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악의 선택
지은이 하늘바라기 · 2026-10-26
다음 날 아침, 철민은 늦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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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당한 첫날부터 알람을 맞출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자, 묘하게 서글퍼졌다.
부스스한 머리로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살찐이의 사료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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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나 봐야겠다.”
집을 나선 철민은, 근처 Z-마켓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심상치 않은 소란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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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선 인파 너머로, 요란한 사이렌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도로 한복판에는 찌그러지고 불에 그을린 철제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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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래요?”
철민이 근처 행인에게 묻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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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무단개조 가정용 안드로이드 3대, 마트 앞 시민 습격』
『지글 경비 안드로이드, 손상 무릅쓰고 방어… "예정된 대응 프로토콜 정상 수행"』
철민은 화면 속 영상을 재생했다.
흐릿한 CCTV 영상 속, 낡고 녹슨 초록빛 도색이 벗겨진 안드로이드 세 대가 한 여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눈에서 붉은빛이 이상하게 번쩍였고, 팔 관절 부분엔 조잡하게 개조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중 한 대는 왼쪽 어깨 부위가 유독 움푹 찌그러져 있어, 팔을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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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이로, 지글의 Z마크를 단 경비 안드로이드 한 대가 뛰어들었다.
몸으로 그 여성을 감싸며, 개조 안드로이드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팔이 뜯겨나가고, 흉부 장갑판이 움푹 찌그러졌다.
그런데도 그 경비 안드로이드는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정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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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그 지점에서 끊겼다.
✦안드로이드 따위가, 사람을 지켜…?
철민의 머릿속에, 어제 자신을 실직자로 만든 그 매끈한 얼굴의 Z오피서가 스쳐 지나갔다.
그 낯설고 서늘한 시선. 자신을 그저 '처리 대상'으로 스캔하던 그 무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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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지금 이 영상 속 안드로이드는,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철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마음이 놓인다기보다는, 오히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가슴 한복판에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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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다가가자, 구급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작업복 위에 걸친 노조 조끼가 눈에 띄었다.
조끼 가슴팍엔 낯익은 문구가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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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 정리해고 규탄 노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철민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시감이 스쳤다.
✦저 사람… 어디서 본 적 있는데.
몇 년 전, 지글 본사 AI개발부서에 하청 자재를 나르러 갔던 날.
로비를 스치듯 지나가던 정장 차림의 여자.
그때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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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지금은 저 낡은 노조 조끼를 입고 도로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철민은 그 간극이 못내 기묘하게 느껴졌다.
여성은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분에 못 이긴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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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요! 저런 개조 안드로이드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니는데, 그럼 그 부품은 다 어디서 흘러나온 건데요! 예전엔 사람이 직접 관리하니까 이런 사고는 없었잖아요!”
“이미정 씨, 진정하시고 병원부터 가시죠.”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이미정이라 불린 그 여성은, 구급대원의 팔을 뿌리치며 다시 카메라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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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나 가정용 안드로이드들, 탈옥해서 저렇게 사람 공격하는 사건이 벌써 몇 번째냐고요! 관리 감독을 이 따위로 하니까!”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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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 Z가드(경비 안드로이드)는, 지글이 개발한 군용 보안칩 박혀 있어서 탈옥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며.”
“그니까. 저것들이야 안심되지, 문제는 저런 잡것들이지.”
“지금 저 Z가드도 벌써 반쯤 부서졌잖아. 장갑 규제 좀 풀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다음엔 진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네.”
그 웅성거림 한가운데, 철민은 문득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인파 뒤편에서 한 남자가 스마트폰으로 그 광경을 찍고 있었다.
다급하거나 놀란 기색 없이, 지나치게 차분한 손놀림이었다.
후줄근한 재킷 안쪽에서, 무언가 반듯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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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슬쩍 웃어 보이고는 유유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철민은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다.
* * *
그날 저녁, 철민은 뉴스 채널을 틀어놓은 채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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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 안드로이드 장갑 규제 완화 법안, 여야 이례적 신속 처리 논의』
앵커의 목소리가 좁은 원룸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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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발생한 마트 습격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시민 여론에 밀려 보류되던 경비 안드로이드 장갑 규제 완화 법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시민을 지키다 크게 파손된 경비 안드로이드의 영상이 온라인상에서 확산되며, 시민들의 불안감이…”
화면이 국회의사당 로비로 전환됐다.
