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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께 하직하다

지은이 허균 · 2026-10-03

“너희를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나, 내가 나라의 명을 받아 국법을 맡은 처지가 아니니 이번은 덮어 두겠다.”

“그러나 훗날 고치지 않는다면, 너희가 수만 리 밖에 있다 한들 잡아다 목을 벨 것이다.”

그러고는 한 차례 엄히 매를 친 뒤 진문 밖으로 내쫓았다.

길동은 소와 양을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진용을 가지런히 하여 소란을 금했다.

푸른 하늘 만 리에 흰 해가 밝게 비치고, 팔진의 바람과 구름 속에 호령이 엄숙했다.

길동은 술을 들어 반쯤 취한 뒤 칼을 잡고 춤을 추었다. 칼빛이 어지러이 흩날려 햇빛을 희롱하고, 춤추는 소매가 표표히 공중에 나부꼈다.

한바탕 흥겨운 잔치였다.

이윽고 진을 거두어 신장들을 각각 돌려보내고, 길동은 몸을 날려 활빈당 처소로 돌아갔다.

그 뒤로 길동을 잡으라는 명이 더욱 급해졌으나, 그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길동은 부하들을 보내 팔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뇌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딱한 백성이 있으면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 귀신 같은 재주를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

전하께서 근심하며 탄식하셨다.

“이놈의 재주는 사람의 힘으로 잡을 수 없다. 민심이 이토록 흔들리는데, 그 인재됨이 또한 기특하다. 차라리 그 재주를 거두어 조정에 두는 편이 낫겠다.”

그리하여 병조판서의 직첩을 내걸고 길동을 불렀다.

길동이 초헌을 타고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린 채 동대문으로 들어왔다. 병조의 하인들이 그를 호위하여 대궐 아래에 이르렀다.

길동이 절하고 아뢰었다.

“하늘 같은 은혜가 망극하여, 분수에 넘치게 대사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나이다. 성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까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그러고는 물러갔다. 이후로 길동이 다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고, 각 도에 내렸던 체포령도 거두어졌다.

삼 년이 지난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임금이 내시들을 거느리고 달구경을 하는데, 하늘에서 한 선관이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엎드렸다.

임금이 놀라 말했다.

“귀인께서 누추한 곳에 오시어, 무슨 허물을 일러 주려 하시오?”

그 사람이 아뢰었다.

“소신은 전 병조판서 홍길동이옵니다.”

임금이 놀라 길동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대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길동이 아뢰었다.

“산중에 있었사옵니다. 이제 조선을 떠나 다시는 전하를 뵐 날이 없기에 하직하러 왔나이다.”

“전하의 넓으신 덕택으로 벼 삼천 석만 내려 주시면 수천 명의 목숨이 살아나겠사오니, 성은을 바라옵니다.”

임금이 허락하고 말했다.

“고개를 들라. 네 얼굴을 보고 싶구나.”

길동은 얼굴을 들었으나 눈은 뜨지 않았다.

“신이 눈을 뜨면 전하께서 놀라실까 하여 뜨지 않사옵니다.”

한참을 모시고 섰던 길동은 이윽고 구름을 타고 떠나며 하직했다.

“전하의 덕으로 벼 삼천 석을 내려 주시니 성은이 갈수록 망극하옵니다. 내일 서강으로 실어 보내 주소서.”

임금은 공중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길동의 재주를 못내 아까워했다.

이튿날 임금은 대동청 당상에게 명하여 벼 삼천 석을 서강으로 실어 보내게 했다. 신하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벼를 서강으로 옮기는데, 강 위로 배 두 척이 떠 왔다.

길동은 벼 삼천 석을 배에 싣고 떠나며 대궐을 향해 네 번 절하여 하직했다. 그러고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날 길동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망망대해로 나아갔다. 성도라는 섬에 이르러 창고를 짓고 궁실을 세워 자리를 잡았다.

군사들에게는 농사에 힘쓰게 하고, 여러 나라를 오가며 교역했다. 무예를 숭상하고 병법을 가르치니, 삼 년 만에 무기와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군사가 강하여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