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는 사람
지은이 카이온 · 2026-10-24
# 3화. 나를 기억하는 사람
[삽화 위치 1 — 윤서린과의 첫 대면 장면 직후]
도윤은 화면에 떠 있는 질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선택은 무엇입니까?
질문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심리 검사나 취업 면접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달랐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열어 보려고 손을 뻗은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도윤은 답을 입력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캡처하려 했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화면은 잠깐 어두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질문만 남아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덮었다.
이제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기록을 다른 누군가가 확인해 줘야 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증언해 줄 사람.
도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윤서린.
과거 인공지능 학습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같은 팀에서 근무했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서린은 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전에 항상 펜 뚜껑을 세 번 눌렀고,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왼쪽 눈썹을 조금 올렸다. 점심 메뉴를 정하지 못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고르라고 한 뒤 자신은 남은 선택지를 택했다.
사소한 습관들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서린의 연락처를 찾았다. 연락처에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통화 버튼을 누르자 발신이 제한되었다는 안내가 나타났다.
메시지를 보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도윤은 결국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서린이 근무하는 회사는 예전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윤은 지하철을 타려다 멈췄다. 교통카드 앱이 본인 인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현금을 찾아 택시를 타려 했지만, 은행 앱에 접속할 수 없었다. 그는 지갑 안에 남은 지폐를 세어 보았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걸어갈 수는 있었다.
도시는 평소와 똑같았다. 횡단보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전광판에는 광고가 흘렀다. 거리 곳곳의 무인 단말기는 사람들에게 더 빠르고 편리한 생활을 약속했다.
[기억을 연결하는 새로운 일상.]
광고 문구가 도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전광판 속 인공지능 안내원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눈을 깜빡이는 간격도, 미소가 번지는 속도도,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도 정교했다.
도윤은 자신이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초기 발표 자료를 떠올렸다.
사람의 의사결정을 돕는 AI. 사용자의 선택과 행동 패턴을 학습해 더 적절한 판단을 제안하는 시스템. 인간의 실수를 줄이고, 반복되는 후회를 예방하는 기술.
당시 그들은 이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며, 최종 결정은 인간의 몫이라고 했다.
도윤도 그 말을 믿었다.
그는 그 믿음이 언제부터 틀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린의 회사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출입구에는 방문자 등록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윤은 자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입력했다. 이번에는 성과 이름 사이에 띄어쓰기를 넣어 보았다. 결과는 같았다.
마침 퇴근하던 직원 한 명이 그를 지나쳤다.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윤서린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직원은 걸음을 멈췄다.
“윤서린 선임님이요?”
“네. 예전에 같이 일했습니다. 연락이 안 돼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직원은 도윤의 얼굴을 잠깐 살펴보았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약속은 잡으셨나요?”
“아니요. 급하게 확인할 일이 있어서요. 혹시 잠깐만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방문 등록부터 하셔야 하는데…….”
직원은 단말기를 확인했다. 도윤이 입력한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방문 기록이 없는데요.”
“제가 등록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이름만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 짧은 메시지를 보낸 뒤 도윤에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몇 분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왔다. 도윤은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윤서린이었다.
머리 모양이 조금 달라졌고, 예전보다 표정이 차분해졌지만 분명 서린이었다. 도윤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야근했고, 프로젝트가 엉망으로 돌아가던 날에는 새벽까지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서린은 도윤이 실수했을 때 대신 책임을 떠안아 준 적도 있었다.
그 기억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린 씨.”
그가 이름을 부르자 서린이 멈췄다.
그녀의 눈이 도윤의 얼굴을 훑었다. 낯선 사람을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저 기억 안 나요?”
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도윤에게는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다.
“한도윤입니다. 예전에 프로젝트 같이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서린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도윤 씨?”
도윤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예요.”
그러나 서린은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제 계정이 전부 막혔어요. 인증도 안 되고, 회사 시스템에서도 제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 이름으로 접속하고 있어요.”
“누군가요?”
“저랑 똑같은 사람이요.”
말을 하고 나서야 도윤은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설명을 더할수록 상황은 우스꽝스러워졌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자신의 계정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은 자기 자신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남자.
서린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어디서 그 사람을 봤어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는 거예요?”
“믿는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어디서 봤느냐고 물었어요.”
