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아래의 저포
지은이 김시습 · 2026-10-03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라는 젊은 선비가 살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아직 장가도 들지 못한 그는 만복사 동쪽에 방을 얻어 홀로 지냈다.
방 앞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봄이 오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옥으로 깎은 나무에 은 조각을 수북이 얹어 놓은 것만 같았다.
달 밝은 밤이면 양생은 늘 그 나무 아래를 거닐며 시를 읊었다.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건만
휘영청 밝은 달밤을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젊은 몸 홀로 누운 적막한 창가에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려나.
외로운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떠도는데,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려 보다가
등불로 점을 치며 창가에서 시름하네.
시를 다 읊고 나자, 어디선가 허공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느냐?”
양생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이튿날은 마침 삼월 스무나흗날이었다. 이 고을에는 이날 만복사에 등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어, 남녀가 절에 모여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날이 저물고 법회도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갔고, 절 안은 이내 한산해졌다.
양생은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 부처님 앞에 던지며 말했다.
“오늘 제가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면 법회를 열어 부처님께 갚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 제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빌기를 마치고 저포를 던지자, 과연 양생이 이겼다.
그는 곧바로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연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저를 속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고는 불좌 뒤에 숨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아가씨 하나가 법당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열여섯쯤 되어 보였고, 머리를 두 갈래로 곱게 땋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얼굴은 아름답고 몸가짐은 고왔으며, 볼수록 얌전하고 단아했다.
여인은 기름병을 들고 와 등잔에 기름을 붓고 향을 꽂았다. 그리고 세 번 절한 뒤 무릎을 꿇고 앉아 슬피 탄식했다.
“아무리 박명한 인생이라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고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 불탁 위에 올렸다. 그 글은 이러했다.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가 감히 부처님께 아룁니다.
지난날 변방의 방비가 무너지고 왜구가 쳐들어와, 싸움이 눈앞까지 번지고 봉화가 여러 해 동안 꺼지지 않았습니다. 왜적은 집을 불태우고 백성을 노략질했으며, 사람들은 동서로 흩어지고 좌우로 달아났습니다. 저희 친척과 종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여자의 몸이라 멀리 피난하지 못하고, 깊은 규방에 숨어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 없이 난리의 화를 피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여자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옳다 하시며, 외진 곳으로 옮겨 초야에 의지해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도 벌써 삼 년이 되었습니다.
가을 달밤과 꽃 피는 봄날을 아픈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고, 뜬구름 흐르는 물과 함께 덧없이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쓸쓸한 골짜기에 홀로 머물며 박명한 평생을 한탄하고, 아름다운 밤을 혼자 지새우며 짝 잃은 채란의 외로운 춤을 슬퍼했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지는 듯합니다. 긴 여름날과 긴 겨울밤마다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합니다.
오직 부처님께 비오니, 이 몸을 가엾이 여기시어 각별히 돌보아 주소서. 사람의 삶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고 선악의 응보 또한 피할 수 없다 하니, 저에게도 분명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부디 하루빨리 배필을 얻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빌기를 마친 여인은 몇 번이고 흐느껴 울었다.
불좌 틈으로 그 얼굴을 엿본 양생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말을 걸었다.
“방금 글을 올리신 것은 무슨 사연 때문입니까?”
부처님께 올린 글을 읽은 양생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여 다시 물었다.
“아가씨는 어떤 분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여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리 의심스러우신가요? 당신은 그저 좋은 배필을 얻으시면 되니, 굳이 이름을 묻거나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무렵 만복사는 이미 많이 퇴락해,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법당 앞에는 행랑만 쓸쓸히 남아 있었고, 그 끝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하나 있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이끌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여느 연인들처럼 정을 나누었다.
밤이 깊어 달이 동산 위로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문득 발소리가 들리자 여인이 물었다.
“누구냐? 시녀가 왔느냐?”
문밖에서 시녀가 대답했다.
“예. 평소에는 문밖에도 잘 나가지 않으시고 서너 걸음도 걷지 않으시던 아가씨께서, 어젯밤에는 우연히 나가시더니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여인이 말했다.
“오늘 일은 우연이 아니다. 하늘이 돕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고운 님을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하게 되었다. 어버이께 여쭙지 않고 시집가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지만, 서로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 것 또한 평생의 기이한 인연이다. 너는 집에 가서 앉을 자리와 술안주를 가져오너라.”
시녀는 돌아가 뜰에 술자리를 차렸다. 때는 벌써 사경이었다.
시녀가 펼친 방석과 술상은 무늬 하나 없이 깨끗했고, 술에서 풍기는 향기 또한 사람 세상의 솜씨 같지 않았다.
양생은 속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여인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맑고 곱고, 얼굴과 몸가짐이 너무도 단정했다.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담을 넘어 나온 것이리라 여기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여인은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고 시녀에게 일렀다.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어라.”
그러고는 양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 아이는 옛 곡조밖에 모릅니다. 저를 위해 새 노래 하나를 지어 주시면 어떨까요?”
양생은 흔쾌히 허락하고, 곧 「만강홍」 가락에 맞춰 노랫말을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했다.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은 아직도 얇아
몇 번이나 애태웠던가, 향로 불이 꺼졌는가 하고.
날 저문 산은 눈썹처럼 엉기고
저녁 구름은 일산처럼 퍼졌는데,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짝지을 이 없어
금비녀 반쯤 꽂은 채 퉁소를 불어 보네.
아쉬워라, 세월은 어찌 이리도 빠르던가.
마음 깊은 시름이 답답하여라.
낮은 병풍 속 등불은 가물거리는데
홀로 눈물 흘린들 누가 돌아보랴.
기뻐라, 오늘 밤에는
피리 소리에 봄이 찾아와
겹겹이 쌓인 천고의 한이 스러지니
금루곡 가락에 술잔을 기울이세.
한스러운 옛 시절을 이제 와 슬퍼하노니
외로운 방에서 눈썹 찌푸린 채 잠들곤 했지.
노래가 끝나자 여인이 서글프게 말했다.
“지난날 봉래섬에서 만나자던 약속은 어겼지만, 오늘 소상강에서 옛 낭군을 다시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낭군께서 저를 멀리 버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영 자취를 감추겠습니다.”
양생은 놀라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어찌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겠소?”
그러면서도 여인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 속으로 유심히 살폈다.
어느새 달은 서산에 걸리고, 먼 마을에서 닭이 울고, 절에서는 새벽 종소리가 울려 왔다.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시녀에게 말했다.
“얘야, 술자리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낭군을 모시고 저희 집으로 가려 합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는데, 울타리 안에서는 개가 짖고 길에는 사람들이 오갔다.
그런데 길 가던 사람들은 그가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만 물었다.
“양 총각, 새벽부터 어디 다녀오시오?”
양생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만복사에서 술에 취해 누웠다가, 이제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