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반정(反正)을 성공하다.

지은이 지웅이네 · 2026-10-28

1,506년 병인년(丙寅年) 9월 초 이틀, 술시(戌時), 훈련원 앞에는 반정을 위한 정국계원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해가 서산에 반쯤 걸쳐있었다. 술정(戌正)이었다. 박원종과 성희안, 유순정과 구수영, 유자광, 강귀손, 신윤무와 홍경주, 박영문 등이 말을 타고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지웅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한쪽엔 구왈기야 이룸이 돌격대 50명을 끌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말들이 고삐에 매여 후드드 소리를 내거나 휘힝 거렸다. 내시 김계창은 궁에 남아 있었다. 내금위장 변준은 연산군과 함께 임진강에서 돌팔매 놀이를 감시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지웅은 신윤무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내삼청(內三廳)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는 같은 병조의 관할이었지만, 서로 결이 달랐다. 내금위장이었던 지웅은 군기시나 군자감 등 관리를 하는 무장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거들먹거리고 위세만 과시하는 소인배들이 양성되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윤무 또한 지웅을 거만하게 쳐다보았다. 특히 지웅의 옆에 있는 구왈기야 이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이는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선 듯 옆머리가 희끗했다. 말들이 원을 그리며 모이자 신윤무가 이룸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반정(反政)이라고 하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오랑캐 따위가 낀단 말입니까? 나 신윤무가 있는 이상 겁날 게 없소이다. 오랑캐는 빼 주시오.”

이룸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웅은 이룸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참으라는 표시였다. 박원종이 나서서 말했다.

“오랑캐가 아니라 내가 평안도 절도사로 있을 때 인연을 맺은 동지입니다. 나에게는 손님이고 국경을 맞대고 손을 잡은 조선의 친구이니 무례한 언동은 삼가주시오.”

박원종보다 신윤무가 나이는 10살 가량 더 많았지만 품계는 박원종이 훨씬 높았다. 종4품의 군자시 첨정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정2품 좌참찬이었다가 파직 된 박원종에게 예를 갖춰야 마땅했지만, 나이가 많고 반정의 동지이기에 최대한 예우해주는 박원종이었다. 그는 누이인 박씨 부인이 죽은 뒤로 노골적으로 피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연산군을 향해 인사 한 번 안했다하여 바로 좌참찬에서 파직되었다.

“그럴 수 없소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오랑캐와 칼을 섞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고집을 부리는 신윤무를 향해 지웅이 고함쳤다.

“칼을 들었다고 다 무관이 아니듯, 사람의 탈을 썼다하여 다 사람이 아니더이다. 중요한 거사를 앞두고 분란이 생기는 걸 원치 않으나 내 가족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목을 베고 가겠소이다.”

신윤무가 지웅의 얘기를 듣고는 칼을 빼어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칼이 번쩍거렸다. 호랑이 같은 기세였다. 신윤무는 그래도 무과에 급제했다는 자존감이 있어 무시당하고 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직 내금위장이라 아직도 목에 쇠심줄이 박혀있구나. 내가 야전에서 구르던 세월이 이십 년이다. 주상을 베기 전에 네 놈 먼저 베어야겠다.”

신윤무는 칼을 휘두르며 지웅에게로 말을 몰았다. 지웅은 말에 탄 채로 가볍게 공중으로 치솟았다. 신윤무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앞에서 지웅이 사라지자 신윤무가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지웅의 칼이 신윤무의 칼을 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곤 공중제비를 돌아 자신의 말 안장위에 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혀 땅을 밟지 않고 허공에서 날아다니며 신윤무의 칼을 쳐낸 지웅의 무공에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웅이 다시 소리쳤다. 말 위에서 신윤무를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반정군으로써 이해하는 건 여기까지요. 다시 내게 칼을 든다면 그땐 목이 날아갈 테니 그리 아시오.”

성희안이 급하게 나섰다.

