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적삼(赤衫)
지은이 지웅이네 · 2026-10-28
1,504년 갑자년(甲子年) 삼월 초여드레 늦은 밤,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앞뜰에는 횃불 수십 개가 이글거렸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밤공기였지만 이곳의 분위기만큼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이제 스물일곱이 된 젊은 임금인 연산군(燕山君) 이융(李漋)의 분노한 얼굴이 횃불 그림자에 일렁이며 야차처럼 변해갔다. 그 앞엔 정2품 병조판서이자 도승지인 임사홍(任士洪)이 61세 노구(老軀)의 몸으로 박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연산군이 침을 튀겼다.
“도승지의 말이 사실이오? 방금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말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소신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나이까? 주상 전하의 친모이신 왕비 마마께서는 생전에 한명회, 정창손 등의 탄핵으로 폐비 되어 결국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증좌(證左)가 있사옵니다. 전하.”
연산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설마 하는 의심이 들더니,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가 하며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건의 실체를 들으면서 가슴 속 저 어딘가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와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참에 그토록 생모의 복권(福券)과 추승(雛僧)을 반대하던 사림파와 훈구파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차분해지고 냉정해진 연산군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명했다.
“그 증좌를 가져오시오. 지금 당장”
연산군은 곤룡포(袞龍袍) 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어깨에 걸쳤던 융복(戎服)이 떨어지자 상선내시(尙膳內侍) 김자원(金子猿)은 몸을 던져 융복을 받았다. 부복한 채 고개 숙인 유자광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희끗한 수염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2품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처선(金處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종대왕 때부터 지금의 주상에 이르기까지 일곱 명의 임금을 모신 김처선이었다. 80세가 넘은 고령이었지만 푸른 안광이 빛났다. 궁궐 안의 공기만 맡아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선한 김처선이었다. 또다시 궁궐에 피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예감에 김처선은 몸을 떨었다.
이미 6년 전 무오년(戊午年), 사림파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가 있었고, 이를 기회로 젊은 연산군을 발광하게 만든 유자광과 임사홍이었다. 김일손은 물론 이에 관련된 많은 사림파들이 잡혀 와 국문 당하였고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이목, 허반(許盤), 강겸(姜謙), 홍한(洪澣), 정여창, 정승조, 김굉필,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姜伯珍), 이계맹(李繼孟), 남곤 등 수많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에 관련되었다 하여 유배형에 처 해졌고, 이 사건으로 인해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는 몰락하였으며 임금에게 직간(直諫)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이 사라졌다. 사림 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유자광, 임사홍 등 또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간밤에 서쪽에서 붉은 불이 치솟고 흉성(凶星)이 북두성(北斗星)을 침범하더니,,, 정녕 이 기운을 돌이킬 수는 없단 말인가’
김처선은 탄식하다시피 독백을 내뱉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저 상선내시 김자원(金子猿)이었다. 김자원이 폐비 윤씨의 일을 주상에게 알렸고, 그 사실을 임사홍이 확인시켜 준 것뿐이었다. 잠시 하늘을 쳐다본 김처선은 눈을 뜨고 발길을 돌렸다.
한성부 외곽, 유자광의 별채에 허름한 차림의 노부인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섰다. 바람이 차고 달빛마저 희미한 밤이었다. 정1품 좌찬성(左贊成) 무령부원군 유자광(柳子光)이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맞은편에는 사가(私家)에 은거하며 20년의 세월을 비통함 속에서 보낸 폐비 윤 씨의 어머니, 신 씨(申氏)가 잔뜩 겁에 질린 채 꿇어앉아 있었다. 유자광이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부드러웠지만 날카로운 비수(匕首)를 감추고 있었다.
