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번 생은 침대에서 안 보낸다
지은이 외인 · 2026-10-15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촛대 하나가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침대 옆 의자에서 하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가 앞으로 떨어질 때마다 화들짝 놀라 다시 들었다가, 또 떨어뜨렸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저 고개가 몇 번 만에 무릎까지 떨어지나.
일곱 번째에 하녀가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니나: 으앗!
레티시아: 괜찮니?
하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낮의 일이 생각났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니나: 아, 아가씨! 죄송해요, 졸지 않으려고 했는데...
레티시아: 됐다, 얘. 이리 와서 앉아.
하녀가 쭈뼛쭈뼛 의자로 돌아왔다. 열여섯쯤 되었을까. 주근깨가 콧등에 흩어져 있고, 갈색 머리를 하얀 머릿수건 아래로 질끈 묶었다. 손등이 거칠었다. 물일을 많이 하는 손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손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첫 번째 직원은 이 아이다.
레티시아: 이름이 뭐니?
하녀의 눈이 커졌다.
니나: 니, 니나예요. 아가씨 전속으로 1년째인데... 저를 모르세요?
아차. 레티시아는 재빨리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연기는 장사의 기본이었다.
레티시아: 열 때문인지 머리가 흐릿해. 이것저것 잘 생각이 안 나.
니나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니나: 세상에. 드라벨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레티시아: 아니.
레티시아는 니나의 손목을 잡았다.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니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레티시아: 선생님 말고, 네가 말해 줘. 하나씩.
그날 밤, 레티시아는 니나를 상대로 면접을 봤다. 아니, 니나가 그녀를 상대로 면접을 본 셈이었다. 질문은 전부 레티시아가 했지만.
여기는 에르노아 왕국이다. 이 집은 벨하르트 공작가다. 낮에 울던 장롱, 아니 아버지는 오스윈 벨하르트 공작. 북부 국경을 지키는 기사 출신이고, 딸이 아프고부터 수염을 한 번도 안 다듬었다고 한다.
어머니 엘레노어 공작부인은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방에 와서 밤을 새웠는데, 아침이 되면 꼭 단장을 다시 하고 나갔다고 했다.
니나: 마님은 흐트러진 모습을 남한테 보이시면 안 된대요. 공작가의 얼굴이니까요.
레티시아는 낮에 본 그 올림머리를 떠올렸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그 머리가, 그렇게 유지된 것이었다.
오빠 율리안은 스물두 살. 북부 기사단 부단장인데, 동생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말을 세 번 갈아타며 왕도로 달려왔다. 그리고 오늘 계단에서 굴렀다.
레티시아: 그럼 나는?
니나: 네?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어떤 아이였니?
니나가 조금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열 때문이려니 하고 넘어가는 눈치였다.
니나: 아가씨는...
니나가 머뭇거렸다. 무릎 위에서 앞치마 자락을 꼭 쥐었다 폈다.
니나: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돼요? 혼내지 않으실 거죠?
레티시아: 그래.
니나: ...무서우셨어요.
한번 터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열다섯 살 겨울에 감기를 크게 앓고부터, 아가씨는 거의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날이 섰다. 커튼을 열면 눈부시다고 화를 냈고, 닫으면 답답하다고 화를 냈다. 약사발이 벽에 날아간 게 몇 번인지 모른다. 2년 사이에 전속 하녀가 열두 명 바뀌었고, 니나가 열세 번째였다.
니나: 공작님이 오시면 '나가세요'. 마님이 오시면 '시끄러워요'. 도련님이 북부에서 편지를 보내시면, 뜯지도 않고 촛불에...
니나는 거기서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많이 말했다는 얼굴이었다.
레티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낮의 일이 하나씩 다시 보였다.
'아버지' 한마디에 무너지던 장롱. 혹 하나 짚어 줬다고 아이처럼 울던 오빠. 끝까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던 어머니. 쟁반을 들고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니나.
그래서였구나.
레티시아: 친구는?
니나가 고개를 저었다.
니나: 내년 봄에 귀족학교에 입학하셔야 하는데, 다들 못 가실 거라고...
니나는 말끝을 흐렸다. 레티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
열일곱 살. 몸은 약하고, 집은 부자고, 세상은 침대 크기만 하던 아이.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는데, 정작 창가까지 걸어갈 수는 없던 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시를 세우는 것뿐이었겠지.
레티시아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도 평생 남한테 약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녀는 이불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의 주인이 그렇게 살았다.
레티시아: 하나만 더 물어보자.
