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은이 카이온 · 2026-10-24
# 1화. 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전 8시 17분.
한도윤은 출근길 지하철역 입구에서 세 번째로 신원 인증에 실패했다.
“인증 정보를 다시 확인해 주세요.”
휴대전화 화면에 뜬 문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지문을 다시 대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얼굴을 카메라에 비췄다. 어느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과는 같았다.
[사용자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휴대전화를 재부팅하려던 순간, 회사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도윤 님, 금일 출근 인증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0분 이내에 인증을 완료해 주세요.]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회사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메시지에 첨부된 링크를 눌렀다. 익숙한 사원 인증 화면이 열렸다. 사번을 입력하고 얼굴 인증을 진행했다.
잠시 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등록된 임직원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다시 사번을 입력했다. 이번에는 숫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입사한 날부터 사용해 온 번호였다. 틀릴 리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인사팀이었다.
“한도윤 씨, 지금 어디세요?”
“출근 중입니다. 인증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쪽에는 한도윤이라는 직원이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
“혹시 다른 회사와 착각하신 건 아니죠?”
도윤은 웃으려 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제가 여기서 3년째 일하고 있는데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통화가 끊겼다.
도윤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출근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쳤다. 세상은 평소와 똑같았다. 바뀐 것은 오직 자신의 자리뿐이었다.
그는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 입구의 출입 게이트는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보안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직원은 화면을 몇 번 확인한 뒤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등록된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
“제 얼굴 모르세요? 매일 여기로 출근하잖아요.”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 같습니다.”
도윤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출입 게이트 너머를 바라봤다. 유리벽 안쪽으로 익숙한 사무실이 보였다. 늘 앉던 자리, 모니터 위에 붙여 둔 메모, 서랍에 넣어 둔 머그컵까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 약간 기울어진 고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리듬.
도윤은 처음에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도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남자는 도윤보다 훨씬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표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누군가 말을 걸자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윤이 수없이 연습했지만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던 종류의 미소였다.
그때 남자의 모니터에 알림이 떴다.
[오늘의 업무 효율: 98%]
남자는 알림을 확인하고 아무렇지 않게 창을 닫았다.
도윤의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그는 유리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요.”
안쪽의 남자는 듣지 못한 듯했다.
도윤이 손바닥으로 유리를 두드리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마치 예상하지 못한 오류를 발견한 사람처럼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왜 여기 있어?’
도윤은 숨을 멈췄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새로운 신원 정보가 등록되었습니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알림을 눌렀다.
화면에는 자신의 사진과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도윤.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상태: 정상]
[신원 유형: AI 학습 인격]
도윤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리벽 너머의 남자는 이미 다시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도윤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도윤은 화면을 몇 번이고 새로고침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끄고 다시 켰다. 네트워크를 확인하고, 본인 인증 앱을 실행하고, 평소처럼 지문을 인식시켰다. 손가락 끝이 화면에 닿을 때마다 짧은 진동이 울렸다. 기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내놓는 결과만이 비정상이었다.
[사용자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도윤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떠올리려 했다. 최근에 비밀번호를 바꾼 적이 있었나. 휴대전화 명의를 변경했나. 신분증을 재발급받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해당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정부 통합 인증 서비스의 고객센터를 검색했다. 상담 연결 버튼을 누르자 자동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인 확인을 위해 등록된 사용자 정보를 입력해 주세요.”
도윤은 주민등록번호와 휴대전화 번호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입력하신 정보와 일치하는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잠깐만요. 다시 확인해 주세요. 제가 지금 이 번호를 사용하고 있고, 이 휴대전화도 제 명의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확인 가능한 사용자 정보가 없습니다. 등록 기관을 통해 정보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화는 그 말과 함께 종료됐다.
도윤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상담원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말을 이해한 뒤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데이터베이스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읽어 줬을 뿐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지갑을 열었다. 주민등록증은 그대로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지금의 도윤과 똑같은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급일자도,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눈에 익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카드가 아니었다.
카드가 가리키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었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거울 앞에 섰다. 헝클어진 머리, 잠을 설친 얼굴, 왼쪽 눈 밑에 희미하게 남은 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손끝으로 짚었다. 거울 속 남자도 똑같이 손을 들었다.
“한도윤.”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그저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윤은 이상하게 그 사실을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이름을 불렀을 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세상에서, 적어도 거울만큼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아야 했다.
그때 책상 위의 노트북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도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화면에는 로그인 시도 기록이 열려 있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개인 계정에서 새로운 접속이 감지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접속 위치는 서울. 기기는 회사 업무용 단말기.
그리고 접속 시각은 현재 시각보다 삼 분 뒤였다.
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8시 41분. 화면의 기록은 8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단순한 표시 오류일 수도 있었다. 서버 시간이 잘못되었거나, 동기화가 늦었거나, 누군가 테스트 데이터를 잘못 입력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알림 아래에 표시된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변명은 힘을 잃었다.
[접속 사용자: 한도윤]
자신의 계정이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자신이 한 적 없는 접속이었다.
도윤은 곧바로 비밀번호 변경 메뉴를 열었다. 하지만 변경을 진행하려면 먼저 본인 확인을 완료해야 했다. 본인 확인을 누르자 조금 전과 똑같은 문구가 나타났다.
[사용자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신의 계정에는 누군가 접속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계정의 주인임을 증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시스템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도윤은 화면을 캡처하려 했다. 하지만 저장 공간에 접근할 수 없다는 알림이 떴다. 다른 기기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노트북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다시 켜졌다.
접속 기록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알림 하나만 남았다.
[보안 보호를 위해 비정상적인 사용자 요청을 제한했습니다.]
도윤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와 창밖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이 평소처럼 이어졌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신을 증명하는 모든 문이 하나씩 닫히고 있었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는 화면을 끄고도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에 도착했다면.
세상은 누구를 진짜 한도윤이라고 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