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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지은이 나츠하나 · 2026-10-27

모래시계는 부서졌다

여드레째 아침, 셔터는 어제와 같은 얼굴로 평소 시간에 올라갔다. 도윤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천 꾸러미는 어젯밤에 묶은 매듭 그대로였고, 옮길 때마다 안에서 조각들이 부딪는 소리가 조금 났다. 감정사는 부서진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 무엇이 부서졌는지는 조각으로만 알 수 있어서다.

아침은 결국 먹지 않았다. 성하는 어제 봐 둔 빵집을, 도윤은 어제 지나친 다른 집을 말했고, 두 사람은 골목 초입에서 삼 분쯤 그 얘기를 하다가 둘 다 그만두고 그냥 걸었다. 배는 나중에 고팠다.

테레사가 아무 말 없이 뒷방에서 들고 나온 벨벳 위에 물건이 눕혀져 있었고, 도윤은 노인의 손이 물러난 다음에야 그것을 들었다.

놋쇠는 새것처럼 번쩍이지 않았다. 닦으면 안 되는 자리를 아는 손이 닦은 것이었다. 눈금판 뒤쪽, 투각이 지나가지 않는 자리에 팔 년 전 팔월의 하늘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그날 복사점의 방위는 도윤이 무릎 위 수첩에 적어 갔고, 그것을 놋쇠에 옮겨 달라고 한 것은 성하였다. 성하가 손을 내밀자 도윤이 물건을 넘겼다. 값은 엿새 전에 치러져 있었다.

사진은 늦은 오후에 찍었다.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성하가 걸음을 멈췄고, 도윤이 이유를 묻기 전에 테레사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노인은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성하는 그러니까 좋다고 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붙이고 서자 성하는 카메라를 보고 웃었다. 도윤은 웃으며 옆을 보았고, 셔터는 그가 고개를 반쯤 돌렸을 때 눌렸다. 뒤로 강과 다리가 있었지만 초점은 두 사람에게만 맞아 있었다. 그림자는 둘 다 같은 방향으로 누웠다.

인화는 다음 골목의 오래된 가게에서 했다. 성하는 봉투 하나와 편지지 한 장을 사서 가게 탁자에 앉아 몇 줄을 썼는데, 종이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쓰는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문장을 고르느라 허공을 보는 일도 없었다. 이미 아는 것을 옮겨 적는 사람의 속도였다. 다 쓴 종이를 반으로 접는 손만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사진은 뒷면을 그대로 둔 채 봉투에 넣었다. 성하는 인화한 사진 뒷면에 꼭 날짜를 적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꺼냈던 펜을 도로 집어넣었다.

느린 우체통은 다리 건너 문구점에 있었다. 성하가 여권을 내밀고 몇 마디 하자, 주인은 여권과 장부를 한 번씩 들여다보고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냈다. 나무 함을 한참 뒤적여 주인이 꺼낸 것은 두툼한 봉투 하나였다. 성하는 그 봉투를 뜯지 않고 도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화해는 얼굴 보고 하는 거라고 성하가 말했다. 새 봉투의 배송일 칸에 성하가 적은 것도 내년 구월 십이일이었다. 주인은 그 날짜를 큼직한 장부에 옮겨 적었다. 봉투가 함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테레사가 웃었고, 도윤은 그 미소를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게로 돌아와 도윤이 코트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자 테레사가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뚜껑을 열고 램프를 당겨 돋보기를 댔지만 오래 보지는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에 노인은 시계를 돌려주며 한 가지만 일러 주었다. 태엽은 전과 같이 감되, 세 바퀴 반에서 멈추지 말 것.

서울은 팔월의 끝이었고, 회사에는 휴가가 끝난 날짜에 맞춰 나갔다. 회사 사람들은 그가 감정을 마무리하고 하루 늦게 성하에게 합류했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남아 장부를 덮었을 다른 서도윤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빈자리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감정실은 그대로였다. 눈금은 변하지 않았고, 세계는 여전히 0.1밀리미터 단위로 작동했다. 도윤은 회중시계를 십육 년 동안 그것이 놓여 있던 책상 왼쪽 모서리에 다시 놓았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여서 감정실이 조용해지는 오후에만 들렸고, 도윤은 그때가 되면 하던 일을 잠깐 멈추었다. 태엽은 하루 한 번 감았고 세 바퀴 반에서 멈추지 않았다. 몇 바퀴를 감았는지 세지 않게 되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원장에게는 도윤이 먼저 전화했고, 원장은 신호가 두 번 가기 전에 받았다. 도윤은 저 지금 감정실입니다, 하고 먼저 말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계는 가지고 다니느냐고 원장이 묻자 도윤은 책상 왼쪽 모서리를 보며 대답하고 날짜를 알렸다. 구월 십이일입니다. 원장은 알았다고 했다.

