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떨어진 자리
von 음악의 신 · 2026-08-31
콰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물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차가운 물보라가 얼굴을 후려쳤고, 몸이 허공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무현은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진짜 하늘이었다. 흰빛과 푸른빛의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 흐르고 해가 걸린, 사람 사는 세상의 하늘.
그리고 발아래에는 거대한 폭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돌아왔다.
하지만 이곳이 정말 자신이 떠나온 그때의 세상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떨어지면서 무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절벽. 천 길 물줄기. 물안개 너머로 어렴풋한 골짜기의 윤곽. 낯이 익었다.
'낙애곡인가.'
떨어진 자리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 절벽, 그 폭포. 다만 위쪽 벌판에서 비명도 북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장은 끝나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로 돌아온 것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선계에서 서른 해는 산 것 같은데. 아니, 더 되나. 마흔 해였나. 중간에 세는 걸 그만뒀지. 위기선생 말로는 바둑 삼만 판을 두었다니, 하루 한 판으로 쳐도….'
계산이 길어졌다.
그러다 신선들의 얼굴이 하나씩 지나갔다. 살아서나 갚으라던 옥허노모. 다음에 오면 주먹부터 맞대자던 패천노인. 그 약속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신선과 주먹다짐이라니. 그래도 언젠가는 해 봐야지. 지금 가면 세 합은 버틸 수 있으려나. 두 합인가.
옛날의 무현이라면 절벽에서 떨어지는 동안 비명을 지르거나, 지난 삶을 주마등으로 돌리거나, 하다못해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낙하하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셈이나 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 낙하는 두 번째였다. 처음보다는 나은 것이, 이번에는 등에 칼을 맞지 않았고, 몸도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기운을 조금만 돌리면 낙하를 늦출 수 있었다. 절벽을 몇 번 짚으면 물에 닿기 전에 멈출 수도 있었다. 서른 해를 배웠으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폭포 소리가 참, 여전하구나. 그때는 저 소리가 짐승 울음 같더니, 지금 들으니 제법….'
그 한눈이 화근이었다.
콰앙!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기둥이 소용돌이가 되어 무현을 통째로 삼켰다.
'….'
물속에서 무현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선계에서 거꾸로 솟는 폭포를 손끝으로 가르던 몸이다. 그런데 속세의 폭포수에 절임 배추처럼 말려 들어간 것이다.
'서른 해를 배웠는데.'
물살이 몸을 뒤집고 바위에 밀어붙였다. 역근으로 다시 세운 몸은 그 정도로는 흠도 나지 않았지만, 자세만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발버둥을 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물살은 억지로 거스르는 것보다 흐름을 타는 편이 나았다. 위기선생의 판이 그랬고, 옥허노모의 숨이 그랬다.
'물에 지는 게 아니라, 물을 타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우기며, 무현은 하류로 떠내려갔다.
떠내려가면서 보니 물속 세상도 그런대로 볼만했다. 소용돌이의 결이 보였고, 바위를 감아 도는 물길의 수순이 보였다. 위기선생이 보았으면 좋은 판이라 했을 것이다. 숨이 급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물살이 수면 가까이로 밀어 올려 주었다. 하늘이 정한 자리로 흘러가는 중인가 싶어, 무현은 물속에서 피식 웃다가 물을 한 모금 먹었다.
한참을 흘러갔다. 소용돌이가 뱉어 내면 물살이 받았고, 물살이 지치면 여울이 받았다. 그 사이 무현은 숨을 아껴 쉬며 두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 몸은 멀쩡하다. 둘, 배가 고프다. 선계의 샘물은 며칠을 버티게 해 줬는데, 속세의 물은 마셔도 배만 부풀 뿐이었다.
이윽고 물살이 순해지고, 발끝에 자갈이 닿았다.
무현은 강기슭으로 기어 나와 벌렁 드러누웠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속세의 해였다. 지는 해가 이렇게 붉은 것이었나. 선계의 하늘은 늘 흰빛과 푸른빛이어서, 노을이라는 것을 수십 년 만에 보는 셈이었다.
"하아."
웃음이 나왔다.
돌아왔다.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사람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노을이 붉고, 물이 차고, 배가 고픈 세상으로.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물비린내에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선계는 아름다웠지만 이런 것들이 없었다. 배고픔도, 벌레 소리도, 저녁이 온다는 것도. 수십 년 만에 겪는 저녁이 하도 반가워서, 무현은 젖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켜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걸친 것은 여전히 그날의 산문수위 근무복이었다. 등판이 칼자국으로 갈라지고 핏물이 바래 얼룩진, 걸레가 다 된 회청색 무복. 수십 년을 입었는데 해지지 않은 것이 신기했으나, 선계의 물건이 아니니 선계의 시간을 타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리에 검은 없었다. 빈손이었다.
