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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덩어리

지은이 하늘바라기 · 2026-10-27

거대한 스크린 속, 단정한 정장 차림의 AI 아나운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중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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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 그룹 회장의 기자회견이 곧 시작됩니다.”

단상에 오른 남자는, 재계 정상에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마른 체형이었다.

짧게 친 스포츠머리에, 슈트 위로도 드러나는 다부진 어깨선— 마치 스스로 몸을 갈아 넣어 여기까지 온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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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는 그를 두고 "서민적인 회장님"이라 불렀다.

바이오 리플레시 시술 한 번 받지 않고, 순전히 자기 몸으로 관리한다는 그 이미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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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어떤 시술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몸조차,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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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주변, 늘씬한 실루엣의 SPA시리즈 세 마리가 한가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마리는 뒷다리를 들어 목덜미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고, 다른 한 마리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일반인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특수 작전용 최상위 모델들—

오직 그를 위해 맞춤 제작된 개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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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대기아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비효율적인 인적 자원을 정리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그가 형식적인 답변 몇 개를 던지고 자리를 뜨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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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찌끌래기 자식아!”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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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초록빛이 감도는 SPA-보안형 하나가 먼저 움직였다.

파앗— 짧은 빛줄기가 스쳤다.

남자는 순간 멈칫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밀었던 손, 그 소매 끝이 마치 면도날로 도려낸 것처럼 정확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살갗은 스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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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같은 초록빛의 SPA-보안형 하나가 지글 회장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몸을 비볐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지글 회장은 그 모습을 흘깃 보더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발로 툭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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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아, 저리 꺼져.”

지글 회장은 그렇게 자리를 떴다.

비록 사람들은 그 광경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비효율적인 인적 자원을 정리하겠다"는 그 발언 하나만으로도 분노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 * *

배급소를 뛰쳐나온 철민은, 승호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걸었다.

몇 블록을 지나자, 이미 낯익은 시위 현장의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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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아, 나 먼저 간다!”

승호는 어느새 익숙하게 시위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망설임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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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광장 한쪽에는 노숙자들과 지친 시위자들이 뒤섞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 바로 맞은편— 통유리로 된 건물 안에서는 화려한 조명 아래 우아한 무도회가 한창이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같은 거리 위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 두 개가 나란히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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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의 시선이 문득 근처 자판기 위, 낡은 광고판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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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 걱정 없이, 언제나 당신 곁에— 노동자의 친구, NZ 라거』

노란 바탕에 투박하게 그려진 로고였다.

어디서나 흔히 보던, 그냥저냥한 서민 맥주 브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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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별생각 없이 자판기로 다가가 캔 하나를 뽑아 들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캔을 따고,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갑고 밍밍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딱히 맛있지도 않았지만, 그 서늘한 감각이 잠깐이나마 머릿속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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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캔을 다 비우고도, 그 막막함은 가시지 않았다.

철민은 결국 캔 하나를 더 뽑아 마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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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캔을 반쯤 비웠을 때쯤, 취기가 슬슬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억눌렸던 감정이, 술기운을 타고 스멀스멀 차올랐다.

저 유리창 너머에서 웃고 있는 것들이랑, 여기서 이러고 있는 우리랑—

대체 뭐가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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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세 번째 캔을 따며, 그 유리벽 너머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저기서 잔을 부딪치며 웃고,

누군가는 여기서 겨우 라거 한 캔으로 하루를 버틴다.

그 경계가 고작 유리 한 장이라는 게,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거지.

철학과를 나와서, 3D 직종을 전전하고, 그마저도 해고당하고—

지금은 여기서 술이나 들이켜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리 되짚어봐도 명확한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다 지쳤어.

취기가 오르며 시야가 살짝 흐려졌다.

철민은 그 자리에 주저앉듯 벽에 등을 기댔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구호들이,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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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 멀리서 낯선 리듬의 구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인간 일자리 돌려내라!”

처음엔 작았던 그 외침이, 점점 커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철민은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며 걸어오고 있었고, 그 맨 앞에— 확성기를 손에 든 한 여성이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곧게 편 어깨. 마치 그 자리가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

“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그녀가 외치자, 뒤따르던 대열이 한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철민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

“…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작게, 거의 속삭이듯 새어 나온 그 목소리가—

이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 여성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철민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저거… 이미정 아니야?

철민은 취기 오른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몇 달 전 마트 습격 사건 때 만났던, 그 전직 지글 안전검수팀 출신— 이미정이었다.

▪

“밥그릇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확성기를 든 그녀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술에 취해 웅성거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철민도 취기에 휩쓸리듯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 오랜만이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 곁을 조용히 따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 점퍼에 삐에로 가면을 쓴 남자였다.

얼굴은 가렸지만, 살짝 절뚝이는 걸음걸이까지는 미처 숨기지 못한 듯했다.

✦뭘 숨기려는 건지, 다 티 나는데.

철민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철민이 그 위화감을 미처 다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정이 확성기를 내리고 그를 알아본 듯 잠시 시선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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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기, 혹시… 이미정—”

철민이 취기 오른 채로 겨우 그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에 떠밀려 몸이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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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철민은 대열 한복판에 완전히 휩쓸려 있었다.

이미정의 모습은 저만치 앞서 있었고, 그녀는 다시 확성기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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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녀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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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이제 우리 밥그릇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저 고철덩어리가 우릴 구원해줄 거라고 했지만, 실상이 어떻습니까! 우리 밥그릇만 축내고 있지 않습니까!”

군중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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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입니다! 감정이 있고,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삶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그게 보입니까?!”

철민은 그 외침을 들으며, 취기와 함께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맞아…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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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철민은 취기와 흥분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대열 앞쪽으로 몸을 밀어붙였다.

이미정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목청도 점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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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그릇 돌려내라!”

그때, 대열 한쪽에서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와 근처를 순찰하던 Z가드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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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고철덩어리야!”

남자는 Z가드의 몸통을 있는 힘껏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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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에 우리가 다 죽는다고!”

또 한 번 밀쳤다.

하지만 그 거대한 몸은 마치 벽돌 벽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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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으니까!”

“어디 한번, 죽여봐! 어!”

남자는 분에 못 이겨 몇 번이고 다시 밀쳤다.

어깨로 들이받고, 주먹으로 두드리고—

그럴수록 자기 손과 어깨만 아파 왔지만,

Z가드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표정도, 반응도 없이.

그 완벽한 무반응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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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것 봐! 우리 말은 씹는다는 거잖아!”

“저것들 눈엔 우리가 사람으로도 안 보이나 보지!”

여기저기서 격앙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근처 Z가드들에게 우르르 몰려가 함께 밀치기 시작했고,

대열 전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더 사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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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저편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커먼 실루엣의 무리가 새롭게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온몸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뒤덮인, Z가드와는 확연히 다른 위압적인 안드로이드들—

Z폴리스였다.

철민은 그 붉게 이글거리는 라인을 바라보며, 어째서인지 감정이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