"노 부인. 야심한 밤에 노신이 부인을 은밀히 부른 까닭을 짐작하시겠소이까?“
신 씨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으나, 눈빛은 이미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인은 그저 죄인(罪人)의 어미일 뿐이옵니다. 대감께서는 필시 세자 시절의 주상(主上)께서 폐비가 된 마마의 일을 알고 계신지, 소인의 일가에 자칫 불충한 의도는 없을지 염려하시어 부르셨을 줄로 아옵니다.“
유자광은 헛기침을 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부인의 염려는 지극히 당연하오. 허나 지금 이 나라는, 아니, 주상 전하의 마음속은, 부인이 아시는 것보다 더욱 위태로우며 또 진실에 대한 열망이 끓어 넘치고 있소이다.“
"위태롭다니요...?"
신 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폐비 마마의 사사(賜死)는 공신(功臣)들이 전후를 감추고 좌우를 덮은 선대왕의 가장 깊은 어둠이었소. 허나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지존(至尊)의 권좌에 앉아 계시니, 생모(生母)의 그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원한을 풀어야 되지 않겠소?”
유자광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소신이 알기로는, 마마께서 사약을 받으신 그날, 피를 토하시며 적삼(赤衫) 한 벌을 부인께 남기셨다고 들었소. 이것이 소신이 부인을 뵙고자 한 궁극의 이유이외다.“
신 씨는 숨을 멈추었다. 평생을 숨겨왔던 딸의 죽음에 대한 회한이 주름으로 갈라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게 했다.
"대감... 어찌 그 깊은 사연까지 아시는 지...“
"소신은 이 나라의 충신으로서, 감히 한 시대를 이념으로 나누고 왕실을 능멸했던 공신들의 교만(驕慢)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소이다. 지금 주상 전하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응어리와 분노가 가득하나, 이를 풀 명분과 증거가 없소. 전하께 어머니의 피 묻은 적삼을 바치는 일이야말로, 전하의 억울함과 분노를 하늘로 터뜨려 지존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오.“
유자광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라 왕권 강화라는 대의(大義)를 위한 것임을 역설했다. 하지만 신 씨의 마음은 이런 명분조차 필요가 없었다.
"부인께서 지금 그 적삼을 전하께 올리시면, 마마의 원혼은 풀릴 것이요. 전하께서는 마마의 한(恨)을 풀어드린 효심 깊은 성군으로 만백성에게 추앙받으실 것이오. 허나, 만약 부인께서 끝까지 그 유물을 숨기신다면... 그 침묵은 오히려 역적 공신들의 죄를 덮어주는 방패가 될 것이오. 부인, 용단(勇斷)이 필요합니다.“
신 씨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녀는 딸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다. 이제야말로 왕위에 오른 손자(연산군)의 안위와 딸의 명예를 동시에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에 고통스러운 결단이 어렸다.
"대감... 알겠사옵니다. 소인은 마마의 마지막 유언대로 따르겠나이다. 그 적삼... 소인이 직접 주상의 옥체(玉體) 앞에 바치겠으니, 대감께서는 부디 죽은 마마의 원통함을 잊지 마시옵소서.“
유자광은 그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 씨가 조용히 일어나 절을 하고 사라졌다.
사림파에 이어서 훈구 대신들의 몰락을 계획하는 유자광의 마음속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는 그 무엇이든 제거하여 임금보다 더 높은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목표만이 있었다. 그동안 서얼(庶孼) 출신이라며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특히 사림의 거두 김종직은 쌍놈이라며 대놓고 유자광을 무시했었다.
유자광은 선대왕 시절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대관림(臺官林)과 소고대(小姑臺)의 경치에 반해 학사루(學士樓)에 내려와 시를 지어 현판(懸板) 하게 했다.
亭臺無數碧山空(정대무수벽산공) - 수많은 정자 누대 푸른 산은 비었는데,
太守能詩復是公(태수능시복시공) - 능히 시를 짓는 태수(太守)는 다시 이 공(公)이네.
坐上自能呼月出(좌상자능호월출) - 자리에 앉아 저절로 달을 불러낼 수 있고,
眼前誰許借風同(안전수허차풍동) - 눈앞에는 누가 허락하여 바람을 빌려 동행할까.
樓高直北見龍灣(루고직북견용만) - 누대는 높아 곧장 북쪽으로 용만(龍灣)이 보이고,
地僻偏東得日紅(지벽편동득일홍) - 땅은 외져 동쪽으로 치우쳐 붉은 해를 얻네.