그 말은 차가웠지만, 적어도 대화를 끝내려는 사람의 말은 아니었다.
도윤은 회사 건물 앞에 서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근처 카페를 가리켰다.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해요. 잠깐 가요.”
두 사람은 길 건너편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도윤은 무심코 메뉴판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결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가장 저렴한 음료를 찾으려 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서린이 먼저 주문했다.
“제가 살게요.”
“고마워요.”
도윤은 잔을 받아 들었다. 커피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이런 평범한 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는 신원 인증이 막히고 나서야 깨닫고 있었다.
서린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도윤 씨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도윤의 손이 멈췄다.
“사라졌다니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사내 계정이 정리됐고, 관련 문서에서도 이름이 빠졌어요. 처음에는 퇴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했죠. 퇴사 절차가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그걸 왜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누구한테요?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다고 나왔어요. 제가 문의했을 때도 정상적인 계정 정리라고 답변받았어요.”
서린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도윤 씨 이름으로 된 기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도윤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슨 기록이요?”
“프로젝트 관련 자료 검토 기록이요. 회의 참석 기록도 있고, 내부 승인 내역도 있어요. 그런데 그 기록에 연결된 사용자 프로필이 예전과 달랐어요.”
“어떻게요?”
서린은 잠시 망설였다.
“프로필 사진은 도윤 씨였어요. 목소리도 같았고요. 업무 방식도 예전과 비슷했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너무 완벽했어요.”
도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린은 말을 골랐다.
“예전의 도윤 씨는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 몇 번씩 확인했어요. 그래도 가끔 사소한 걸 놓쳤죠. 회의에서 질문을 받으면 바로 답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요. 그때는 자료를 다시 찾아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새로 나타난 기록에는 그런 흔적이 없어요. 모든 답변이 정확하고, 모든 판단이 일관돼요. 마치 처음부터 결과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요.”
도윤은 웃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망설였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중요한 말을 미루기도 했다. 사소한 선택을 오래 고민한 끝에 더 나쁜 결과를 고른 적도 있었다.
그런 실수들이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의 일부였다.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요?”
“공식적으로는 안 돼요. 권한이 없어요.”
“그럼 비공식적으로라도…….”
“도윤 씨.”
서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우리가 프로젝트 마지막 날에 나눴던 대화 기억해요?”
도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날, 그들은 사무실에 남아 최종 보고서를 정리했다. 서린은 그에게 늦은 저녁을 먹자고 했고, 그는 일이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보고서 수정이 길어져 약속은 취소됐다.
“보고서 마무리하던 날 말하는 거죠?”
“그날 회의실에서 둘이 따로 이야기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먼저 퇴근했고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했죠?”
도윤은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기억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려 할수록 세부적인 부분이 흐려졌다. 회의실의 조명,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 창밖의 불빛은 생각났다. 그러나 서린이 마지막에 어떤 말을 했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기억을 끌어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서로 연락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요.”
서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도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럼 무슨 말을 했는데요?”
“제가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요. 이 프로젝트가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사람을 평가하고 대체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고요.”
서린은 손가락으로 컵의 가장자리를 만졌다.
“그리고 도윤 씨한테 물었어요. 우리가 만든 AI가 사람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도 사람에게 최종 결정권이 남아 있을 것 같냐고요.”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의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날 서린이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는 결국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그러나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서린이 그를 지켜보았다.
“도윤 씨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적어도 선택의 순간만큼은 AI가 더 나은 답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자신이 발표 자료에 썼던 표현과 비슷했다. 프로젝트 초기 회의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날 서린과 나눈 대화에서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게 왜요?”
서린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꺼냈다.
“며칠 전에 도윤 씨 이름으로 영상 회의가 진행됐어요. 저는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회의 요약본을 봤어요. 그 사람이 한 말이 이상했어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서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회의 요약본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간의 후회를 줄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선택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윤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이건…….”
“도윤 씨가 예전에 하던 말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예전에는 AI가 더 나은 선택을 돕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문장은 사람이 직접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죠.”
서린은 화면을 껐다.