“자자, 그만들 하시오. 거사도 치르기 전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웬 말입니까? 하지만 신윤무 영감의 말도 옳습니다. 우리가 거사를 치르고 실록에 남게 되면 정통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조선의 폭군을 폐하고 새 임금을 옹립하는 데 북방 야인들의 손으로 폐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게 되면 후일 감당하기 힘들 것이오. 아니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웅은 곰곰이 생각했다. 굳이 이룸의 손으로 간신들을 처리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웅이 믿을 수 있는 무관은 이룸밖에 없었다. 저 중에 이장(二丈) 이상 도약할 수 있는 무관은 지웅이 보기에 없었다. 성급하고 흥분을 참지 못하며 극단적인 성격의 무관들이 자칫 일을 그르칠까 두려웠다. 더욱이 간신들을 직접 처단하여 일등공신을 받고자 하는 저들의 얄팍한 수가 눈에 훤하여 도끼가 도끼를 낳기 위해 나무를 찍는 벌가(伐柯)의 법칙이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지웅은 이룸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성희안 대감의 말이 옳소. 간신들의 목을 치는 것은 다른 분들이 하시지요. 하지만 거사 직전에 원래의 계획을 트는 건 상당히 무모한 일이오.”

지웅이 분함을 표현하자 모두들 겁을 먹었다. 하지만 신윤무는 여전히 지웅을 노려보았다. 지웅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박원종이 나서서 정리했다. 실질적인 반정의 주동자였다.

“지금 서로가 예민한 상태이니 자중해 주면 고맙겠소. 우리가 반정을 하기위해 모였다고 하나, 서로 정치적으로 맞지 않아 어제까지도 싸웠던 우리요. 하지만 정쟁(政爭)도 제대로 된 나라에서 해야 의미가 있지요. 우리 모두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였으니 조그만 차이는 잠시 버립시다. 나와 유순정 대감, 홍경주 영감은 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신수근(愼守勤)을 처단하고 송현(松峴)으로 달려가 임사홍의 목을 칠 것이오. 신지웅 대감과 강귀손 대감, 성희안 대감, 신윤무 영감은 여기서 기다렸다가 반정군이 오면 궁에 들어가 두 숙용과 김자원을 처단하시오. 폭군 연산은 임진강에서 오는 대로 사로잡아야 합니다. 연산을 잡으면 옥새를 받고 자순대비에게 달려가 윤허를 받으면 끝나는 겁니다. 자 모두들 어깨에 하얀 천을 달아 아군끼리의 표식을 만듭시다.”

박원종이 말을 끝내고 하얀 천을 오른쪽 어깨에 달았다. 모두들 따라서 하얀 천을 달았다. 그때였다. 어두워진 사위로 저 멀리 불빛들이 보였다. 엄청난 인파(人波)가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말을 탄 윤혜명과 서만복이 보였다. 일 년 동안 열심히 훈련을 해온 반정군들이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춰 행군하고 있었다. 주위로 반정군에 합세하여 따라붙은 백성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환호와 함성을 지르며 괭과리를 치고 곡괭이와 낫 등을 들고서 횃불을 앞세워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 어깨에 하얀 천을 달고 오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감히 반정군에 맞설 사람이 없었다. 거사가 이미 반은 성공이었다. 그때였다. ‘급보요!’하는 소리와 함께 군사 한 명이 빠른 속도로 말을 타고 달려와 박원종 앞에 내려 부복하고는 말하였다.

“급보입니다. 척후병에 의하면 주상께서 궁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오나, 가다가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정국계 일행은 모두 서로를 쳐다보며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당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지웅이 앞으로 나가 말했다.

“지금 어디쯤이라고 하던가? 말을 타고 갔을 테니 지친 말을 갈아타고 와야 할 것이다. 오는 도중에 역참(驛站)이 여섯이니라.”

“신원(新院) 역참이라고 하더이다.”

신원 역참이면 여기까지 오는 데 최소한 한 시진은 걸릴 것이었다. 석전(石戰)이라면 밥 먹다가도 뛰쳐나갈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구경도 취소하고 발길을 돌렸다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고 보아야 했다.

“당황할 필요 없소이다. 어차피 우리가 먼저 선수 치면 되는 것이오. 반정군도 당도했으니 먼저 임사홍과 신수근을 치고 오겠소. 여러분은 궁궐 앞에 가서 궁문을 여시오. 수문장이 마음을 바꾸었다면 어쩔 수 없이 칼을 들어야 할 것이오.”