니나: 네, 아가씨.
레티시아: 너, 월급은 얼마 받니?
니나가 의자에서 또 미끄러질 뻔했다.
니나: 아, 아가씨! 그런 걸 왜...
레티시아: 궁금해서. 얼마니?
니나는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손가락을 펴 보였다. 레티시아는 그 숫자를 머릿속 장부에 적었다. 이 세계의 돈 단위는 아직 모르지만, 기준점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낮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하루 세 번. 단 한 번도 거르지 말 것.
그 약 한 사발이 니나의 몇 달 치일까.
니나는 결국 의자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레티시아는 침대 발치의 숄을 끌어다 니나의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방이 조용해졌다. 촛불 하나가 흔들렸다.
그제야 그것이 왔다.
낮 동안은 몰랐다. 울고 웃는 사람들, 탕약, 반지, 이름. 정신없이 장부를 펼치느라 장부 바깥을 볼 틈이 없었다.
지금 조카는 뭘 하고 있을까. 장례식은 치렀을까. 꽃 제단은 약속대로 95만 원이었을까. 3층 치킨집은 이번 달에도 월세를 늦게 냈을까. 조카는 8일에 전화를 했을까.
엄마 산소. 매년 한식이면 그녀 혼자 소주 한 병 들고 찾아가던 산소. 이제 누가 가나.
거기서 숨이 막혔다.
레티시아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64년 동안 쌓은 것들이 전부 저쪽에 있었다. 이쪽에 있는 건 이름도 몰랐던 몸 하나와, 의자에서 코를 고는 하녀 하나.
그리고 이 방 바깥의 세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여기는 어디인가.
저승은 아니었다. 저승 직원이 의자에서 미끄러지며 졸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가. 영국, 프랑스, 그런 데. 하지만 말이 통했다. 그것도 평생 들어 본 적 없는 말로. 입이 알아서 그 말을 했다.
그러다 조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지막 통화.
고모, 우리 수아가 요즘 보는 만화에선요. 사람이 죽으면 딴 세상 공주로 다시 태어난대요.
레티시아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레티시아: ...그게 진짜였어?
작은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니나가 몸을 뒤척였다. 레티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라면. 만화 속 이야기처럼 죽은 사람이 다른 세상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게 진짜라면. 조카는 그런 만화에는 대개 '원래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주인공이 그 이야기를 미리 읽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다 안다고.
그녀는 읽은 적이 없었다. 한 페이지도.
줄거리 모르는 빙의라니. 시세표 없이 도매시장 한복판에 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니나의 말이 다시 들렸다. 무서우셨어요. 하녀 열두 명. 촛불에 태운 편지.
조카가 또 뭐라고 했더라. 요즘은 못된 아가씨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가 유행이라고. 그런 아가씨는 결국 벌을 받는다고.
설마.
레티시아는 그 생각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대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동대문에서 거래처 부도로 어음 뭉치가 휴지 조각이 되던 날도 그렇게 숨을 쉬었다. 그날 그녀는 울지 않았다. 밤새 장부를 다시 짰다.
울어서 해결되는 장사는 없었다.
지금 아는 것부터 적자. 이 몸은 살아 있다. 이 집 사람들은 이 몸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는 시장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였다. 원칙을 세우는 것.
첫째.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한다. 열 때문에 머리가 흐릿하다고 하면 된다. 실제로 모르니까, 거짓말도 아니다.
둘째. 바뀐 건 바뀌었다고 한다. 말투도, 성격도 숨기지 않는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원래 달라지는 법이다. 그녀는 실제로 한 번 죽었다.
셋째. 그 밖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 딱 그것 하나만 빼고.
거짓말은 장부를 두 개 만드는 일이었다. 장부가 두 개면 언젠가는 반드시 숫자가 안 맞는 날이 온다. 그녀는 평생 그런 장부를 쓰던 사람들이 망하는 걸 봐 왔다.
그리고 마지막.
줄거리를 모르면, 줄거리를 새로 쓰면 된다.
레티시아는 움켜쥐었던 이불을 놓았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촛불이 다 탈 무렵에야 그녀는 잠이 들었다. 꿈에 엄마 산소가 나왔다. 누군가 벌초를 해 두었는지, 무덤가가 말끔했다.
다음 날 아침, 레티시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보기로 했다.
이불을 걷었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다. 여기까지도 그럭저럭 할 만했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대리석이었다.
니나: 아가씨! 일어나시면 안 된다고 선생님이...