不覺醉中詩思湧(불각취중시사용) - 취한 중에 시상(詩思)이 솟아남을 깨닫지 못하여,
盡將題滿壁間紅(진장제만벽간홍) - 모두 가져다가 벽 사이 붉은 난간에 가득히 적네.
이후에 김종직이 함양(咸陽) 군수(郡守)로 내려와 현판을 보고는 아전(衙前)에게 호통(號筒)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아전이 관찰사가 쓰신 글이라고 말하자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라해도 쌍놈은 쌍놈이라고 했던 김종직을 두고두고 증오했던 유자광이었다.
‘그 숱한 멸시를 참고 조롱을 견딘 나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란 걸 내 친히 보여주지.’
유자광은 죽은 남이를 생각했다. 37년 전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을 때 진압군 수장이었던 남이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봉되고 유자광은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봉되어 서얼 출신의 한계를 느꼈었다. 그 남이도 유자광을 얼마나 능멸했던가,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 다행히 예종대왕이 즉위했으나 병치레가 잦아 오래 못 살 것을 인지하고 남이를 모함하여 제거할 수 있었다. 유자광은 눈치가 빨라 젊은 예종이 같은 또래의 남이가 세조대왕에게 사랑과 관심을 더 받았음을 불편해했고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병권(兵權)을 잡고 있었던 걸 불안해했음을 일찌감치 간파할 수 있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쓴 북정가(北征歌)를 알고 있었다. 그가 쓴 시(詩)를 활용하면 충분히 예종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유자광은 은밀히 아랫것을 시켜서 벽에 괘서(掛書)를 쓰게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닳게 하고,
豆滿江水飲馬乾 (두만강수음마건) -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다 마르게 하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 사내로 태어나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 훗날 누가 그를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이 시중에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었다.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얻지 못하면’으로 뜻을 바꾸어 역모를 의심케 하는 내용으로 탈바꿈시켰다. 유자광이 상소하자 예종이 즉각 반응하였다. 결국 잔인한 국문 끝에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로 유자광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한명회도 죽었고 김종직도 죽었다. 이제 훈구 대신들의 씨를 말려주마.’
유자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촛불이 일렁였다.
해가 잘 들고 밝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광명산(光明山) 자락아래 금천현(衿川縣), 고려시대엔 금주(衿州)라 불리던 이 마을엔 약 500호(戶)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마을 한복판엔 기와지붕이 멋있게 올라간 30칸 가옥이 주변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반경 백 리를 걸쳐 이 집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웃에 온정을 베풀고 음식을 나누는 일정을 짜서 집 없고 음식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만드는가 하면, 커다란 의원(醫院)을 지어 약재(藥材)와 의원(醫員)을 모집하고 병에 걸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게 해주는 정1품 좌찬성을 역임하고 정1품 도총관(都摠管)의 명예직을 받고 퇴임한 신광현 대감의 집이었다. 그의 부인은 성종대왕 시절 종3품 숙인의 품계를 받은 효열부인(孝烈夫人) 성(成) 씨로 역시 주변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웃음과 즐거움이 꺼지지 않는 활기찬 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사랑채 앞에 도착한 젊은 지웅(知雄)은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아버님, 기침하셨습니까? 소인 무극(武極)이옵니다.”
“들어오거라.”
지웅은 들어가 절을 하고 부복했다. 아버지인 광현은 친근한 미소를 띠고 지웅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듬직한 아들이었다.
“그래 오늘은 사냥을 나간다고? 주상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직책이니 한시도 경호를 게을리 하지 말거라.”
“예 아버님, 명심하겠사옵니다.”
