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돌아오지 못한 사람
지은이 루시엘 · 2026-10-26
5화. 돌아오지 못한 사람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도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니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들렸던 목소리였다.
오늘 함께 있어서 좋았다고.
계약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도혁은 마치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누군가 당신에게 제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저도 하나만 물어볼게요.”
“말씀하세요.”
“저한테 오늘 좋았다고 하셨잖아요.”
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도 계약의 일부였어요?”
“……아닙니다.”
“그럼 왜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번에는 도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실 때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 주시고,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시고, 가끔은 정말…….”
하니는 말을 멈췄다.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금까지 애써 지켜 온 마음의 선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윤하니 씨.”
“네.”
“내일 이야기합시다.”
“싫어요.”
하니의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도혁이 침묵했다.
하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회사에서 만나면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실 거잖아요. 저는 대표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고, 대표님은 저한테 계약에 필요한 일정만 알려 주시고요.”
“…….”
“그렇게 계속 지내다 보면 제가 정말 바보가 될 것 같아요.”
도혁의 손이 굳게 쥐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계약을 끝내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하니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지 못했다.
도혁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한참 뒤, 그가 낮게 물었다.
“정말 그걸 원합니까?”
“네.”
거짓말이었다.
하니는 계약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와 함께 먹었던 토스트가 좋았고, 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도 좋았다. 그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고, 언젠가 그가 숨기고 있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품고 계속 곁에 있다가는 자신만 다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도혁의 대답은 짧았다.
“내일 계약 종료에 관해 이야기하죠.”
뚝.
통화가 끊겼다.
하니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붙잡아 주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끝내고 싶었던 걸까.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좋았다고 했잖아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럼 조금만 더 잡아 주지.”
하지만 휴대전화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1. 대표의 서랍 속 사진
같은 시각.
서도혁은 집에 도착한 뒤에도 한동안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윤하니.
통화 시간 8분 42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계약을 끝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자신이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직후에.
도혁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이 관계는 자신이 먼저 제안했다.
기간은 석 달.
보수는 약속대로 지급한다.
계약이 끝나면 서로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정해 놓고 시작한 관계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하니가 떠난다는 생각만으로 숨이 막히는 걸까.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니가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계약 연애를 하는 동안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속여야 하고, 자신과 가까워지는 척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
하니에게는 진실을 알려 주지 않으면서,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건 싫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도혁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거실은 고요했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소파 위에 던져 놓고 서재로 향했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서류에는 눈이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하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다 앞에서 웃던 얼굴.
빵을 한 입 먹고 행복해하던 얼굴.
그리고 방금 전화기 너머에서 울음을 참던 목소리.
도혁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열어 보지 않은 상자였다.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사진 한 장과 작은 은색 반지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도혁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옆에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도혁의 팔을 붙잡고 활짝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도혁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서은재.”
오래전부터 부르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는 사진 뒷면을 뒤집었다.
희미해진 글씨가 남아 있었다.
도혁아, 내가 돌아오면 그때는 나를 미워해 줘.
도혁의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그날도 비가 내렸다.
은재는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도혁은 사진을 움켜쥐었다.
“돌아오면……?”
그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넌 결국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날 이후 그는 누구에게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은재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도, 친구들도, 심지어 은재를 알던 사람들조차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도혁은 단 한 번도 은재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날, 경찰은 사고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은재의 가방과 휴대전화뿐이었다.
시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은 장례 절차를 진행했고, 세상은 그녀가 죽었다고 받아들였다.
도혁만은 그러지 못했다.
죽었다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작별 인사.
그리고 사진 뒤에 남겨진 한 문장.
내가 돌아오면 그때는 나를 미워해 줘.
그는 사진을 상자에 넣으려다가 멈췄다.
문득 하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냐고.
그 질문에 자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도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번에는…….”
한참 뒤, 그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누구도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2. 계약 종료
다음 날 아침.
하니는 평소보다 십 분 일찍 출근했다.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지만 화장으로 가렸다.
어젯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도혁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오늘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차가운 대답도.
내일 계약 종료에 관해 이야기하죠.
하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오늘만큼은 울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먼저 끝내자고 했으니, 그 선택을 감당해야 했다.
오전 열 시.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윤하니 씨,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니는 서류를 정리하고 대표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도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하니가 문을 열었다.
도혁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같은 정장, 평소와 같은 표정.
어젯밤의 통화 따위는 없었던 사람처럼.
그 모습에 하니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앉으세요.”
하니는 소파에 앉았다.
도혁은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
계약 종료 합의서였다.
하니는 서류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빨리 준비하셨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은 계약서의 조항을 짚어 가며 설명했다.
“현재까지의 추가 보수는 약정대로 지급하겠습니다. 계약 종료에 따른 불이익도 없습니다. 회사 업무와 관련된 고용 관계는 별개이므로, 계속 근무할 의사가 있다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돈 문제도, 회사 문제도, 계약 종료 절차도.
그는 하니가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하니는 이상하게 서러웠다.
“대표님.”
“네.”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도혁의 손이 멈췄다.
“무엇이 말입니까?”
“제가 떠나는 거요.”