오백 여명의 반정군이 훈련원 연무장에 들어왔다. 횃불과 창 칼을 든 수많은 사람이 모이자 그 넓던 연무장도 좁아 보였다. 지웅은 서만복한테서 별 일 없이 무사히 당도했음을 알리는 군례(軍禮)를 받았다. 장수들의 말들이 바닥을 긁으며 콧김을 내뿜었다. 말의 입에는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재갈 외에도 천을 덧대어 '함매(銜枚, 입에 나무막대를 물림)'를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웅은 말들의 함매를 풀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사 오십 명을 박원종에게 주었다. 박원종은 지웅을 보고 ‘부탁한다‘는 말을 던지고는 두 사람과 함께 말을 몰고 사라졌다. 오십 명이 뒤따랐다. 주위가 캄캄했지만 말발굽에 의한 먼지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 지웅은 생각했다. 만에 하나 임사홍과 신수근을 처단하지 못한다 해도 궁을 차지하고 연산군을 잡으면 거사는 성공하는 것이었다. 웅성거리는 반정군과 모인 백성들을 보며 성희안 대감이 말했다.

“자, 들으시오. 나 성희안이 한마디 하겠소이다. 하늘이 이미 연산을 버렸소이다. 민심이 이미 그를 등졌소이다. 여기에 모신 만백성이 그걸 증명하고 있음이오. 지금 임금이라는 자가 무얼 하고 있소이까? 나라의 기틀인 선비들이 목이 베이고, 아녀자들은 궁궐의 노리개가 되었으며, 김자원 같은 내시 놈이 정승 노릇을 하며 나라의 곳간을 도둑질하고 있소이다. 우리가 정사를 바로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것이니 우리 모두 궁으로 갑시다. 가서 폭군 연산을 끌어 내리고 진성대군을 옹립합시다. 자 모두 나를 따르시오.”

성희안이 칼을 높이 들어 외치자 반정군과 백성들이 횃불과 창 칼을 높이 들고 일제히 외쳤다.

“연산을 폐하라! 대군을 옹립하라!”

마침 인정(人定)이 울렸다. 정국계 일행들과 반정군, 함께 온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창경궁을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횃불로 인해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다. 지웅은 이룸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에페, 연산군이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연산군의 기마친위대를 막아 주십시오. 임금을 호위하는 자들이니 필시 연산을 보호하려고 칼을 들 것입니다. 허나, 명심하세요. 절대로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제압하되 연산군만 잡으십시오. 궁을 접수하고 뒤따라 가겠습니다.”

반 시진도 안 되어 궁 앞에 도착했다. 오백 여명의 반정군이 창경궁과 창덕궁을 포위했다. 반정군의 기세에 놀란 궁궐수비대가 창을 집어 던졌다. 몇 명이 주저했지만 성희안이 ‘자순대비의 명으로 왔다‘고 하자 나머지도 창을 내려놓았다. 수문장들은 미리 포섭해 놓았겠지만 어느 누구 하나 반항하는 이 없이 궁문을 열어젖혔다. 무혈입성으로 개선장군들처럼 반정군이 궁 안으로 들어섰다. 내시 김자원이 도망을 가려고 나왔다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반정군에 들켜 ‘김자원이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이내 머리가 잡힌 채 문정전 뜰 앞에 끌려 나왔다. 가슴엔 붉은 색 보자기로 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평소 성희안을 우습게 여기던 김자원은 서슬 퍼런 반정군의 기세에 눌려 사지를 벌벌 떨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더 잘 알기에 다가오는 성희안을 보는 그의 눈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보시오. 부사용副司勇), 아 아니 대감. 살려주시오. 목 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러나 성희안은 쉽게 그를 죽이지 못했다. 벌벌 떠는 김자원을 보고 외쳤다.

“이 흉악무도한 간신을 포박해라!”

신윤무가 달려가 김자원의 옷을 벗기고 보따리를 빼앗고는 포박했다. 관모가 벗겨지면서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보따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신윤무의 발길질이 김자원의 가슴팍에 꽂히면서 나뒹굴었다. ‘아이쿠야!’ 그리 세게 맞지도 않았으나 그의 비명은 궁궐 전체를 흔들었다.

“안으로 들어가 장녹수를 잡아라!”

지웅은 문정전에 들어갔다. 마지막임을 알았는지 장녹수와 전비는 아무 저항없이 순순히 오라를 받았다. 함성 소리를 듣고 살 희망을 버렸다는 듯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었다. 성희안이 말했다.

“나라를 병들게 만든 원흉이다. 이 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날이 밝으면 군기시 앞에서 백성들에게 석척살(擲石殺)을 하게 하라.”