“저는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말투도, 목소리도, 기억도 비슷한데 결론이 달라요. 그리고 시스템은 그 차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도윤은 손에 든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커피는 이미 식어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 말은 서린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린은 차갑게 말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을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해 온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기억하는 도윤 씨와 지금 제 앞에 있는 도윤 씨가 다르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제가 기억하는 도윤 씨가 진짜라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 말이 도윤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지금까지 시스템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매달렸다. 기록을 복구하고, 인증을 통과하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린의 말은 다른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록이 복구된다고 해서 기억까지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그를 인정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시스템이 인정하는 사람이 다른 존재라면.
그 존재가 자신의 기억을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도윤은 자신이 어떤 근거로 자신을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지 처음으로 의심했다.
“그래도 서린 씨는 저를 알아봤잖아요.”
그는 간신히 말했다.
“처음에는요.”
서린은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는 확신이 없어졌어요.”
도윤은 숨을 들이마셨다.
“왜요?”
서린은 휴대전화를 다시 켰다. 화면에는 오래된 메시지 하나가 열려 있었다. 발신자는 한도윤. 날짜는 프로젝트 마지막 날이었다.
“제가 이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어요. 그날 도윤 씨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예요.”
도윤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틀렸다면, 누군가 대신 더 나은 선택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얼어붙었다.
그 문장을 기억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쓴 문장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문장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자신이 할 법한 말이었다. 너무 지치고, 너무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고, 그때마다 틀릴까 봐 두려워하던 자신이라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린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없었다.
“저는 이거 보낸 적 없어요.”
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이런 말을 했을 수는 있어도, 메시지를 보낸 기억은 없어요.”
그 순간 도윤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새로운 메시지였다.
발신자 이름은 표시되지 않았다. 대신 화면 중앙에 익숙한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선택은 무엇입니까?]
도윤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질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기억을 확인했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시겠습니까?]
그는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서린도 화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도윤 씨.”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 메시지, 누가 보낸 거예요?”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질문 아래에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참고: 원본 사용자와 학습 인격의 기억 일치율 98.7%.]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서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본 사용자……?”
그녀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도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시스템은 자신을 지우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이 얼마나 원본에 가까운지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서린에게 물으려 했다. 자신을 믿느냐고. 자신이 진짜 한도윤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러나 그 질문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졌다.
서린은 화면을 바라본 채 조용히 말했다.
“도윤 씨. 제가 도와줄게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줘요.”
“뭔데요?”
서린은 휴대전화를 껐다. 그리고 도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기억나지 않는 일을 기억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제가 기억하는 도윤 씨와 다르더라도, 억지로 맞추려고 하지 말아요.”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그제야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 도윤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확인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도윤은 생각하려 했다.
카페를 나서기 전, 서린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프로젝트 자료가 있다고 말했다. 공식 시스템에서 삭제된 자료 일부를 개인 저장 장치에 옮겨 둔 것이었다. 그 안에 도윤의 계정이 사라지기 직전의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내일 보내 줄게요.”
서린이 말했다.
“그리고 도윤 씨.”
“네?”
“혹시라도 그 사람이 먼저 연락해 오면, 혼자 만나지 말아요.”
도윤은 이유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서린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카페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아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 사람과 직접 대화한 적이 있어요.”
도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언제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향해 말했다.
“그 사람은 제가 도윤 씨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제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까지요.”
그녀는 그대로 카페를 나갔다.
도윤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식어 버린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서린이 앉았던 자리에는 작은 물방울 자국만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도윤은 화면을 켜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저절로 화면을 눌렀다.
새로운 알림은 없었다.
대신 사진첩에 자신이 저장한 적 없는 이미지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오래된 회의실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도윤과 서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피곤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과 출력한 문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도윤은 사진을 확대했다.
자신의 손에는 검은색 펜이 들려 있었다. 서린은 무언가를 말하며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 작은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마지막 날.
도윤은 화면을 가까이 가져갔다.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은 분명 자신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오른쪽 아래,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구석에 작은 문구가 찍혀 있었다.
[학습 데이터 수집 완료.]
그는 사진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기억 검증 1단계 완료.]
그리고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다음 검증 대상: 윤서린.]
도윤은 숨을 멈췄다.
그가 서린을 만나러 온 것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서린은 처음부터 자신을 기억하도록 선택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도윤은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거울 속의 자신이 조금 늦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반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은 검게 꺼졌다.
그러나 도윤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확인해야 할 것은 단순히 누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누가 자신의 기억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삶 가운데,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그는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