지웅은 작년 계해년(癸亥年) 가을 식년시(式年試)로 치러진 문과와 무과에서 동시에 급제를 한 최초의 인재였다. 임금이 특별히 나와 전시(殿試)를 보아 어느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수석 급제자로 바로 관직이 제수되었다. 지금은 겸사복장(兼司僕將)과 내금위장(內禁衛將)을 함께 맡고 있었다. 일 년도 안 되어 종2품으로 파격 승진하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다는 대신들의 반대 상소가 이어졌지만, 지웅에게 푹 빠진 연산군의 고집을 꺾을 대신은 그 누구도 없었다. 더구나 세 명을 두어 체아(遞兒)를 하며 녹봉을 받던 구조를 지웅 한 명 때문에 바꿔버렸다. 지웅은 일 년 내내 내금위와 겸사복의 수장을 맡았다. 연산군은 같은 남자였지만 지웅보다 한 살 위였고 우연히 같이 나간 사냥에서 지웅의 현란한 활솜씨와 칼솜씨에 매료당해 사석에서는 편하게 친구처럼 대하라는 명(命)까지 내린 상태였다.
“주상께서는 파도 같은 분이시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섬은 없는 분이시니 각별히 조심하고 근심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아버님, 소자 다녀오겠사옵니다.”
지웅은 절을 하고 일어섰다. 손에 들린 환도엔 오래되어 색이 바랜 빨간 댕기가 묶여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 지웅을 본 광현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지 어미를 닮아서 총명한 녀석이었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녀석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친 무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이해가 빨랐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 또한 출중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칼을 쥐는 법을 깨달았던 광현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녀석이었다. 아들 지웅은 불과 스무 살에 아버지인 광현의 실력을 넘어섰다. 다만 최근 들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현재의 주상께서 실정(失政)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여 문무 대신들의 칭송이 자자했었다. 역대 임금들의 선정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 물가 안정과 곡물 비축 및 유통하는 기관인 상평창(常平倉), 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였고, 유급 휴가제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다. 또한 경상우도(慶尙右道)지도, 동국명가집(東國名家集) 등을 간행했고, 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완성하는 등, 추진력 있고 현실감 있는 대군으로 특히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라도 장흥도호부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장흥부부인(長興府夫人) 신씨(申氏)와 외숙 윤구를 석방한 후로 조금씩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섭을 싫어하고 바른말 하는 대신들을 무시하고 위협했다. 경연(經筵)은 하품만 하다가 아예 불참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전회의에서는 고집과 고성으로 연로한 당상관들을 향해 막말을 하기도 했다. 그 옆에 유자광이라는 간신과 임사홍이라는 소인배가 임금의 눈과 귀 역할을 하면서 조정을 어지럽혔다. 특히 음탕(淫蕩)이 심하여 매일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기 시작했다. 후궁들은 거들떠도 안보고 신하들의 가족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는 은근히 신하의 부인을 탐한다는 기이한 소식도 들리던 차였다.
광현은 입적하신 현암과 광운 두 스님을 생각했다. 그분들이 계셨다면 앞날에 대한 경고를 해 주셨을 것을 생각하면 왜 진작에 묻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아들이 조정의 관직에 있으니, 더구나 임금을 보필하는 중요 직책에 있던지라 하루가 살얼음이었고 일각이 여삼추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들의 호를 무극으로 지어주시던 광운 스님께서 아들의 명(命)이 이갑(二甲)은 거뜬하다는 농을 치셨다는 것이었다. 환갑까지만 살아도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거늘 그 이상 살 수 있다면 복(福)이 있는 아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광현은 집사 두식이를 불러 출타 준비를 명했다.
진시(辰時) 무렵, 도성 밖 흥인지문(興仁之門) 입구에 겸사복 금군(禁軍) 삼십여 명과 활을 잘 쏘는 궁인(弓人) 십여 명, 매사냥을 위해 응방(鷹坊) 관리들인 응사(鷹師) 다섯 명, 몰이꾼과 의관(醫官), 내시와 후궁, 기생 등 오십여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삼월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지웅이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연산군을 보며 말에서 내렸다.