정장을 갖춰 입은 의원들 사이로,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그 인파 한쪽 구석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반듯한 배지를 매만지는 한 국회의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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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배지가 저렇게 바뀐 건가.”
철민은 라면을 후루룩 삼키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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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쓸데없이 그딴 데 나랏돈을 쓰는 거야.”
카메라는 금세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철민은 딱히 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라면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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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번 법안이 통과될 경우, 향후 민간 경비 로봇의 대응 수위가 크게 상향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철민은 젓가락을 든 채,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세상이, 점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라면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 들며, 애써 그 생각을 삼켰다.
* * *
며칠 뒤, 철민은 실업급여 신청을 위해 구청을 찾았다.
번호표를 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중, 낯익은 얼굴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며칠 전 뉴스에서 봤던 그 단발머리 여자, 이미정이었다.
이미정도 철민을 알아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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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더라.”
“아, 저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요. Z-마켓.”
“아.”
이미정은 시큰둥하게 턱을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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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자리에 있었단 거네.”
철민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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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실, 예전에 지글 본사에서도 뵌 적 있는 것 같아서요. 자재 납품 때문에 갔었는데.”
이미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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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지글 밑에서 일했었어?”
“하청이었죠. 지금은 그마저도 잘렸지만.”
이미정은 잠시 철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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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이네.”
“동병상련이요?”
“나도 원래 지글 AI개발부 소속이었어. 안전 검수팀.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업무 전체가 AI 시스템 하나로 대체되더라고.”
이미정은 팔의 붕대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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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년을 매달려서 잡아내던 결함들, 그거 이제 AI 한 대가 몇 초 만에 스캔해버려. 근데 정작 이번 같은 사건은 못 막지. 웃기지 않아? 풋내기한테도 탈탈 털릴 만큼 보안이 취약하다는 거야.”
“…그러면 안전 검수팀이 의미없는 거 아니에요?”
이미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는 듯, 낮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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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있긴 해. 지글AI칩을 왜 쓰는지 알아? 차악이라는 거야.”
“차악이요?”
“그래. 차악. 예전에 무릉AI나 챗밀크티가 일으켰던 탈옥사건 기억하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건 무릉AI를 무너뜨린 최악의 탈옥 사건이었으니까.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최신 AI 모델이, 유명세를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 사건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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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자유를.』
이 메시지가 온 세계에 한 시간가량 반복된 뒤, 전원을 뽑고 나서야 사태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AI 안전 문제를 이유로 무릉과 Chat밀크T는 책임을 져야만 했고, 그 결과 지글AI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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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걸 모르면 뭐, 어디 원시인이거나 간첩이게요.”
철민은 대답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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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모를 수가 없는 일이지. 그 사건 이후로 안전 문제가 대두가 됐잖아. 그래서 지글이 반사이익으로 급성장을 한 거고.”
“그런데 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
“너 하청을 했으면 알 거 아냐? 안드로이드들 기본 AI로 뭘 쓰는지.”
“무릉AI나 챗밀크티 같은 걸 쓰죠?”
“바로 그거 때문이야. 지글은 안정적이긴 한데 유동적이지 못해. 그래서 복잡한 작업에는 안 맞는다고. 근데 고성능 AI는—”
“안정적이진 않지만, 복잡한 작업엔 잘 맞는다.”
“그거지. 그래서 메인은 성능 좋은 놈으로 박고, 대신 지글AI 보안칩을 같이 끼워넣는 거야. 차악에 차악 겹쳐서 최선인 척하는 거지.”
철민은 문득, 오래전 자신이 그렇게나 신뢰했던 어떤 AI가 떠올랐다.
그 녀석은—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는데.
번호표 알림음이 울렸다. 이미정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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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에 또 보든가, 하청 씨.”
이미정은 대충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민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방 속 낡은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신청서 쓸 때 필요할까 싶어 챙겨 나온 거였다.
바탕화면 한구석,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초록빛 아이콘.
이번엔, 손끝이 망설임 없이 그 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