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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의 할아범

지은이 받아적는사람 · 2026-10-22

정원사는 황태자궁 지하 창고에 묶여 있었다. 기름통 마흔 개가 쌓인 바로 그 창고였다.

창고 안은 기름 냄새로 숨이 막혔다. 통마다 북문 수비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보름쯤 전 붙박이 짐꾼들이 품삯 두 배를 받고 나른 통들이었다.

그 옆에 밧줄에 묶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손바닥 굳은살이 칼자루 쥐는 자리에 박여 있었다.

"이름."

카시안이 물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등잔을 내려놓고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남부 사람이죠."

사내의 눈이 움직였다.

"말끝이 올라가요. 우리 오빠들이 남부 항구로 일하러 갔는데, 편지 쓸 때 꼭 그렇게 써요."

"……오빠들이 항구에서 일해?"

"네. 둘 다요."

사내가 한참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요하네스. 남부 소금밭에서 올라왔어. 빚이 금화 열둘이야."

"누가 시켰어요?"

"몰라. 진짜 몰라."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열흘 전에 셋방 문 밑으로 봉투가 들어왔어. 금화 두 닢이랑 그 종이. 그리고 쪽지가 한 장. 종이에 적힌 대로 하면 열 닢을 더 준다고."

"쪽지는요?"

"태웠어.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었거든."

카시안이 팔짱을 꼈다.

"종이에 적힌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나."

"글을 몰라요, 전하. 옆방 대서소 영감한테 읽어 달라고 했어요. 은화 한 닢 주고."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영감이 그러더라. 이거 건너온 이들 책에 나오는 문장 같다고.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원래 일어날 일이니까."

창고가 조용해졌다.

원래 일어날 일이니까. 손님들 식탁에서 백 번은 들은 말이었다. 붙박이 입에서 나오는 건 처음 들었다.

요하네스의 주머니에는 금화 두 닢과 숫돌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요하네스의 손목을 봤다. 밧줄 자국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금화 두 닢. 마르코 집에서 쫓겨난 날 셋방 문 밑으로 그게 들어왔다면, 나도 종이에 적힌 대로 했을지 모른다.

* * *

창고를 나와 계단을 오르며 카시안이 말했다.

"요하네스는 내가 데리고 있지. 근위대에 넘기면 다음 날 목이 없어."

"고발 안 하세요?"

"고발하면 뭐라고 하지. 원작대로 칼을 든 붙박이를 잡았다고? 근위대장이 제일 먼저 물을 거다. 어떻게 미리 알았느냐고."

"……그렇네요."

계단 중간에서 그가 멈췄다. 품에서 그 종이를 꺼내 등잔에 비췄다.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 종이가 백 년 됐는데 잉크가 새것처럼 검어."

나도 들여다봤다. 맞는 말이었다. 종이가 누렇고 부스러지는데 글씨는 어제 쓴 것처럼 까맸다.

"백 년 된 종이가 어디 있어요? 이런 거요."

"황실 기록고. 정확히는 옛 기록고." 그가 종이를 접었다. "첫 비 뒤에 황실이 그 건물을 건너온 이들한테 내줬지. 지금 이름은 등록소야. 오래된 종이가 다 그 지하에 있다더군."

"그럼 제가 갈게요."

"내가 등록소 지하에 내려가면 다음 날 수도가 다 알아."

"그러니까 제가 간다고요. 뒷문으로요."

카시안이 나를 봤다. 어제부터 그는 이렇게 보는 일이 잦았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아보려는 눈.

"뒷문이 있나."

"이 도시 건물은 다 있어요."

"등록소엔 붙박이 출입 금지 동판이 붙어 있을 텐데."

"정문에요. 하인은 뒷문 이용이라고 밑에 적혀 있어요. 그 뒷문이요."

카시안이 종이를 내게 건넸다. 손끝이 잠깐 닿았다.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해 지기 전에 돌아와. 해 지면 도라가 퇴근하면서 뒷골목을 돌아."

"그걸 어떻게 아세요?"

"노라가 알려 줬지." 그가 계단을 마저 올랐다. "너한테 배웠어. 아래층에 물으면 된다고."

* * *

등록소 뒷문은 쓰레기 수레가 드나드는 골목 끝에 있었다. 베르타 아줌마의 사촌의 시누이가 거기서 걸레를 빨았다.

"지하 서고? 할아범한테 가려고?"

"할아범이요?"

"이름은 아무도 몰라. 우리 할머니 때부터 거기 있었다는데." 아낙이 걸레를 비틀었다. "붙박이야. 건너온 이들은 서고에 안 내려가. 원작에 서고 얘기는 안 나온대."

동판을 안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복도는 축축했다. 왼쪽으로 쇠창살 방이 늘어서 있었다. 구금실이었다. 세 번째 창살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재봉사였다. 셔츠 바람으로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1급 나리가 여긴 웬일이에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시험 날 대기실에서보다 더.

"서고에 가요."

"판결이 또 밀렸대요. 교수대가 꽉 차서. 이번 달에도." 재봉사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리는 어떻게 붙었어요? 같은 책 외웠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장미가 아니었대요. 금색 가시래요. 여기 간수가 알려 줬어요. 일주일 늦게."

그가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 앞을 지나갔다. 다섯 걸음쯤 가서 돌아섰다.

"담요 있어요?"

"……없어요."

"갖다 달라고 할게요."

재봉사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복도 끝에 낮은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 냄새가 쏟아졌다. 위층 등록소보다 진하고 오래된 냄새였다.

서가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칸마다 묶음 끈이 삭은 장부가 꽂혀 있었다. 바닥에는 미처 꽂지 못한 종이 뭉치가 무릎 높이로 쌓였다. 위층 등록소에서는 매일 새 종이가 쏟아지는데 여기에는 새 종이가 한 장도 없었다.

