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10화. 장부를 보여 주세요

지은이 외인 · 2026-10-17

새벽 훈련은 계단 두 층으로 끝났다.

율리안이 구령을 멈추고 회중시계를 보더니, 기록지를 니나에게 넘겼다. 그 얼굴에 자랑스러움과 서운함이 반씩 섞여 있었다. 신병이 너무 빨리 자라 버린 교관의 얼굴이었다.

율리안: 이대로면 다음 평가는 4단계야. 정원.

레티시아: 정말요?

율리안: 다음 평가 때. 아직은 아니야.

그때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났다. 규칙적이고, 조용하고,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

그레고르였다. 검은 연미복,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흰머리. 그는 계단 아래에서 율리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레고르: 도련님. 아가씨를 잠시 모셔도 되겠습니까. 정원 벤치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율리안이 눈을 끔뻑였다.

율리안: 정원? 레티는 아직 3단계인데.

그레고르: 제가 곁에서 걸음을 세겠습니다. 숨이 차시면 그 자리에서 업고 돌아오겠습니다.

예순여덟 살 노인이 업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율리안은 집사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서 그레고르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원은 보름 전과 같았다. 이슬 젖은 잔디, 장미 덤불, 물안개 깔린 연못.

다른 것은 그녀의 다리였다.

레티시아는 지팡이를 짚고 잔디밭으로 내려섰다. 그레고르는 반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입속으로 걸음을 세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장미 덤불 옆을 지났다. 보름 전, 스물다섯 걸음째에 무릎이 꺾였던 자리였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서른두 걸음. 연못가의 돌 벤치에 손이 닿았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앉았다. 돌이 차가웠다. 숨이 조금 찼지만, 그건 등산로 첫 고개를 넘었을 때의 기분 좋은 숨이었다.

레티시아: 보름 전에는 저 덤불까지였어요.

그레고르: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들것을 불렀으니까요.

그레고르는 벤치 옆에 섰다. 앉으라고 권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사십 년 동안 주인 앞에서 앉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등이었다.

물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그레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레고르: 계산서를 보셨습니까.

레티시아: 네.

레티시아는 짧게 대답하고, 그 다음 말을 골랐다.

이 노인은 이 집에서 나가는 돈에 서명하는 사람이었다. 두 해 동안 그 약값을 내준 사람이었다. 드라벨과 한편일 수도 있었다. 동대문에서 거래처 돈이 샐 때, 제일 먼저 들여다보는 건 늘 그쪽 경리였다.

그러니 아직 다 말할 수는 없었다. 화분 이야기도, 기록지 이야기도.

하지만 본 것은 말해도 됐다.

레티시아: 한 달 약값이 하인 스무 명의 일 년 급료더군요.

그레고르의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레고르: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레티시아: 그레고르는 알고 있었어요?

그레고르: 저는 출납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 집에서 나가는 동전 한 닢까지 제 손을 거칩니다.

레티시아: 그럼 작년 겨울에 하인 다섯이 나간 것도요?

그레고르가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연못 위로 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았다.

그레고르: ...제가 내보냈습니다.

레티시아는 그 얼굴을 봤다. 무표정했다. 하지만 무표정하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정원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하던 새벽과 같은 얼굴이었다.

레티시아: 그레고르. 장부를 보여 주세요.

그레고르: 아가씨께서 보실 것이 아닙니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망설임 한 톨 없이.

레티시아: 제 약값이에요. 제 몸에 들어가는 게 얼마인지, 저는 알아야겠어요.

그레고르: 약은 각하께서 정하셨고, 의원은 마님께서 모셨습니다. 저는 두 분이 정하신 일에 돈을 내드릴 뿐입니다.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레고르는 거기서 한 박자를 쉬었다.

그레고르: 그리고 아가씨의 몫도 아닙니다.

레티시아: 그럼 누구 몫인데요?

그레고르: 장부는 이 집의 속입니다. 선대 각하께서 제게 열쇠를 맡기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집안의 속은 함부로 꺼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 각하께서도 직접 보지 않으십니다.

레티시아는 다른 길로 돌았다.

레티시아: 그럼 이렇게 해요. 전부 말고, 약값 항목만. 한 해 치만. 그레고르가 옆에서 펼쳐 주고, 나는 손도 안 댈게요. 대신...

그레고르: 아가씨.

그레고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공손했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레고르: 이것은 흥정할 일이 아닙니다.

레티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 양반, 만만치 않다.

흥정을 흥정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조건이 하나 붙으면 그 조건을 따지느라 바빠서, 판 자체를 보지 못했다. 이 노인은 판을 봤다. 동대문 원로 상인들이 그랬다. 말은 적고, 고집은 세고, 한번 아니라고 하면 끝까지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의 고집이었다. 그래서 더 잘 알았다. 이런 사람은 말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레티시아: 그레고르. 사십 년 동안 이 집 장부를 지켰죠.

그레고르: 그렇습니다.

레티시아: 그 장부가, 이 집을 지켰어요?

그레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연미복 옆선에서 아주 조금 오므라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 손을 봤다. 사십 년 동안 장부를 넘긴 손이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하인 다섯에게 마지막 급료를 쥐여 준 손이었다.

그레고르: ...아가씨는 많이 변하셨습니다.

레티시아: 사람은 변해요.

그레고르: 장부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르는 허리를 굽혔다.

그레고르: 정원까지 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도련님이 기다리십니다.

돌아가는 길은 서른두 걸음보다 길게 느껴졌다.

거절당했다. 장사꾼에게 거절은 일상이었다. 첫 거래처에서 열 번은 문전박대를 당해야 열한 번째에 차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그러니 이건 끝이 아니었다. 첫 번째 문이 닫혔을 뿐이다.

문이 하나 닫히면, 그 문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는지 보면 된다.

하인 출입문 앞에서, 그레고르가 문을 열어 주다가 멈췄다.

그레고르: 아가씨.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레티시아: 네.

그레고르: 어제 정원사 영감이 제게 그러더군요. 아가씨 방 창가의 화분이 이상하다고. 흙에서 약 냄새가 난다고.

레티시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레고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 눈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녀는 읽을 수 없었다. 사람 얼굴 읽는 걸로 삼십 년을 먹고산 그녀가.

레티시아: ...그래서요?

그레고르: 화분은 새것으로 바꿔 두라 일렀습니다.

그레고르는 문을 끝까지 열었다.

그레고르: 흙도 같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규칙적이고, 조용하고,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레티시아는 문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

증거를 치운 것일까.

아니면, 비밀을 덮어 준 것일까.

그 차이를 알려면 역시 장부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