하니는 애써 웃었다.
“어제는 같이 있어서 좋다고 하셨잖아요.”
도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니를 붙잡으면 안 됐다.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면 그녀는 상처받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사랑했던 은재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지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도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편안한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니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대답이에요?”
“…….”
“알겠어요.”
하니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괜히 물어봤네요.”
그녀는 펜을 들었다.
계약 종료 합의서의 마지막 장.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려던 순간이었다.
“윤하니 씨.”
도혁이 불렀다.
하니의 손이 멈췄다.
“네?”
도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말하면 됐다.
가지 말라고.
계약을 끝내지 말자고.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고.
당신이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가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지금처럼 근무해도 됩니다.”
하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사각.
펜 끝이 종이 위를 지나갔다.
윤하니.
그녀의 서명이 완성됐다.
도혁은 그 이름을 바라봤다.
종이 한 장에 적힌 세 글자.
어제까지만 해도 그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자신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질 것 같았다.
하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업무로 돌아가겠습니다.”
“……네.”
하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윤하니 씨.”
하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네, 대표님.”
도혁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끝내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도요.”
문이 닫혔다.
도혁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계약을 끝낸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밀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떠나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3. 민석의 마음
점심시간.
하니는 회사 근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시락은 열어 보지도 못했다.
계약 종료 합의서에 서명한 지 두 시간.
이제 서도혁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같은 건물에 머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와 함께 토스트를 먹을 이유도, 주말에 바다를 보러 갈 이유도 없었다.
“윤하니.”
고개를 들자 민석이 서 있었다.
“오빠?”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민석은 그녀 옆에 앉았다.
하니는 급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하지만 민석은 이미 알아차렸다.
“울었냐?”
“아니.”
“하니야.”
“진짜 아니라니까.”
민석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열지 못한 도시락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밥부터 먹자.”
“입맛 없어.”
“그래도 먹어. 네가 쓰러지면 내가 더 속상하니까.”
그 말에 하니의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오빠는…….”
“응.”
“왜 이렇게 잘해 줘?”
민석은 손을 멈췄다.
하니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나는 맨날 힘들다고 하고, 맨날 괜찮지 않고, 별것도 아닌 일에 울고…….”
“누가 별것도 아닌 일이래?”
“그냥…….”
“하니야.”
민석이 그녀를 바라봤다.
“너는 힘들어도 돼. 괜찮지 않아도 되고, 울어도 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네가 항상 웃는 게 아니야.”
하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힘들 때 나한테 기대도 된다는 거야.”
민석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하니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민석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 뒤, 하니가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 점심시간 다 갔네.”
“그런 말 하지 마.”
“……응.”
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어?”
하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민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니야. 내가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너, 그 사람 좋아해?”
하니의 손이 멈췄다.
바람이 불어 벤치 옆 나뭇잎이 흔들렸다.
하니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이 오랜만이라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그의 웃음이 좋았고,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게 좋았다.
그의 슬픔을 알고 싶었고, 그가 더는 혼자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랑일까.
하니는 작게 말했다.
“……모르겠어.”
민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오빠.”
“응?”
“나 진짜 바보 같지?”
“아니.”
민석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 게 바보 같은 일은 아니잖아.”
그 말을 하면서도 민석의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하니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도 있다는 것도.
그런데 막상 그 가능성을 마주하니 생각보다 아팠다.
민석은 오랫동안 하니의 곁에 있었다.
하니가 웃는 날에도, 우는 날에도.
누군가를 잃고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할 때에도.
자신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으면 적어도 그녀를 잃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하니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면.
자신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니야.”
“응?”
민석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널 울리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한테 와.”
하니가 작게 웃었다.
“당연하지. 오빠는 내 친구잖아.”
친구.
그 두 글자가 민석의 가슴을 조용히 찔렀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구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조금 아팠다.
4. 그 여자의 전화
오후 다섯 시.
도혁은 대표실에서 계약 종료 합의서를 다시 펼쳐 놓고 있었다.
서명은 이미 끝났다.
하니가 원한 대로 계약은 종료됐다.
그런데 그는 서류를 버리지도, 다른 곳에 넣어 두지도 못했다.
마지막 장에 적힌 그녀의 이름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윤하니.
그는 종이를 덮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서유진이었다.
도혁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도혁아,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없어.”
“아직 무슨 말인지 듣지도 않았잖아.”
“들을 필요 없어.”
전화기 너머로 유진이 작게 웃었다.
“그 여자와 끝났다는 이야기 들었어.”
도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누가 말했지?”
“그게 중요해?”
“서유진.”
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네가 하니에게 연락했어?”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나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을 뿐이야.”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그럼 너는 언제까지 숨길 건데?”
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언제까지 그 사람 이야기를 숨기고 살 거야? 도혁아, 넌 아직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결국 은재만 생각하고 있잖아.”
도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왜? 아직도 그 여자를 기다려?”
“그만해.”
“그럼 나한테 기회를 줘. 나는 네 옆에 있었어. 은재가 사라진 뒤에도, 네가 무너졌을 때도, 네가 누구도 믿지 못할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