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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림의 장수

지은이 허균 · 2026-10-03

차촌이라는 곳은 본래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그날 산채 안은 유난히 시끄러웠다.

수백 명의 도적이 술을 마시며 새 우두머리를 정하는 문제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누구는 자기가 적임자라 하고 누구는 다른 이를 밀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길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주를 펼 곳 없이 떠돌다가 결국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구나.’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이리라.’

길동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다. 녹림에 몸을 맡겨 사내대장부의 뜻을 펼쳐 보리라.’

결심을 마친 길동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수백 명의 도적이 모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낯선 젊은 사내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길동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경성 홍 승상 댁 자제로…”

좌중이 술렁였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사방을 떠돌다가, 오늘 하늘의 뜻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길동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뒤 또렷하게 말했다.

“내가 녹림 호걸들의 우두머리가 되면 어떻겠소?”

순간 산채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잠시 뒤, 도적들 사이에서 거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놈 아니야?”

“어디서 굴러온 애송이가 감히!”

“우리가 몇백 명인데 우두머리를 자청해?”

술기운이 오른 도적들은 대놓고 길동을 비웃었다. 한 사내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우린 다 남다른 힘을 가진 놈들이다! 그런데도 지금 큰일 두 가지를 앞두고 방도를 못 찾아 우두머리도 못 정하고 있는 판인데…”

그는 길동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까짓 총각 놈이 감히 여기 들어와 큰소리를 쳐?”

다른 이들도 덩달아 욕설을 퍼부었다.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당장 꺼져라!”

결국 몇몇 도적이 길동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길동은 조금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산채 밖으로 나온 뒤, 조용히 큰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그 위에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용이 얕은 물에 잠기니 물고기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범이 숲을 잃으니 여우와 토끼에게 조롱을 받는구나.〉

길동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머지않아 풍운을 얻는다면, 그 빛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리라.〉

잠시 뒤, 한 군사가 그 글을 발견해 산채 안으로 가져갔다. 상좌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글을 읽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잠깐.”

그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아이… 보통 놈이 아니다. 거동도 비범하고, 홍 승상 자제라는 말도 심상치 않다.”

그는 낮게 웃었다.

“죽이든 살리든, 재주부터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도적들은 길동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번에는 함부로 내쫓지 않았다. 길동을 상좌 가까이 앉힌 뒤, 우두머리 후보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고민은 두 가지다.”

그는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첫째, 저 앞에 초부석이라는 돌이 있는데 무게가 천 근이다. 이 산채에서 누구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둘째는 더 큰일이지. 경상도 합천 해인사.”

몇몇 도적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절에는 승려가 수천 명이고,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손댈 방법이 없다.”

그는 길동을 노려보았다.

“네가 이 두 가지를 해낸다면…”

산채 안 공기가 팽팽하게 가라앉았다.

“오늘부터 너를 우리 장수로 모시겠다.”

그 말을 들은 길동은 피식 웃었다.

“대장부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이만한 일을 두려워하겠소?”

그리고 곧바로 초부석 앞으로 걸어갔다. 천 근이나 된다는 거대한 돌. 도적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던 그 돌을, 길동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팔로 들어 올렸다.

“……!”

산채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길동은 거대한 돌을 팔 위에 얹은 채 수십 걸음을 걸었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돌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길동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적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진짜 장사다!”

“괴물이로군!”

“이놈 보통이 아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조금 전까지 애송이라 비웃던 자들이 이제는 술잔을 들고 길동을 치켜세웠다.

“오늘부터 장수다!”

“장수님께 술을 올려라!”

환호성이 산채를 뒤흔들었다. 길동은 그 소란 속에서도 담담한 얼굴로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백마를 잡아 오너라.”

잠시 뒤 흰 말 한 마리가 끌려왔다. 길동은 그 자리에서 피로써 맹세를 올리고, 수백 명의 도적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산채 안이 조용해졌다.

“만약 약속을 배반하거나 군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길동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 순간 수백 명의 도적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장수님!”

“명을 따르겠습니다!”

산채 전체가 함성으로 흔들렸다. 그날부터 홍길동은 녹림의 진짜 우두머리가 되었다.

며칠이 지난 뒤, 길동은 산채의 군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수백 명의 도적이 숨을 죽인 채 새 장수를 바라보았다.

길동은 상좌에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내가 직접 합천 해인사에 다녀오겠다.”

여기저기서 술렁임이 일었다. 해인사는 천하에 이름난 큰 절이었다. 승려만 수천 명에 재물도 셀 수 없이 많다고 소문났지만, 그만큼 경계도 삼엄해서 기존 장수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길동의 얼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모든 계획을 정한 뒤 돌아오겠다.”

그 말을 남기고 길동은 곧바로 길을 떠났다.

그날 길동의 차림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비단옷에 글공부하는 도령 차림을 하고 좋은 말까지 타니, 누가 봐도 명문가 자제였다. 종자 수십 명까지 거느리니 영락없는 양반집 공자의 행차였다.

해인사 근처에 이르자, 길동은 먼저 사람을 보내 도착을 알리게 했다.

“경성 홍 승상 댁 자제께서 공부하러 오십니다.”

그 소식은 금세 절 안에 퍼졌다. 승려들은 크게 놀랐다.

“홍 승상 자제라고?”

“재상가 자제가 절에 머문다면 절의 위세도 높아질 텐데.”

“극진히 모셔야 한다.”

승려들은 서둘러 절 밖까지 나와 길동을 맞이했다. 길동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탄 채 절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봐도 귀한 집 도련님이었다.

법당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뒤, 길동은 승려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듣자 하니 해인사는 천하에 이름난 절이라 하더군.”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온 것은 절 구경도 하고 공부도 하기 위함이다.”

승려들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길동은 아무 속셈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 때문에 공연히 불편해하지 말라.”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덧붙였다.

“대신 절 안에 머무는 잡인들은 모두 내보내라.”

“……!”

승려들이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길동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더 보탰다.

“또 어느 고을 아전을 시켜 백미 백이십 석을 보내겠다.”

승려들의 눈이 커졌다. 백미 백이십 석이면 엄청난 양이었다.

길동은 미소를 지었다.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 두라. 그날은 승속의 구별 없이 함께 즐긴 뒤, 그다음부터 공부를 시작하겠다.”

그 말을 들은 승려들은 감격한 얼굴로 연신 절을 올렸다.

“황공합니다!”

“큰 시주를 베푸시니 부처님의 은덕이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길동의 입가에 걸린 엷은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날 이후 길동은 며칠 동안 절 안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살폈다. 법당과 창고의 위치, 재물을 감춘 곳, 승려들이 오가는 길, 그리고 빠져나갈 길까지. 모든 것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몰래 부하 수십 명을 시켜 백미를 보내게 하고, 어느 고을 아전이 보내는 것이라고만 전하게 했다.

승려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동을 진짜 귀한 손님이라 믿고 극진히 대접했고, 길동의 말대로 절 안에 머물던 잡인들까지 모두 내보냈다.

해인사는 그렇게, 길동이 원하는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