그 주에는 편집자가 전화해 마무리 단계였던 원고의 일정을 잡자고 했다. 도윤은 옆에서 성하가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 겨울에 내자고 성하가 말했다.

도윤이 아는 다른 겨울이 하나 있었다. 그 겨울에도 같은 편집자가 같은 원고 이야기로 전화를 했는데, 도윤이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로 열 달 동안 답이 나지 않았다. 이번 겨울에는 책이 나온다. 작업실 문은 열려 있었다.

신문에서 도윤이 본 것은 팔월 열사흘 밤 열 시 무렵 총성이 들린 갤러리 위층 서재에서 어느 재단의 관계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짧은 기사 한 줄이었다. 이름은 읽었지만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 재단의 이름은 그 뒤 몇 주 동안 소장품 출처 조사와 이사회 해산, 압수된 목록을 다룬 다른 기사들에 나왔다. 홍콩에서 얼굴을 알던 한 사람은 그 몇 주 사이에 업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도윤은 그 이름을 기사에서 찾지 않았다. 그 밤 강 남쪽 골목에서 총을 내린 사람이 누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어느 기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감정실에는 사백 년 전의 필적을 묻는 전화가 늘었고, 대부분 도윤이 모르는 이름이었다. 어느 학회가 일정을 다시 잡는다고 했고, 어느 도록은 다음 판을 미룬다고 했다. 그 종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도윤에게 묻는 사람도 없었다.

구월 초에는 피렌체에서 편지가 왔다. 테레사의 글씨는 크고 곧았고 편지는 짧았다. 어제 제 아이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육십 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했다고, 그 애가 끝까지 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구월 십이일에 가마.

구월 십이일은 맑았고, 성하는 아침부터 규칙을 만들었다. 신랑은 신부 화장이 끝나기 전에 들어오지 말 것. 사진사가 웃으라고 하기 전에 미리 웃지 말 것. 그리고 오늘은 아무도 우는 사람 없기. 마지막 규칙은 말하자마자 성하가 제일 먼저 어겼다.

식장 문이 열리기 전, 복도에는 새 구두 한 켤레가 서 있었다. 굽에는 아직 흠이 없었다.

문이 열리자 일흔의 노인이 신부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걸음이 느렸지만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도윤은 앞에 서서 그 걸음을 세지 않았다. 그냥 세어지지 않았다. 도윤만 기억하는 어느 여름에 이 노인은 다른 식장에서 도윤의 팔을 오래 잡은 적이 있었고, 그때 두 사람이 꺼내지 않은 얘기가 지금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가족석에는 노인이 한 사람 더 앉아 있었다. 먼 데서 온 그 노인은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 했지만 안내받은 자리에 제자리인 듯 앉았다.

하객석 앞줄에는 성하가 도윤을 처음 소개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고, 도윤이 그 앞을 지날 때 그 시선이 잠깐 그의 팔에 머물렀다가 얼굴로 올라왔다. 오늘 그 팔에는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서약은 짧았다. 두 사람은 이미 한 번 했고, 그때 증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뿐이었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하가 먼저 했고 도윤이 다음이었다. 도윤의 서약에는 지킨다는 말이 한 번 들어갔는데, 지난달 어느 성당의 바닥에서 성하가 농담으로 만든 규칙에도 같은 동사가 있었다. 도윤은 그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성하는 서약이 끝나자 알아들은 얼굴로 도윤을 보았다. 종이 반지는 그 자리에서 진짜 반지로 바뀌었다.

식이 끝나고 도윤은 테레사에게 작은 것을 하나 건넸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랍 문양 하나로, 어느 종이의 귀퉁이에서 옮겨 온 것이었다. 노인은 두 손으로 받아 한참 보다가 손수건에 싸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피로연 탁자 한쪽에서 도윤은 표지가 아직 가안인 가제본을 펴 보았다. 마지막 장의 다리에는 물과 하늘이 채워져 있었고, 도윤은 두 번 건넌 그 다리를 안다. 한가운데를 넘기다가 아무것도 없는 페이지 한 장에서 손이 멈췄다. 인쇄 사고가 아니라고 성하가 편집자에게 두 번 말했다고 했다.

책을 내려놓고 그 옆의 것들을 차례로 보았다. 한 장이 뜯긴 채인 수첩, 뜯긴 자리에서 나온 종이 두 개가 나란히 구겨진 채 든 액자, 그리고 이름표 없는 작은 유리병. 병 안에 든 게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옛날 물건이라고 하기로 정해 두었는데, 그날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성하가 가제본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마지막 장을 읽겠다고 했다.

아이는 별을 하나씩 따라갔고, 별은 자꾸 다음 별로 이어졌다. 성하는 마지막 별에서 한 번 쉬었다.

"아이는 편지를 쓴 사람을 만났다. 사백 년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박수가 났다. 도윤은 박수 소리 사이에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작고 규칙적인 것이 닿았다. 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 별의 강을 거슬러 | WEINO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