돌에 맞아 죽게 할 심산이었다. 하긴 그래야 백성들의 분이 풀릴 것이었다. 화가 난 백성들이 두 숙용의 머리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반정군이 궁에서 활보하자 내관들과 궁녀들이 모두 처음엔 놀라는 기색을 보이다가 나중엔 연산군을 폐위하고자 함을 깨닫고서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궁궐 안팎의 눈과 귀가 되어주던 내관과 궁녀들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다녔다. 이미 거사의 성공이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도 전해졌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연산군이었고 그가 가진 옥새(玉璽)였다. 지웅은 성희안 대감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궁궐을 나와 말을 몰고 신원 역참 방향으로 달렸다. 경복궁(景福宮)을 지나 돈의문(敦義門)에 진입한 후 무악재(毋岳岾)를 넘어 홍제원(弘濟院)에 다다르자 지웅의 눈에 익숙한 어마(御馬)가 보였다. 사복시에서 가장 혈통이 좋고 기품 있는 말을 골라 안장 아래에는 보라색의 귀한 비단 자피(紫皮)를 덧대어 말의 몸등을 덮었고, 그 위에 얹어진 안장(鞍裝)은 금이나 은 등으로 정교하게 입사(入絲) 처리를 하고 매 가죽으로 감싸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화려함을 더했다. 말의 이마엔 왕을 상징하는 용문양이나 봉황문양이 새겨지고 옥(玉)으로 장식 된 굴레와 재갈을 매듭하여 말의 가슴과 엉덩이 부분에는 금방울을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나게 했으며, 붉은색 털로 만든 홍모(紅毛) 술을 길게 늘어뜨려 역동성을 강조했다. 고삐는 튼튼하면서도 부드러운 최고급 가죽에 비단실을 꼬아 만들어 멀리서 보아도 화려한 하얀색 백마(白馬)였다. 연산군의 기마 친위대와 구왈기야 이룸의 오십 기병이 대치하고 서 있었다. 연산군 옆엔 내금위장 변준(邊濬)이 칼을 들고 서서 구왈기야 이룸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웅이 탄 말이 다가서자 변준이 경계를 풀었다. 지웅의 손짓에 구왈기야 이룸이 칼을 내렸다. 어마(御馬)에 탄 연산군이 두려워 하는 얼굴로 변준 옆에 서 있다가 눈을 찡그려 지웅을 알아보고는 반색하며 말했다. 지나친 음주로 간이 상했는지 눈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얼굴도 수척해져 있었다.

“무극(武極)이 아닌가? 오랜만일세. 나를 구하러 왔구나. 그래. 짐 에겐 무극이 있었지. 하하.”

지웅이 딱한 표정으로 연산군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이 재차 말을 이었다.

“이보게 무극, 뭐 하는가. 저 흉측한 역모의 무리들을 당장 죽이게. 감히 짐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지웅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저 무도한 폭군의 목을 베고 싶었다. 해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저 간악무도한 임금이라는 자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수많은 여인들을 농락하여 수치심에 자결하고 결국 패가망신하여 사라진 자들이 몇이던가. 저런 자를 임금이라고 보필하고 목숨 지키려 밤을 새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웅은 연산군을 쳐다보며 칼을 천천히 빼들었다. 임금 앞에서 칼을 빼 드는 건 역모나 다름없었다. 연산군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입이 벌어졌다. 지웅이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주상. 다 끝났소, 이미 주상을 잡기 위해 반정군이 몰려와서 궁을 접수했소. 투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오.”

천것들에게나 하는 말과 행동을 지웅이 연산군에게하자 연산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감히 임금에게 오라를 받으라니, 미친 게 아니더냐. 내금위장은 뭐 하느냐? 저 역도들을 잡아서 사지를 찢어라. 다 죽이란 말이다.”

영문을 모르는 금군들은 창을 든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예전의 내금위장인 지웅을 알아보았기에 더더욱 아무 것도 못하고 망설일 뿐이었다. 보통 자객이 길을 막았다면 내금위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내금위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금군들은 그제야 반정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연산군이 이번엔 내금위장 변준을 바라보며 고함을 쳤다.