레티시아: 잡지 마. 혼자 해 볼게.
니나가 두 손을 허공에 든 채로 얼어붙었다. 잡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는 자세였다.
레티시아는 침대 기둥을 잡고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다리가 남의 다리 같았다. 3주를 누워 있었으니 당연했다. 아니, 니나 말로는 그 전부터 거의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한 걸음.
발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떼었다.
두 걸음.
숨이 찼다. 고작 두 걸음에.
세 걸음. 네 걸음.
니나가 뒤에서 작게 숫자를 세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게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다섯 걸음.
창가가 보였다.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까지만.
여섯 걸음.
다리가 풀렸다.
레티시아는 대리석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니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니나: 아가씨!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제가 선생님을...
레티시아: 괜찮아.
레티시아는 바닥에 앉은 채로 숨을 골랐다. 창가까지는 아직 네 걸음이 더 남아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발끝에서 겨우 한 뼘 떨어진 곳에 고여 있었다.
여섯 걸음.
전생에서 그녀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북한산을 올랐다. 삼십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상까지 한 시간 십 분. 그게 그녀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에서 창가까지도 못 간다.
화가 났다. 몸에게도, 이 몸을 이렇게 만든 무언가에게도.
그리고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레티시아: 니나야.
니나: 네, 네, 아가씨.
레티시아: 종이랑 펜 좀 가져다줄래?
니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로 책상에서 종이와 깃펜을 가져왔다. 레티시아는 바닥에 앉은 채로 종이를 무릎에 대고 적기 시작했다.
<체력 회복 계획>
1일 차: 침대에서 창가까지. 열 걸음.
2일 차: 열다섯 걸음.
3일 차: 방 한 바퀴.
7일 차: 복도 끝까지.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장부를 펼칠 때와 같은 소리였다.
그러다 문득 손이 멈췄다. 종이 맨 위, 이름 쓰는 자리였다.
그녀는 습관처럼 '강'을 쓰려 했다. 그런데 펜 끝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레티시아 벨하르트.
가늘고 동글동글한 글씨가 종이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글씨가 아니었다. 금자의 글씨는 장부에 맞게 각지고 빨랐다. 이건 이 나라의 글자였고, 이 몸의 주인이 평생 써 온 글씨였다.
레티시아는 펜을 든 채 잠시 멍해졌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니나와 말이 통했다. 아버지의 말도, 의원의 말도 다 알아들었다. 처음 듣는 나라의 말인데 입에서는 술술 나왔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말도, 글씨도.
그녀의 눈이 방 한구석으로 갔다. 하얀 천을 덮어 둔 피아노가 있었다. 니나 말로는 이 몸의 주인이 좋아하던 것이었다.
저것도 칠 줄 안다는 뜻일까. 금자는 평생 피아노 건반 한 번 눌러 본 적이 없었다.
확인은 다리에 힘이 붙은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그녀는 다시 펜을 들었다. 레티시아 벨하르트. 또 썼다. 레티시아 벨하르트. 쓸 때마다 손이 알아서 예쁘게 굴렀다.
니나가 옆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니나: 아가씨, 왜 자꾸 이름을 쓰세요?
레티시아: 좋아서.
니나: 네?
레티시아: 이름이 예뻐서 자꾸 쓰고 싶어.
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었다. 레티시아도 따라 웃었다. 64년 동안 자기 이름을 쓰면서 웃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이 한 장이 레티시아 벨하르트로 가득 찼을 무렵,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에 고인 햇살을 다시 봤다. 네 걸음.
레티시아: 니나야. 잘 들어.
니나: 네, 아가씨.
레티시아: 나는 이번 생을 침대에서 보낼 생각이 없다.
니나가 눈을 깜빡였다. 이번 생, 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정정하지 않았다. 바뀐 건 바뀌었다고 한다. 어젯밤 세운 원칙이었다.
그날 그녀는 바닥을 짚고 기어서 창가까지 갔다. 열 걸음을 채운 것으로 쳤다. 장부는 원래 융통성 있게 쓰는 법이다.
햇살이 따뜻했다.
그날 밤, 레티시아는 잠들기 전에 니나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레티시아: 이 집, 정원이 있니?
니나: 그럼요. 아주 넓어요. 장미 정원도 있고, 연못도 있고... 왜요?
레티시아: 사람들은 몇 시에 일어나니?
니나: 하인들은 여섯 시요. 주인님들은 여덟 시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새벽 다섯 시.
전생에서 그녀가 매일 산에 오르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