'우선 사람을 찾자. 지금이 어느 때인지부터 알아야….'
강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물비린내에 섞여 매캐한 것이 코끝을 스쳤다.
연기 냄새였다.
고개를 드니 산자락 아래, 개울이 굽어 도는 안쪽에 초가지붕 하나가 보였다. 지붕 위로 저녁 짓는 연기가 가늘게 오르고 있었다.
무현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제 몰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피 얼룩진 무복에 산발이 된 머리. 이대로 문을 두드리면 물귀신이 왔다고 낫부터 집어 들 꼴이었다.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를 대충 여미고, 옷의 핏자국은 어쩔 도리가 없어 그대로 두었다.
오두막 앞에 이르러 무현은 사립문 밖에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계십니까."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칡뿌리며 말린 약초 다발이 처마 밑에 주렁주렁 걸린 것으로 보아 약초꾼인 듯했다. 노인은 무현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고는 미간을 좁혔다.
"…웬 총각이 이 밤중에. 자네 뉘신가."
총각. 그 말이 묘하게 낯설었다. 샘가 수면 속의 그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얼굴로 사는, 첫날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왔는데, 하룻밤 처마만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에?"
노인의 눈이 무현의 등 뒤, 핏물 바랜 얼룩에 가서 멎었다.
"…그 꼴은 물이 낸 상처가 아닌 것 같소만."
"예. 이건 오래된 것입니다."
무현은 순순히 답했다. 노인은 한참을 살피더니, 혀를 차며 문을 마저 열었다.
"들어오시오. 저녁이라야 조밥에 산나물뿐이오만."
"그거면 진수성찬입니다."
들어가려다 무현은 마당 한쪽의 장작더미를 보았다. 도끼가 반쯤 박힌 통나무 곁에, 패다 만 장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노인의 굽은 등으로는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르신. 밥값을 먼저 해도 되겠습니까."
"밥값?"
무현은 소매를 걷고 도끼를 잡았다. 한 식경 뒤, 오두막 벽을 따라 장작이 처마에 닿도록 쌓였다. 물독도 채웠다. 노인은 그 광경을 문간에 서서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맞긴 한 게요?"
"물에 빠지기 전에는 문지기였습니다. 문지기는 원래 잡일이 손에 붙습니다."
"거참."
노인은 그 뒤로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조밥은 정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수십 년 만에 먹는 사람의 밥이었다. 무현은 세 그릇을 비우고 네 그릇째에서야 노인의 눈치를 보았다. 노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솥을 통째로 밀어 주었다.
"댁은 대체 며칠을 굶은 게요."
"셈하기 어렵습니다."
"거참, 말하는 것도 이상한 양반일세."
노인은 그러면서도 산나물을 더 내왔다. 무현은 밥을 씹으며 슬며시 물었다.
"어르신. 여기가 어느 고을입니까."
"섬서 땅이오. 여기서 산길로 한나절 내려가면 저잣거리가 나오지."
섬서. 그렇다면 화산이 멀지 않다.
"혹, 요즘 세상 소식은 좀 들으셨습니까. 바깥이 어찌 돌아가는지."
노인의 낯빛이 흐려졌다.
"세상 소식이라. 늙은이가 산속에서 약초나 캐는데 무슨 소식을 알겠소만."
노인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잣거리에 약재 팔러 내려가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지. 요즘은 온통 그 얘기뿐입디다. 저 아래 어디 골짜기에서 정파고 사파고 크게 붙었는데, 정파 쪽이 아주 결딴이 났다고."
무현의 손이 멎었다.
"…그 싸움이, 언제 적 일이라 합니까."
"글쎄. 달포쯤 됐다던가."
노인은 곰방대를 빨며 덧붙였다.
"화산인가 하는 큰 문파도 그 싸움에서 아주 결딴이 났다지. 장문인인지 뭔지 하는 어른도 돌아가시고, 산문이 불탔다는 소리까지 있습디다. 하기야 소문이란 게 부풀기 마련이라, 어디까지 참말인지는 모르겠소만."
달포.
한 달 남짓.