“저놈들을 당장 죽여라. 내금위장. 저놈들을 죽이면 짐이 금은보화를 약조하마. 너희들은 뭣하고 섰느냐? 빨리 저놈들을 공격하지 않고,,,”

연산군이 변준과 금군들을 보며 악을 썼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야 연산군은 자신의 칼을 빼들었다. 이제 모두가 한통속이란 걸 인지한 표정이었다. 칼을 지웅에게 향했다가 이룸에게 향했다가 변준에게 향했다. 하지만 섣불리 칼을 휘두르진 않았다. 두 눈엔 핏발이 선 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어젯밤 꿈에 죽은 내 어미가 나오더니 내 이럴 날이 올 줄 알았다.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연산군은 칼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연산의 웃음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날아갔다.

창경궁 앞에 정국계원들이 모여 서 있었고 반정군이 횃불을 든 채 겹겹이 포위하여 이미 궁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수많은 백성들도 나와 손에 낫과 쇠스랑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연산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산군은 어마(御馬)에 타지 않고 손이 결박된 채 말 뒤에 줄로 묶여 걸어오고 있었다. 사냥 나가는 옷차림인 남색의 융복(戎服) 차림으로 어립(御笠)은 벗겨진 채 끌려오는 모습이 기괴스러웠다. 백성들이 쳐다보며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백성도 있었다. 연산군은 고개를 숙인 채 무심한 표정으로 힘없이 걷고 있었다. 누구 하나 울부짖거나 불의하다며 반항하는 이가 없었다. 홍화문(弘化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원종과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의 주도자들이 연산군을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박원종이 누군가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오라를 풀어라.”

신윤무가 달려가 오라를 풀자 팔과 어깨를 주무르던 연산군이 무심한 표정으로 박원종을 향해 말했다.

“내 죄가 이미 크다. 이럴 날이 올 줄 알았으니 맘대로 하거라.”

“들어가 옥새(玉璽)를 갖고 나오시오.”

성희안이 말하자 연산군이 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윤무와 내시 김계창이 따라 들어갔다. 유순정과 강귀손은 자순대비와 진성대군이 머물고있는 경춘전(景春殿)으로 바삐 향했다. 잠시 후에 황금 보자기를 들고 김계창이 나타났다. 그 뒤에 연산군이 힘없이 서 있었다. 박원종이 보자기를 풀어 헤치자 어보함(御寶函)이 나타났다. 함을 들은 박원종은 생각보다 무거워 깜짝 놀랐다. 환도 세 자루 정도 되는 무게였다.

‘이게 조선의 무게란 말인가’

조선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새는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과 상징성이 결집된 예술품이었다. 인뉴(印鈕, 손잡이)는 장수와 굳건함을 상징하는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거북이 모양(귀뉴)이었다. 거북이는 인판(印板, 몸체) 위에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사방 4치(寸)의 크기에 1치 2푼(1寸 2分)의 두께이며 무게는 4근(斤) 10량(兩)에서 많게는 6근에 달했다. 바닥면에는 붉은 인절미(인주)를 묻혀 찍는 인문(印文, 글자)이 새겨져 있었고,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짙은 황금색이지만, 은에 금도금을 하여 제작했다. 거북이 등껍질에는 육각형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거북이의 입은 임금의 표정이 그래야 한다는 듯 굳게 다물고 눈은 정면을 응시하는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손잡이인 거북이 몸통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그 사이로 붉은색 혹은 보라색 비단 인끈(綬)을 길게 늘뜨려 장식했고, 이 끈을 잡고 도장을 찍거나 보관함에서 꺼냈다. ‘어보함(御寶函)’은 내함과 외함의 구조로 되어 있어 먼저 옥새를 비단 주머니에 넣고, 이를 보록(寶盝)이라 불리는 작은 나무 함에 넣은 뒤 그 함을 다시 더 큰 시궤(匙櫃)라는 바깥 함에 넣는 이중 구조였다. 함 겉면은 붉은 칠(주칠)이 되어 있고, 모서리는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함 뚜껑에는 봉황 무양의 금속 장식이 붙어 있어, 멀리서 봐도 그것이 국새임을 알 수 있었다. 유순정이 다가와 자순대비와 진성대군의 윤허가 있었음을 알렸다.

옥새를 손에 들고 높이 든 채 박원종이 반정군을 향해 외쳤다.

“만백성의 이름으로 고하노라. 고금에 이런 무도부덕(無道不德)한 임금은 없었다. 민심의 이반이 극에 달하여 많은 충신들이 들고 일어섰으니 오늘 우리는 그 끝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노라.

