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1. 옛날 옛적에
von 음악의 신 · 2026-03-18
밤.
먹구름이 달빛을 삼켰다.
어둠이 하늘을 덮고, 땅까지 내려앉았다.
공기조차 눅눅한 적막에 눌려 숨을 죽였다.
오늘 밤, 궁궐은 이상했다.
평소라면 꺼지지 않았을 등불들마저 꺼져 있었다.
하늘 아래에서 가장 밝아야 할 왕의 처소가,
지금은 어둠 속의 무덤처럼 조용했다.
모두 잠들어 있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전하!”
그 한마디가 정적을 찢었다.
연산군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훑었다.
숨소리 하나 없다.
불길했다.
이 밤, 왕의 침소에 감히 들어올 자라니.
“누구냐! 감히 어디서 짐을 부르느냐!”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속에 퍼졌다.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왕이 아닌, 다른 존재의 기운이었다.
등불조차 켜지지 않았는데 그 얼굴이 또렷했다.
살이 아니라, 빛이 서린 듯한 윤곽.
“소인은… 홍길동이라 하옵니다.”
그 이름.
연산군의 심장이 한순간 뛰었다.
“뭐라? 네놈이 그 도적놈 길동이라 했느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찾았다.
탁!
은빛 검날이 어둠을 가르며 뽑혀 나왔다.
“감히 짐의 처소에 침입해 목숨을 구걸할 줄 아느냐!
게 아무도 없느냐! 이 반역자를 당장 끌어내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밖엔 고요만이 흘렀다.
풍경마저 멎은 듯,
세상이 잠들어 있었다.
“전하, 헛수고이옵니다.”
“무슨 소리냐!”
“이 궁의 모든 자들이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전하와 저뿐이옵니다.”
연산군의 손이 떨렸다.
“네놈의 짓이로구나. 도술이란 것이 이리 흉하단 말이냐.”
“사악한 도술이라니요. 그저… 세상의 이치를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입니다.”
길동의 목에 검끝이 닿았다.
은빛 날이 그의 살을 스쳤다.
그러나 길동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그 태연함에,
왕의 분노가 폭발했다.
“도적놈 주제에 감히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아?!”
“전하. 전하를 해하려는 뜻은 없사옵니다.”
“웃기는 소리! 짐의 침소를 더럽혀 놓고 살려 달라 애걸이라도 하려는 게냐!”
길동이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가웠다.
“국왕이라 해서 다를 줄 아셨습니까?”
그 짧은 문장이 공기를 가르며 떨어졌다.
길동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묘하게 깊었다.
한 자 한 자가 무게를 지녔다.
검보다 날카로웠다.
연산군의 눈이 뒤집혔다.
순간, 그의 얼굴에 핏줄이 솟았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분노였다.
아니, 분노로 위장한 공포였다.
“네놈 같은 하찮은 것에게… 감히 짐을 조롱하다니!”
목소리는 터져 나왔지만, 떨렸다.
그 떨림을 감추기 위해 그는 더욱 소리쳤다.
왕의 체통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자신의 왕권이, 권위가, 눈앞의 사내 앞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길동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위의 달빛처럼.
그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 안에 비친 연산군의 모습만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도적놈 주제에 감히 짐을 가르치려 들어?!”
연산군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검을 쥔 손에 온 힘을 실었다.
자존심이 아니라, 공포를 누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죽여주겠다…! 이 자리에서!”
그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스르르르― 쾅!
쇳덩이를 찌른 듯한 충격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팔이 저렸다.
검끝이 튀어 나가며,
찰나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부서졌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요술이냐!”
연산군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숨이 거칠었다.
눈앞의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도, 상처도 없었다.
그의 살결은 검보다 단단했고,
그 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살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물질이었다.
피가 아닌 빛이 흐르고 있었다.
“요술이 아닙니다. 진실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한밤의 바람 같았다.
차갑고, 낮게 깔렸다.
“진실?”
“제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전인이니까요.”
연산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인?’
그 단어는 낯설었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든 낯선 울림이, 그의 심장을 조여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의 존재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식은 곧 공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그 공포를 들키는 순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웃었다.
비웃음 같았지만, 그 웃음 속엔 억눌린 불안이 섞여 있었다.
