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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2호 (3)

지은이 기니피그군 · 2026-10-22

# 003. 2호 (3)

란데가 암살자들을 응시했다.

“천한 너희들에게 베풀 수 있는 내 마지막 자비였다. 마음껏 먹고 마신 후에, 약에 취해 잠들어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 내 마지막 자비였단 말이다. 그냥 내 자비를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내 마지막 자비를 걷어차 편안한 죽음을 거절하는구나.”

“편하게 죽든, 불편하게 죽든. 어쨌든 죽는 건 죽는 거네. 개소리하지 마라, 란데.”

8호가 으르렁거리며 란데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 8호와 잠시 눈을 맞추던 란데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가 발악해봤자 너희의 최후는 정해져 있다. 황제 폐하께서 죽으라고 하셨으니, 너희는 결코 살아서는 안 된다. 그래, 8호. 편하게 죽는 것을 거절했으니, 네 말대로 불편하게 죽도록 하거라.”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란데가 등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걷는 길에는 총 17명의 기사가 각자 자신의 병장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베인 공작가의 기사단이었다. 란데는 그들을 한 명씩 지나쳐가며, 이내 가장 끝에 서 있던 기사마저 지나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 죽여라.”

주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제 무기를 뽑아들며 다섯 암살자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히죽거리며 웃고 있기까지 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다섯 암살자는 그저 몸집 작은 아이들에 불과했다. 공작가의 지하에서 기어 나온, 이름도 없는 천한 고아들.

“어이, 꼬맹이들. 순순히 목 내밀면 한 번에 끝내 주마.”

“저 계집애는 내가 맡지. 독인지 뭔지 쓴다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2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들의 숫자와 위치, 무기와 갑옷의 이음매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열일곱. 충분했다.

“우리도 간다.”

2호의 말에 다섯 암살자도 동시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두 집단이 서서히 서로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때,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기사들 쪽이었다.

기사 중 가장 앞에 나와 있던 한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검이 향하는 목표는 마찬가지로 암살자 중에서 가장 앞에 나와 있던 2호의 목이었다.

깡-

2호가 단검을 들어 제 목을 보호했다. 단검에 막힌 기사의 장검은 그대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이내 다시 위로 들어 올려지며 2호의 복부를 향해 내질러졌다.

동시에 다른 기사들과 암살자들도 전투를 시작했다. 고요했던 일대가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로 채워져 갔다.

소음 가득한 공간에서, 2호가 자신을 향해 공격을 가하는 기사를 응시했다. 그는 2호에게, 아니 이곳에 있는 암살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인물이었다.

익숙한 인물이지만 2호는 그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암살자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 있다. 2호는 자연스레 그 호칭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그를 불렀다.

“교관.”

“교관님이겠지, 이 건방진 새끼야.”

교관이라 불린 기사가 씨익 미소지으며 2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2호는 단검을 휘두르며 때로는 그의 검을 막아냈고, 막을 수 없는 공격은 회피하며 대응했다.

기사의 정체는 교관. 암살자들이 아직 황제의 그림자로 불리기 전, 아주 어린 꼬마였던 시절의 그들을 훈련시킨 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육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이 건방진 새끼들. 너희는 내가 진작 알아봤어. 언젠가 공작님과 황제 폐하께 검을 들이밀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 천한 핏줄이 어디 가겠어?”

“….”

“뭐, 그래도 고맙다고는 해주마. 언젠가는 꼭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줘서 말이야. 덕분에 너희를 내 손으로 죽여버릴 수 있게 됐구나.”

교관은 암살자들을 훈련시켰지만, 교육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란데의 명에 따라 강제로 암살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을 뿐이니까.

그런 그에게 교육에 대한 열의 따위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교관은 이전부터 저가 가르치는 암살자들을 향해 이유 없는 악의를 표출하곤 했었다.

“교관.”

“뭐냐.”

“네 손에 죽은 녀석들이 몇인 줄 아나.”

“알 게 뭐야, 이 새끼야!”

교관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2호가 단검을 들어 올려 그 검을 막아냈으나, 저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교관의 힘에 밀려 몸이 살짝 떠올랐다.

교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2호가 단검을 회수하며 그 공격을 막아냈으나, 이번에도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뒤로 크게 밀려났다.

‘내가 이긴다.’

교관은 확신했다. 2호는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다.

‘하긴, 나한테 배운 놈이 나를 넘어설 수 없겠지.’

하지만 교관은 모르고 있었다. 밀려나는 2호의 발끝이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2호의 눈이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됐든 교관은 2호를 가르쳤다. 그렇기에 제가 가르친 제자에게 당하는 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감에 가득 찬 교관이 검을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친 채 2호에게 접근했다. 2호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쉰 명.”

“뭐?”

“네 손에 죽은 녀석들의 숫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이들은 모두 어린 나이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성인 남성의, 그것도 기사라는 직업을 가질 정도로 완력이 강한 교관의 이유 없는 악의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교관은 기분에 따라 암살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을 죽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암살자들은 그저 한 마리의 벌레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훈련 과정에서 백 명의 암살자 중 일곱 명이 도망치다 죽었다. 그리고 스물세 명은 모진 훈련 속에서 죽어갔다. 마지막으로 쉰 명은 교관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죽었다.

폭행의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어떤 날은 부인에게 화가 났다며 어린 암살자를 폭행해 죽였다. 어떤 날은 도박에서 돈을 잃었다며 어린 암살자를 폭행해 죽였다. 또 어떤 날은 그저 심심하다며 어린 암살자를 폭행해 죽였다.