연산군은 주로 경기(京畿) 북부 일대 양주(楊州) 지역과 미아리(彌阿里) 일대, 도성 서쪽 교외 지역인 서강(西江) 및 고양(高陽), 그리고 왕실의 전용 사냥터였던 '서빙고(西氷庫) 금원(禁園)' 인근 넓은 초지에서 사냥을 즐겼다. 왕실의 금산(禁山)이 많았고 넓은 평야와 구릉이 있어 사냥에 적합했다. 연산군은 이 지역을 수시로 드나들며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는 일이 잦아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경강(京江) 변에는 왕실의 용산 별궁(龍山別宮)이 있어서 사냥을 끝낸 연산군이 이곳에서 사냥 외에도 연회(宴會)를 베풀고 기생들을 모아 향락을 즐기곤 했다. 상선과 함께 흥인지문을 나선 연산군은 지웅을 보고 활짝 웃었다.
“하하하. 이보게 무극, 만산홍엽(滿山紅葉)에 낙화유수(落花流水)하니 이보다 더 좋은 날씨가 있겠는가. 오늘 호랑이 한 마리 잡아 보세나. 하하하.”
“황공하옵니다. 전하. 사냥도 좋지만, 전하 옥체가 상하시는 일이 없도록 소신이 옆에서 잘 보필할 것이옵니다.”
“허허 이런, 초장부터 재미가 없어지는군. 여기까지 나와서도 전하 타령인가. 그냥 ‘이보게 융(漋)’ 하고 불러 보게나. 응?”
“받자올 수 없사옵니다. 전하. 어서 사냥길에 오르시지요.”
지웅은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연산군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내 오늘은 꼭 자네의 그 입에 독한 청주를 들이붓고 말겠네. 저 기생들 중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거든 이따가 꼭 말을 해주게. 알겠는가 무극.? 하하하하.”
연산군은 말의 고삐를 틀어쥐고 박차(拍車)를 가했다. 서서히 임금을 따라 수행원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웅 역시 말에 올라 연산군 바로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았다. 다행히 해가 떠서 저 멀리 삼각산(三角山) 허리춤에 걸려있었다. 지웅은 주변을 경계했다. 임금의 옥체와 일행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 지웅의 책무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던 단전호흡을 하면서 기운을 돌렸다. 이미 지웅의 몸은 추위를 하나도 느끼지 못할 만큼 따뜻하게 기운이 운행되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연산군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무극, 만약에 말이야. 지아비가 부인을 죽였다면 자식은 그 아비를 용서해야 맞는가? 어떤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지웅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연산군은 이렇게 갑작스런 질문으로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데 소질이 있었다.
“전하, 소신 아둔하여 전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나이다. 통촉하시옵소서.”
“에이..간단하잖아. 아비가 어미를 죽였다면 자식이 그 아비를 용서해야 하느냐 말이야.?”
“전하.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윤리가 지엄한 조선에서 어찌 강상(綱常)의 도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좋아, 좋아, 그러면 다르게 물어보지. 아비가 어미를 죽이는 데 가담한 아비의 종노비(種奴婢) 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지웅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주상은 지금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히 입에도 올리지 말라며 아는 사람끼리는 불문에 부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특히 주상에게는 향후 백 년 동안 폐비의 내용은 언급을 금한다는 성종대왕의 유지도 있었기에 누가 말해주지 않은 이상 주상이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지웅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연산군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보게 무극, 내가 철이 들면서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했을 뿐인데 모두들 한결같이 나를 막더군. 무슨 비밀이 있길래 말이야. 내 그래서 직접 사실을 파헤쳐 볼 생각이네.”
젊은 연산군은 사초(史草) 열람을 막아서던 수찬관(修撰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았지만, 때가 되길 기다리는 연산군이었다. 갑자기 연산군이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일행들이 멈춰 섰다. 우측 산속을 응시하던 연산군이 활을 바투 잡고 시위를 걸었다. 모두 숨을 죽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더니 ‘피잉’ 하며 화살이 날아갔다. 잠시 후에 멧돼지 한 마리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로 천방지축 날뛰더니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대신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명중이오.!”
옆에 있던 상선 김자원이 주름진 얼굴로 애써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성상(聖上)의 신기(神技)가 하늘에 닿았음이옵니다.”