무현은 숟가락을 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서른 해였다. 적게 잡아도 서른 해. 그 세월을 건너 돌아왔는데, 이쪽의 시간은 겨우 한 달이 흘러 있었다. 잡초에 묻힌 비석도, 흰 눈에 잠긴 낯선 대지도 아니었다. 틈 너머로 스쳐 가던 그 많은 세상 가운데, 하필 이곳. 떠나온 자리에서 겨우 한 달 어긋난 자리였다.
유청악이 살아 있다. 왕철산이 살아 있다. 진곤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직 그 마을에 있다.
하늘이 정한다더니.
하늘은 그를, 놓아야 할 자리에 놓아 준 모양이었다.
"왜 그러시오. 아는 사람이라도 나간 싸움이오?"
노인이 물었다. 무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예. 저도… 그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노인의 곰방대가 멎었다.
"…자네가? 자네같이 새파란 사람이 그 지옥에?"
"보기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노인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무현의 등 뒤, 핏물 바랜 칼자국 얼룩을 다시 보았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굴은 아이인데 등은 아이의 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침묵이 고마웠다.
"살아 나온 것만도 하늘이 도운 게요."
"예. 하늘이 도왔습니다."
무현은 진심으로 답했다. 노인은 그 대답을 곱씹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방 한쪽에 멍석과 이불을 내주었다.
"몸이나 지지시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어르신 성함을 아직 여쭙지 못했습니다."
"성가시게 이름은 무슨. 아랫마을에서는 그냥 약초 영감이라 부르오."
"저는 진무라 합니다."
이름이 입에서 먼저 나갔다. 진무현이 아니라 진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을 이름을 통째로 대기가 어쩐지 꺼려져, 한 자를 삼킨 것이다. 뱉고 나서야 무현은 제가 그런 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른 해 전의 저라면 묻는 대로 다 답하고, 안 물은 것까지 답했을 것이다.
"진무. 좋은 이름이오."
노인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름 위에 새 이름 하나가, 그렇게 조용히 얹혔다. 그것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제 이름 노릇을 하게 될지, 그때의 무현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무현은 오랜만에 사람의 방에서 사람의 이불을 덮고 누웠다.
몸은 멀쩡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달. 겨우 한 달이라니. 눈을 감으면 갈림길의 등불이 떠올랐다.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어린 동생들이 있다던 목소리. 살아서 식구들 밥 벌어다 주는 게 백배 낫다던 사람. 그 약조를 이제야 갚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늦었지만, 영영 늦어 버리기 전에.
'형님. 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탈영.
무현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저는 전장에서 등을 돌린 자였다. 저놈 도망친다, 하던 그 고함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전시 군율에 탈영은 사형. 격문이 돌았다면 지금쯤 저는 탈영병 명부에 올라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실종자 명부거나.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확인할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화산.
돌아가야 했다. 문지기 진무현이 돌아갈 곳은 처음부터 거기 하나뿐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신선 넷에게 수십 년을 배우고 달마의 문까지 지난 몸이, 기껏 돌아가 하겠다는 것이 산문 앞에 서 있는 일이라니.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하고 싶었다. 아침에 근무복을 입고, 정해진 자리에 서고, 하품을 삼키고, 해가 기울면 퇴근하는 하루. 그 지루한 하루를 위해 서른 해를 건너온 셈이었다.
'돌아가면 우선 유 대인께 얼굴을 비추고. 아니, 그 전에 마을부터 들러야 하나. 첫 급료를 받으면….'
궁리가 잠을 밀어냈다. 걱정이 많아 잠 못 들던 밤은 수없이 겪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잠 못 드는 밤은 처음이었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 문밖에서 노인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젊은 양반. 일어나 보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아랫마을에서 봉화가 올랐소."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건 도적이 들었다는 신호요. 요즘 골짜기 싸움에서 흩어진 패잔병 놈들이 도적 떼가 되어 마을을 돈다더니, 기어이…."
무현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창호지 너머, 새벽어스름 속에서 산 아래쪽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르신은 여기 계십시오."
"뭐요? 설마 내려가려는 게요? 이보오, 젊은 양반. 저건 관졸도 못 당해 내는 놈들이오. 골짜기에서 살아 나온 것만도 천행인 사람이 어딜."
무현은 문을 열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밥을 네 그릇이나 얻어먹었습니다."
"그게 무슨."
"밥값은 해야지요. 다녀오겠습니다."
사립문을 나서는 등 뒤로 노인이 뭐라 소리쳤지만, 무현의 걸음은 이미 새벽 산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있었다. 서른 해 만에 처음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세상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