“흥, 헛소리 마라. 감히 신의 흉내라도 내는 게냐.”
길동은 여전히 고요했다.
“신의 흉내가 아닙니다.
그저 오래된 기억을 깨운 것 뿐이지요.”
그의 눈빛이 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공포는 더 이상 감춰지지 않았다.
연산군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 같은 것이 감히 짐의 권위를 시험하다니!
짐은 하늘이 내린 왕이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모두 죄인이다!”
길동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하늘이 내린 왕이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전하, 그 하늘이 언제부터 탐욕과 두려움을 택했습니까?”
연산군의 목이 굳었다.
입술이 마르고,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눈앞의 사내를 향해 다시 검 자루를 쥐었다.
그러나 이번엔 찌르지 못했다.
검이 아니라, 손이 떨리고 있었다.
길동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하, 소인은 전하를 해치려 온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이 밤,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을 뿐이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을 초월한 듯, 맑고 공허했다.
그 속에는 체념이 있었다.
이미 떠날 자의 목소리.
연산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흥, 대역 죄인이 무슨 인사 타령이냐.”
길동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바람이 불었다.
그의 옷 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연산군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가… 현실의 질감을 벗어나는 것 같았다.
“대역 죄인이라 하셨습니까?”
“네놈은 나라의 재물을 훔쳤고, 백성들을 선동한 도적이 아니더냐!”
연산군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의 말끝엔 공허가 섞였다.
분노로 가장한 두려움,
권위로 포장한 무력감.
길동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엔 연민이 떠올랐다.
“재물이라 하셨습니까…
그것은 나라의 것이 아니라, 백성의 것입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지요.”
그의 말은 칼이 아니었지만,
연산군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잠시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연산군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왕이면서도,
이 남자 앞에서는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했다.
길동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전하.
짐이라 하셨지만, 지금의 전하는 짐이 아니라, 짐승에 더 가깝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마시옵소서.”
연산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으나,
그 손끝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동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공기가 울렸다.
“저는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자리를 돌려드린 것 뿐이옵니다.”
연산군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네놈이 감히 짐을 꾸짖는단 말이냐!”
길동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 짐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묻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연산군은 입을 열지 못했다.
묻고 있는 건 질문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잠시 후, 길동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제 저는 떠나려 합니다.”
“뭐라?”
“저와 제 수하들은,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조선을 떠난다고? 네놈들이 감히 짐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길동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손을 펼치자, 허공에 미세한 푸른 문양이 떠올랐다.
빛이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이곳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 환웅의 뜻이 머물던 세상.
그곳으로 가려 합니다.”
연산군은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허튼소리! 그런 세상이 있을 리가 없지!”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후, 환웅의 피는 더는 이 땅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연산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네놈이 그 따위 헛소리로 짐을 속이려 드는구나!
떠날 거라면 조용히 가지, 왜 짐 앞에 나타난 것이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부탁?”
“소인의 부모와 형제들이 전하의 명으로 고통받고 있다 들었습니다.
부디 그들을 놓아주십시오.
그들은 죄가 없습니다.”
길동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인간의 떨림이 섞였다.
그는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전하,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부디… 부디 강녕하시길.”
그가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의 그림자가 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진동했다.
등불 없는 밤에 푸른 빛이 일었다.
연산군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도적의 무리가 궁에 들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고요했다.
깊은 꿈에 빠진 자들처럼.
연산군은 그들을 흔들어 깨워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다.
그제야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길동… 네놈, 어디 있느냐!”
그는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눈을 의심했다.
수천의 그림자가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다.
빛이었다.
활빈당의 무리들,
그들의 몸에서 은빛 불꽃이 흩날렸다.
하늘은 거대한 거울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공간이 찢기듯 열리고, 그 너머로 별빛 같은 문양들이 소용돌이쳤다.
그 선두에는, 홍길동이 있었다.
그가 연산군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세상이 조용히 뒤집혔다.
모든 빛이 흩어지고,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공기는 다시 어둠으로 잠겼다.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 쥔 검의 파편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허… 과인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 목소리는 희미했다.
어둠이 다시 세상을 덮고,
밤은 처음처럼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