연산군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좀 전의 비장하고 음침하던 표정은 간데없고 철부지 어린아이 마냥 좋아 기뻐서 날뛰는 모습이었다. 연산군은 크게 소리치면서 말을 몰았다. 환호하는 웃음소리가 산 중에 퍼졌다. 지웅은 함께 말을 달려 나가면서 왠지 주상의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멧돼지의 목에 발을 올리고 허리에 주먹을 얹은 연산군이 보였다. 천하를 얻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삼월 초 아흐레 술시(戌詩), 유자광의 집에 임사홍이 찾아왔다. 저녁도 마다하고 바로 주안상을 들인 두 사람은 이른 저녁부터 대취(大醉)하였다. 코가 붉어진 유자광이 입을 열었다.
“병판 대감, 아들 단속 좀 잘해야겠소이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 줄 모르는 것이오? 지금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판이오.”
임사홍이 반쯤 풀린 눈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가부좌를 튼 다리가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아, 우리 희재 말씀이시오. 내 안 그래도 혼쭐을 냈소이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것이외다.”
무오년에 사림파의 대대적인 숙청이 있은 뒤로 주상의 기행(奇行)은 날로 늘어갔다. 여색을 탐하는 건 지극히 사사로웠고, 자신이 유흥을 즐기던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연못 주변을 확장하기 위해 연못 서쪽에 있던 건물 수 채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쌓아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인공 언덕을 만들기도 했다.
언론과 간쟁(諫諍)하며 정치를 발전시키는 기능은 주상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에 경연(經筵)을 불참하고, 홍문관을 아예 혁파하여 사실상 연산군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은 없어져 버렸다. 무소불위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가진 괴물이 되어갔다.
임사홍의 둘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대왕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했기 때문에 풍원위(豊原尉)에 봉해졌으나, 외척은 벼슬을 할 수 없는 금기를 깨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 제수되었다. 장악원 제조는 정3품 당상관직으로, 궁중 음악과 연회를 총괄하는 기구의 책임자였다. 연산군이 얼마나 임숭재를 총애했는지 새벽에 연산군의 부름에도 맨발에 편복으로 달려 올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 창덕궁 근처에 살던 임숭재는 궁으로 오는 길에 집이 많다 하여 연산군이 가옥 40채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더 듣기 어려운 건 연산군의 누이이자 임숭재의 아내인 휘숙옹주를 연산군이 근친상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자신의 아내마저 왕에게 바치는 신하와 친 누이마저 잠자리의 상대로 여기는 왕의 이야기는 신하들 사이에서 더 이상 논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유자광은 그런 임숭재는 제쳐두고 셋째인 임희재(任熙載)를 저격한 거였다. 임희재는 사림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였다. 유일하게 쓴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강직한 성품으로 아비인 임사홍과 형인 임숭재에 비하면 거의 종(種)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임희재는 연산군이 궁궐에 연못을 만들어 배를 띄워 가무를 즐기고 황음(荒淫)을 일삼는다며 시를 써 비꼬았다.
船入深宮是自家(선입심궁시자가) - 배를 띄워 깊은 궁궐로 들어가니 이는 집안일이오
夜深歌舞妓圍多(야심가무기위다) - 밤 깊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기생들 둘러싸네
太平時節君王樂(태평시절군왕락) - 태평성대에 임금이 즐기는 것이
却恐沿邊動干戈(각공연변동간과) - 오히려 변방에 전쟁(干戈)이 일어날까 두렵네
어쩌면 임희재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임사홍과 임숭재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자광은 그런 임희재로 인해 언젠가 주상의 불똥이 튈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내일이오. 내일 신 씨가 주상을 뵈러 가기로 했으니, 도승지께서 잘 마무리 해주시오.”
“여부가 있겠소이까. 대감, 걱정 마시오. 시불가실(時不可失) 아니오이까? 주상의 성정이 워낙 포악무도(暴惡無道)하고 독취악조(毒嘴惡爪)하니 날뛰는 말 엉덩이 때리는 것보다도 쉬울 것이외다. 허허허”
밤이 깊어갔다. 임사홍의 몸종들과 유자광의 시종들이 밖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별채 한쪽 방에서는 거마꾼들이 모여 투전판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