그 사이 작은 책상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등이 굽고 머리가 하얗게 샜다. 손가락 끝마다 오래된 잉크 물이 들어 있었다.

"뒷문으로 왔군."

노인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아세요?"

"정문으로 온 사람은 여기까지 안 내려와." 그제야 노인이 나를 봤다. "1급이 뒷문으로 오는 건 처음 보네."

"할아범이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지." 노인이 의자를 하나 밀어 주었다. "무슨 일인가."

"구금실 세 번째 방에 담요 좀 넣어 주실 수 있어요?"

노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걸 물으러 왔나?"

"아니요. 그건 오는 길에 생긴 일이에요."

노인이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넣어 주지. 그래, 본론은."

나는 종이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노인은 종이를 손으로 들지 않았다. 등잔을 가까이 끌어와 오래 들여다봤다.

"가시 없는 장미. 백 년 전 황실 종이야."

"이 서고에도 있어요?"

"산더미지." 노인이 뒤쪽 서가를 턱으로 가리켰다. "백 년 전 장부, 백 년 전 편지. 전부 빈 데 없이 썼지."

"그럼 이 문장은요? 건너온 이들이 원작이라고 부르는 책 문장이에요. 그 책은 23년 전에 생겼다는데요."

"책이 생긴 날이랑 사람들이 읽기 시작한 날은 다르지."

"무슨 뜻이에요?"

노인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글씨를 짚었다. 종이에 닿지 않게, 한 뼘 위에서.

"잉크가 검지."

"네. 새것처럼요."

"글씨는 종이보다 오래 살아. 아직 안 끝난 글씨는 더 그렇고."

등잔 불꽃이 흔들렸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적고 싶었다. 손이 펜을 찾았다.

"자네는 그 책 읽었나?"

노인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3권 중반까지요."

"그래?"

"등불 축제 다음 장에서……."

"뒷문으로 들어온 1급이 3권 중반까지 읽었다." 노인이 천천히 따라 했다. 내 말투를 흉내 낸 건 아니었다. 그냥 들은 걸 한 번 더 놓아 보는 소리였다. "그럼 됐네."

"할아범."

"읽지 마라."

노인이 등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앞으로도 읽지 마. 남이 읽어 주는 걸 듣는 건 괜찮아. 자네 눈으로는 읽지 마."

"왜요?"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 쓰는 사람은 사라지는 법이지."

그가 종이를 접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어서다가 하나만 더 물었다.

"이 종이를 어디서 났느냐고는 안 물으세요?"

"알아서 뭐 하게." 노인이 다시 장부로 고개를 숙였다. "이 서고에서 나간 종이가 어디로 가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 말을 머릿속 공책에 적었다. 「할아범. 아직 안 끝난 글씨. 읽지 마라.」

적고 나서 이상한 걸 알았다. 노인은 내게 단 한 번도 「원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책」이라고 했다. 붙박이들이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입에서 나오면 그 말이 제 물건 이름처럼 들렸다.

구금실 앞을 다시 지났다. 세 번째 창살 안에 아직 담요는 없었다. 재봉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였다.

* * *

뒷계단을 올라 골목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어 있었다.

"1급이 뒷계단으로 다니네."

골목 입구에 검은 외투가 서 있었다. 검은 장갑, 금색 가시 열쇠.

도라였다.

"……소장님."

"쓰레기 수레 골목은 등록소 직원도 잘 안 다녀." 도라가 걸어왔다. 구두 소리가 돌바닥에 또박또박 울렸다. "지하엔 뭐 하러 갔어?"

"구금실이요. 시험 날 옆자리였던 사람이 있어서요."

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갑 낀 손가락으로 외투 단추 하나를 풀었다가 다시 채웠다.

"재무청 차관 서기한테, 차관이 회의에서 들은 네 원작 얘기를 받아 적게 했어. 열흘 치."

등이 굳었다.

"북부 얘기는 군대 말투야. 황녀궁 담 얘기는 귀부인 말투고. 공증 서류 얘기만 나오면 웅얼거려." 도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사람이 읽은 책 같지가 않아. 여럿이 술자리에서 떠든 책 같아."

"……제가 원래 말투가 잘 바뀌어서요."

"그래? 나는 남의 문장 버릇을 오래 봤어. 버릇은 잘 안 바뀌어. 나도 못 고친 게 있거든."

"……."

"그리고 오늘 편지가 한 통 왔어." 도라가 외투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마르코 상단 서기래. 테오라던가. 배정표에서 네 이름을 봤대."

봉투 겉면에 반듯한 글씨가 있었다. 「1급 이렌 보르에 관하여」.

"1급 이렌 보르는 지난달까지 마르코 상단의 붙박이 하녀였다. 10년 동안 상단주와 손님들이 하는 원작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도라가 편지를 소리 내 읽었다. 그리고 접었다. "잘 쓴 편지야.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어."

어금니가 저절로 맞물렸다. 턱 끝이 저렸다.

"늦깎이는 원래 붙박이 몸에서 깨잖아. 하녀였던 건 죄가 아니지." 도라가 봉투를 다시 넣었다. "근데 깬 날짜가 궁금해졌어. 하녀 일을 하면서 깼는지, 하녀 일을 하면서 받아 적었는지."

"……."

"내일 오후 세 시, 소장실." 도라가 돌아섰다. "마르코 상단주도 불렀어. 10년 같이 산 사람 얼굴 보고 얘기하자."

구두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벽에 등을 붙였다. 내일 그 방에 들고 갈 패가 하나도 없었다.

벽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황태자궁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