다 달고 오는구나."

연무는 그 말만 남긴 채 휙 돌아섰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되돌아가, 로비 구석의 비상계단 철문을 거칠게 밀고 뛰어 들어가 버렸다.

여화가 그 뒤를 따라 뛰었다.

* * *

철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계단을 몇 칸 내려가다 그대로 걸터앉아 버렸다.

세운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주체할 수 없이 거칠게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겨우 숨이 가라앉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라 눈가가 뜨거워졌다. 주먹을 날린 오른손등이 화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쪽 철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무야……."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여화의 낮고 따스한 목소리였다. 나를 찾아 계단을 내려오는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채 훔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단단히 얼어붙어 버렸다. 이윽고 여화가 걸음을 멈추고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코끝으로 그녀만의 은은한 체취가 느껴지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첫 만남의 기억이 내 심장을 또다시 간지럽혔다.

"연무야, 너 괜찮아……?"

피식.

어쩔 수가 없었다. 누나는 늘 이런 여자였다. 이 다정한 한마디에 삭히지 못한 분노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넌 괜찮아?"

"너라니. 너 진짜……."

"야, 이 바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나 아니었으면 넌 그 새끼 차에 있었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이나 해 봤어?"

내 거칠고 야속한 외침에 여화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서운한 눈빛을 캐치하고는 이내 숨을 가쁘게 고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녀석을 쳤는지 생각해 봤냐고. 넌 어쩜 그 긴 세월 널 지켜본 사람의 감정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어?"

아, 또 울컥 눈물이 나왔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눈물이 못나게 흐르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쓰잘머리 없는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런 질 나쁜 놈도 네가 좋다고 당당하게 손을 잡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왜 나만 안 되는데……?"

"연무야, 그……그게 무슨 말이야."

아, 이 지독한 둔팅이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저렇게 순수한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여화의 여린 어깨를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말로 해야 알아?! 한동안 내 머릿속에 너만 있어. 너만! 떠나질 않는다고! 너랑 말 한마디라도 하고 돌아가면 가슴이 따끔거리고, 열이 펄펄 나고…….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미치도록 좋아해. 그거 숨기느라! 사랑한다고 말을 못 해서 병이 난다고! 넌 나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무심한 척하는데, 내 맘은…… 그런 네가 좋대. 멍청하게. 이해가 돼?!"

결국 해 버렸다. 더 멋지게, 분위기 좋은 데서 하려고 했는데. 애처럼 화를 내며 터져 나와 버렸다. 아, 젠장. 눈물은 왜 자꾸 떨어지는 건데.

하지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손을 들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손끝으로 훔쳐 줄 뿐이었다.

"연무야, 그러지 마……."

그러면서 여화는 내 붉어진 볼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손길이 미치도록 따뜻했다. 나는 더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어코 여화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고 내 쪽으로 강하게 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그녀의 입술은 항상 상상했던 대로 촉촉하고 도톰하고, 막 피어난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나의 입술에 꼭 맞추어져 있던 자물쇠마냥, 우린 그렇게 빈틈없이 입술을 포개어 내렸다.

여화는 당황한 듯 가만히 있었다. 밀어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내 화가 가라앉기만 기다리던 사람이, 억울한 눈물과 날것 그대로의 진심 앞에서 숨을 멈추고 있었다. 단단하던 누나의 벽이 내 입술 아래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코끝에 머물던 누나의 체취가 훅 짙어졌다. 해 질 녘 모래처럼 뜨겁고 마른 냄새가 숨을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 버렸다. 이건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지독하게 달콤한 느낌이었다.

한동안 입술만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한 뒤, 나는 겨우 여화의 뒷머리를 감싼 손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연무야……."

여화는 또 너무나 부드럽고 나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높지 않은 음성이 내 애간장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당장이라도 다시 그 붉은 입술을 머금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아 내며 그녀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간절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알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요즘 너, 좀 수상했잖아."

"근데 왜……."

"넌 연예인이잖아."

여화가 잠깐 시선을 내렸다.

"넌 내가 연예인으로 보이기는 했어?"

"그렇게 안 보려고 노력은 했지. 그래서 일부러 더 동생처럼 대했던 거야. 괜히 내가 너 좀 아는 사람인 척 우쭐대기 싫어서. 그래야…… 그래야 너를 아주 오래 볼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난 네가 내 팬이 아니라서 좋아. 넌 그냥 날 강연무로만 봐 주잖아."

"넌 탑스타 강연무야."

"그건 밖에서, 화면 속에서나 그런 거지. 네 안에서 난 그냥 강연무야."

나는 손을 뻗어 여화의 눈가를 만졌다.

"날 이렇게 따사로운 눈으로 바라봐 주고."

이어서 촉촉한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매만지며.

"귀를 사로잡는 그 나른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는데. 너를 느끼고 싶고, 너만 생각하게 만드는데. 이 감정을 내가 더는 무슨 수로 무시해. 난 더 이상 못 숨겨, 이제…… 지금이라도 너와 사랑하고 싶어."

갈라진 내 목소리가 텅 빈 비상계단을 애절하게 울렸다.

"나 좀 받아 주면 안 돼?"

아, 씨. 또 눈물이 떨어지네. 사랑 구걸하는 철없는 동생으로만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던 그때였다.

여화가 다시 손으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기울여, 이번엔 먼저 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

나는 첫 입맞춤이 남긴 지독한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여화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으며 깊숙하게 밀고 들어갔다. 수없이 많은 키스신을 찍었지만, 단 한 명의 여자가 이토록 달콤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어쩜 이리 내 입술에 자석처럼 딱 들어맞는지, 온몸의 피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짧은 숨이 가빠 올 때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에 아쉽게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짝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 매혹적인 저 눈빛.

"이건 승낙의 뜻이지? 아니, 안 들을래. 말하지 마."

왜 나만 안 되는데 - 눈먼 탑스타는 여왕에게 구걸한다 | WEINO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