그렇게 교관의 손에 어린 암살자들이 하나하나 죽어갔고, 황제의 그림자가 결성될 무렵에는 총 쉰 명의 암살자가 그의 손에 의해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2호는 그 쉰 명의 얼굴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2호와 같은 날 이곳에 끌려온 아이였다. 주근깨투성이에 겁이 많던 꼬마. 배식이 모자라던 날이면 제 몫의 빵을 반으로 갈라 2호에게 내밀던 아이였다. 자기는 배가 작아서 이것만 먹어도 배부르다며, 헤헤 웃으면서.

그 아이는 교관의 술잔을 엎었다는 이유로 죽었다. 밤새 맞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다음 날 아침, 그 아이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그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날 열한 살의 2호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2호의 말에 교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쉰 명 밖에 안 죽였다고? 더 죽인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구나. 그러면.”

교관이 2호를 향해 장검을 내밀었다.

“오늘로써 쉰한 명이 되겠구나.”

말을 마친 교관이 동시에 2호에게 달려들었다. 2호는 제자리에 선 채,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교관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2호의 눈. 그 안에는 희미하지만 분노가 담겨있었다.

이윽고 2호가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했나. 나야말로 고맙다.”

“…!”

일순간 2호가 사라졌다. 2호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교관이 멈칫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윽고 2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를 놓고 갈 뻔했어. 그러면 안 됐는데.”

2호의 목소리는 교관의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낀 교관이 황급히 뒤로 돌려고 할 때였다.

“어?”

교관의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마치 세상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교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의식이 툭 끊겼다.

툭-

교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머리를 잃은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제 머리가 굴러다니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무렇지 않게 교관을 베어낸 2호를 향해 두 명의 기사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2호는 그저 덤덤하게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2호가 두 기사를 지나쳤을 때.

툭- 툭-

두 기사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교관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세 기사를 처리한 2호가 고개를 들어 제 동료 암살자들을 응시했다.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2호를 제외한 네 명의 암살자는 이미 란데의 기사들을 전부 처리한 상태였고, 그들의 시체 위에 서서 2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2호가 교관을 상대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기사들은 처음부터 진형을 짰다. 셋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씩 몰아넣는, 정석적인 포위였다. 상대가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면 분명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한 것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7년 동안 오직 사람을 죽이는 법만을 배워 온 아이들이었다.

10호는 포위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걸어 들어가 방패째로 기사를 내리찍었다. 그 틈에 4호가 기사들의 등 뒤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어 갑옷의 이음매만을 골라 찔렀다. 8호는 일부러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시선을 끌었고, 그사이 7호의 유리병이 기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말은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필요 없었다. 수많은 임무를 함께하며 몸에 새겨진 호흡이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군.’

10호가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저 정도의 상처는 그에게 있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2호는 안심하며 암살자들을 지나쳐 란데의 앞에 섰다.

란데가 저보다 키가 큰 2호를 올려다보았다. 2호 또한 란데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기사들도 다 처리할 생각이었나.”

“맞다.”

란데는 부정하지 않으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호의 시선이 란데를 넘어 그 뒤에 있는 것에 닿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여러 구의 시체들이 쌓여있었다. 평소 암살자들이 복귀할 때 문을 열어주거나, 아까처럼 암살자들에게 음식 등을 건네주는 베인 공작가의 고용인들이었다.

2호는 그중 몇몇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딱딱한 빵을 문 앞에 놓고 가던 늙은 하인. 임무에서 돌아올 때마다 말없이 문을 열어주던 문지기. 그들은 암살자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암살자들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도 7년이었다. 7년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이들이었다.

“고용인들까지 죽인 건가.”

물음에 란데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너희의 존재를 지우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희의 존재를 아는 녀석들을 살려둘 수 없지.”

란데는 황제에게 충성한다. 저를 향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저를 위해 헌신하는 고용인들까지 모두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란데가 황제의 오른팔이자, 현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비결이었다.

지금의 싸움도 전부 예정된 것이었다. 기사들은 암살자들을 무시했다. 그렇기에 본인들만으로도 암살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란데는 알고 있다. 제 기사들은 암살자들, 그것도 보통 암살자가 아닌 황제의 그림자를 당해낼 수 없다.

그 사실을 암에도 불구하고 란데는 제 기사들을 황제의 그림자 앞에 내놓았다. 그들이 전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 말은 즉, 그는 처음부터 황제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있는 제 기사들도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

“특히 저 녀석들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2호가 단검을 움켜쥐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열 살의 자신을 고아원에서 사 온 남자. 백 명의 아이들을 이 지옥에 밀어 넣은 남자. 그의 시선이 란데의 목덜미에 닿았다. 순식간에 그의 목덜미를 그어 교관이나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와 몸을 분리시켜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2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란데는 영악한 자로, 암살자들이 얌전히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제 기사들이 암살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함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또한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란데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못지않게 제 목숨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이다.

“그런 내가 아무런 대비 없이 이렇게 있을 거로 생각하나.”

란데의 말과 동시에 2호가 단검을 휘둘렀다. 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는 단검이 란데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란데의 목에 닿을 리는 없었다.

깡-

란데의 목을 향해 날아가던 단검이 장검에 가로막혔다. 2호가 제 검을 막은 이를 응시했다.

아니, 응시하려고 할 때였다.

퍽-

“흡!”

2호가 복부에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은 강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2호!”

밀려나는 2호를 다른 암살자들이 부축했다.

2호가 제 배를 움켜쥐며 저를 걷어찬 이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황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2호의 눈이 갑옷의 오른쪽 가슴에 닿았다. 그곳에는 제국의 상징인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2호는 저 갑옷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저 갑옷을 입을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제국에 단 열 명. 황제가 직접 골라 뽑은, 제국 최강의 기사들.

배를 움켜쥔 2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7년 동안 수많은 이들을 상대해 왔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이런 고통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황제의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