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1
지은이 한용운 · 2026-08-25
“하여간 우리 운동을 이끌 자격이 있어. 저만큼 관찰이 빠르고 철저해야지.”
모두가 양장한 여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가운데, 파라솔을 짚은 여자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만 저런 여자라고 덮어놓고 배척할 수는 없지.”
“어째서?”
양장한 여자가 불쾌한 듯 되물었다.
“저런 일이라도 낡은 도덕이나 이른바 세상의 눈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제 자유로운 뜻으로 하는 일이라면,”
“저보다 더한 일을 한다 해도 상관없겠지. 그것 역시 개성을 펼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남편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하는 것도 좋고,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도 좋아.”
“이건 낡은 도덕이 말하는 정조 관념이라든지 남자들이 내세우는 절대복종의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제 자유로운 뜻으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그런 말이지.”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개성의 자유로만 한다면, 우리 운동을 위해 희생하는 것과 정신에서는 마찬가지거든.”
“그러니 저런 여자의 행동도 덮어놓고 무시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제법 융통성 있는 이론이었다.
“그야 그렇지. 그렇고말고.”
“시간적으로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고, 공간적으로 이른바 여론의 구속을 받지 않고,”
“오직 개성의 자유로 하는 일이라면 저런 일도 무방하다기보다 차라리 아름답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따위에게 개성이니 뭐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그저 들은 풍월로 인습에 끌려 노예처럼 하는 일이지.”
“아니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아편쟁이나마 내세워 그 핑계로 얻어먹으려는 수단인지도 모르지.”
“들으니 저 여편네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고, 아무 저항도 할 줄 몰라서 아무것도 모를뿐더러 못난이랍디다.”
“순전한 노예에게 개성의 자유가 다 무엇이야.”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언니는 당치도 않은 이론을 펴시는구려.”
“개발에 편자지, 저 따위에게 개성의 자유가 다 뭐람.”
“저런 것은 다 우리 운동의 좀이요 걸림돌이에요.”
“언니는 너그러움이 너무 많아요. 적어도 혁명가에게 용서는 금물이에요.”
“용서라는 것은 인도주의자나 타협주의자의 가면에 지나지 않거든요.”
“이런 이론도 변증법적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양장한 여자는 변증법 박사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며 변증법적임을 내세웠다.
“나도 저 여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이를테면 저런 행동이라도 개성의 발로라면,”
“그 행동 자체에 옳고 그름은 따질 수 있어도 우리 운동에 방해될 성질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저 여자도 그런 여자로구먼. 그렇지, 저런 여자야 학문이 없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
말하는 눈치가 이론에 졌다기보다 맞상대하기가 성가신 편이었다.
“그런데 저런 인간도 아무것도 몰라서 저런 노예적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른바 정조 관념이라는 건 있겠지?”
“그야 모르지. 정조 관념이 있고 없고야 사람마다 다르겠지.”
“아니야, 그래도 인습적으로 그런 관념은 있을 거야.”
“저 따위 인간이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이나 입센의 『인형의 집』 같은 것을 보았으면 어떨까?”
“그런 걸 이해할 수가 있나. 쇠귀에 경 읽기지. 그런 말은 비변증법적이야.”
그들은 차디찬 웃음을 웃었다.
순영은 그런 처지에 있느니만큼, 앞에서 쏟아지는 비방 뭉텅이를 목이 메도록 꿀꺽꿀꺽 삼키는 일이 날마다 있었다.
뒤에서 오가는 허튼 비평은 순영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스러지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비평이란 것이 순영의 형편과 속내를 사실대로 이해하고 바르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그 수많은 평판이 낱낱이 순영의 귀에 들어온다 한들, 그쯤은 일찍이 각오한 바였다.
자기 스스로도 어쩌려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그 행동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영은 그 여자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서늘한 바람을 쐬며 무슨 말인가를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짓기도 했다.
“아이구, 죽겠다.”
대철이 끝없이 내지르는 앓는 소리를 들을 때면 새삼 꿈에서 깬 것처럼 가슴이 섬뜩했다.
“왜 그러세요?”
순영이 돌아보았다.
“아이구, 죽겠다.”
그 소리가 아까보다 더 힘이 없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아픈 데도 없는데 기운이 자꾸 까라지는 것이, 아마 죽으려나 보오.”
“죽기는 왜 죽어요. 주사를 한 번 맞으실까요?”
“주사는 맞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보다 훌훌한 설렁탕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소. 설렁탕도 건더기는 말고 국물만.”
“그럼 설렁탕을 한 그릇 사 올까요?”
순영은 돈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그걸 또 어떻게 사 오겠소, 이 더운데.”
“어차피 죽을 놈이 그건 먹어서 무얼 하겠소. 그만두지. 공연히 순영 씨 수고만 더 시키고.”
대철은 먹을 것을 찾거나 주사를 놓아 달랄 때면 언제나 순영을 조르고 짜증만 내었다.
귀찮게 굴 뿐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여기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뜻밖에도 순영에게 미안한 말을 했고, 표정도 그러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잡숫고 싶으시면 사 오지요. 돈도 있어요.”
일어서면서도 순영은 전에 없던 대철의 말과 태도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순영 씨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한시바삐 죽어야 하겠고,”
“순영 씨가 나중에 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을 보려면 아무쪼록 병이 나아 오래 살아야 할 텐데,”
“이 세상에서야 순영 씨 신세를 갚을 수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