오늘, 우리 반정군은 이름뿐인 왕, 이 융(李㦕)을 폐하고 조선의 사직을 바로 세우고자 한다. 대저 왕이란 천명을 받아 백성을 기르고 사직을 보존하는 자리거늘, 저기 서있는 자는 과연 지난 12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첫째, 저 자는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다! 궁궐을 짐승의 우리로 만들고, 어머니뻘 되는 후궁들을 제 손으로 때려죽였으며, 스승과 충신들의 입을 막고 그 시신을 파내어 다시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지가 진동하고 조상들이 통곡할 일이다!

둘째, 저 자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의 쾌락을 채운 도적이다! 사방 백 리의 민가를 허물어 사냥터를 만들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피 흘리는 것을 유희로 삼았다. 백성의 눈물은 강을 이루는데, 저 자는 흥청(興靑)들과 어우러져 비단옷을 휘감고 술 향기에 취해 살았다!

셋째, 저 자는 조선의 근간인 도(道)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간신 임사홍과 내시 김자원을 앞세워 조정을 더럽혔고, 바른말 하는 자는 혓바닥을 자르고 목을 쳤다. 이제 조선에 남은 것은 왕의 광기뿐이요, 사라진 것은 백성의 희망뿐이다!

보라! 여기 내가 들고 있는 옥새는 이제 더 이상 군주의 권위가 아니다. 저것은 백성을 찍어 누르던 무거운 형틀일 뿐이다!

하늘이 이미 저 자를 버렸고, 민심 또한 저 자를 떠났다. 이에 우리 반정군은 자순대비 전하의 명을 받들어, 폭군을 폐하고 인덕을 갖춘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썩어 문드러진 이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을 만천하에 고하노라!

죄인 이 융은 들어라! 너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백성의 심판을 받으라!"

성희안의 연설이 끝나자, 마당을 메운 반정군과 백성들이 일제히 창끝을 세우며 화답했다.

"폭군을 폐하라! 만세를 외쳐라! 반정군 만세! 진성대군 만세!"

반정군과 백성들의 환호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드디어 연산군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만세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새 파루(罷漏)가 울릴 시각이었다. 지웅은 반정군을 통솔하여 의금부 군졸들이 연산군을 묶어 의금부에 가두는 걸 확인했다. 곡괭이와 낫을 놓은 백성들은 파루가 울릴 늦은 시간임에도 모두들 밖으로 나와 횃불을 들고 괭과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반정을 주도하여 성공한 정국계원들은 문정전에 모여 가벼운 회합을 가졌다. 연산에 의해 망가진 조정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굳이 회합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얘기해 왔던 연산의 실정을 그대로 복원하면 되는 것이었다. 우선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휘둘렀던 김자원과 두 숙용을 처형하는 것과 임사홍과 신수근의 가산을 몰수하고 7촌 이내의 사내들은 모두 죽이고 여인들은 노비로 삼을 것과 무오년과 갑자년에 억울하게 죽거나 쫒겨난 선비들을 사면하고 그들의 관직을 회복시키는 복권(復權) 작업과 이미 죽은 이들에게는 추증(追贈)을 통해 명예를 살려주는 것을 둘째로 삼았다. 셋째는 반정에 참여한 박원종을 비롯한 100여 명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새로운 조정을 만드는 것으로 삼고 넷째는 흥청 및 운평을 해산하고 궁궐에 있던 여인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 신언패( 愼言牌)를 벗어 던지고 사헌부와 사간원 등 삼사의 기능을 다시 부활시켜 왕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할 것, 다섯 째는 사냥을 위해 민가를 헐고 백성을 쫒아냈던 금표를 철폐하고 그 땅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어 농사를 다시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기생들의 연회장이나 마구간으로 썼던 성균관과 원각사를 복구하여 정비하는 것, 연산군의 기분에 따라 집행되던 초법적인 형벌들을 금지하고 경국대전을 다시 기본 법령으로 할 것, 경연을 재개할 것, 연산군이 사치를 위해 늘렸던 과도한 공물과 세금을 대폭 줄일 것, 궁궐 증축이나 사냥터 정비에 강제 동원되었던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생업에 종사하도록 할 것 등을 논의했다. 회합이 끝나자 저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지웅은 밖으로 나와 의금부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을 만나고 떠날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