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바둑판 밖의 돌
von 음악의 신 · 2026-08-31
"비켜라!"
고함과 함께 화산의 정예 제자 하나가 앞으로 쇄도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밀려났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도 마도의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공기가 폭발하고, 흙과 피가 함께 솟구쳤다.
무현은 그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앞으로 가라는 것인지 버티라는 것인지, 명령은 이미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발밑에는 아는 얼굴인지 모르는 얼굴인지 구분도 안 되는 시신들이 밟혔다. 검을 쥔 손은 남의 피와 제 땀으로 미끈거렸다.
진곤이 아직 곁에 있다는 것. 그것만이 간신히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무현! 뒤!"
진곤의 외침이 들린 순간,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늦었다.
무현을 노리던 사파인의 칼을 막아선 것은 진곤이었다. 놈의 장검이 진곤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비명이 터졌다.
진곤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에서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으나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힘을 짜내, 무현을 밀어냈다.
"도…망…."
그 한마디를 끝으로 진곤의 무릎이 꺾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집에 사람이 있다던 사람이었다.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어린 동생들이 있어, 그래서 도망칠 수 없다던 사람. 살아서 식구들 밥 벌어다 주는 게 백배 나은 일이라며, 살아 돌아올 궁리만 하자고 약조하던 사람. 그 사람이 도망치라는 말을 남기고, 무현 대신 칼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형님, 형님!"
무릎을 꿇고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이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빠져나가는 것만 느껴졌다. 지혈을 해야 한다. 의관을 불러야 한다.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 그렇게 외치는데, 손은 떨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여기는 저잣거리가 아니었다. 문짝에 실어 옮겨 줄 사람도, 달려갈 의원도 없었다. 사방에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고, 그 누구도 쓰러진 잡졸 하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열 유지해! 물러서면 죽는다!"
주명수였다. 평소처럼 호통을 치며 사람들을 몰아세우던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오래가지 못했다.
화산 쪽으로 파고든 거구의 마도인이 거대한 월도를 휘둘렀고, 그 칼날이 주명수의 가슴을 어깨부터 허리까지 비스듬히 갈라 버렸다. 주명수는 제 몸이 갈라진 것을 믿지 못한 듯 잠깐 멈칫했다. 이윽고 피가 쏟아졌고, 몸이 짐짝처럼 무너졌다.
교관도 죽었다.
진곤도 죽었다.
그리고 다음은, 자신이었다.
그 공포가 너무 선명해서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전열도, 군율도, 탈영도, 사형도 머릿속에서 모조리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살고 싶다는, 짐승 같은 본능뿐이었다.
무현은 등을 돌렸다.
"저놈 도망친다!"
뒤에서 누군가 고함쳤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미친 듯이 달렸다. 쓰러진 시체를 밟고, 피로 미끄러지는 땅을 구르듯 내달렸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도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사람이 적은 쪽으로, 칼이 덜 날아드는 쪽으로 뛰었다.
달리는 내내 검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버릴 생각을 못 한 것인지, 버릴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눈앞에서 창을 든 그림자가 튀어나왔을 때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왼발 반 보. 검끝이 뻗었고, 그림자가 비켜났고,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그것이 배운 전부였고, 그 전부가 한 번은 통했다.
발아래 지형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협곡 쪽으로.
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멀리서만 들리던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콰아아아.
짐승 울음 같은 물굉음이 가까워졌다. 바닥은 울퉁불퉁한 돌밭으로 변했고, 앞쪽에는 이미 땅이 푹 꺼지며 절벽 가장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에서 희뿌연 물안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파인인지 아군인지도 몰랐다. 다만 누군가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퍽!
등에 뜨거운 불덩이가 박힌 듯했다.
"크아악!"
칼날이 등을 깊게 긋고 지나간 순간, 몸이 앞으로 꺾였다. 휘청이는 발밑에서 돌조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본능적으로 허공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몸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쾅!
등이 바위에 부딪히고, 튕겨 난 몸이 다시 절벽 면을 긁었다. 폐부의 숨이 모조리 짜이듯 빠져나갔고, 입안 가득 비릿한 피맛이 번졌다. 하늘과 절벽과 전장의 그림자가 한데 뒤섞여 빙글빙글 돌았다. 무언가 부러지는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귀를 찢을 듯한 굉음.
폭포였다.
천 길 아래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가 시야 끝에서 아득하게 일렁였다.
흐릿해지는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아, 저기구나.'
닿기도 전에 죽을지 모른다. 살아 있다 해도 저 물살에 휘말리면 끝이다. 결국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떨어지는 시간은 이상하게 길었다.
그 길어진 찰나 속으로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객당 앞에서 삼키던 하품. 화롯가에서 등을 쓸어 주던 할머니의 마른 손. 죽은 물고기 같다던 왕철산의 코웃음. 갈림길에서 도망가게, 하고 목소리를 낮추던 진곤의 얼굴.
그때 도망쳤어야 했나.
아니, 그랬다면 진곤 형님은 갈림길에서부터 혼자였겠지. 마지막에 저를 밀어낼 사람도 없이.
어느 쪽이 맞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형님과의 약조 하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피 섞인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문지기였다. 검을 쥔 지 한 달 남짓. 사람을 벤 것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지켜 준 사람 하나 살리지 못했고, 도망치라는 그 말 하나 따르는 데에도 목숨이 다 들었다.
'참, 볼품없는 끝이군.'
웃음 비슷한 것이 입가를 스쳤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칼로 끊어 낸 듯 까맣게 끊어졌다.
"으…."
낮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여긴, 저승인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풍광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사방이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저 안개가 아니었다. 흰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채 허공에 머물렀고, 그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선들이 꼬이고 풀리며 거대한 바둑판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안개 너머에 누군가 있었다.
까마득한 허공 한가운데, 오래된 정자 하나가 떠 있었다. 구름 위도 아니고 땅 위도 아닌 곳에 세워진 정자였다. 그 안에서 흰옷의 노인이 바둑알을 내려놓고 있었고, 맞은편의 도포 차림 중년 사내는 미간을 찌푸린 채 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딱.
바둑알 놓이는 소리가 울렸다.
그 짧은 소리와 함께, 무현을 짓누르던 고통이 멎었다. 정확히는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숨도 가빴지만, 조금 전까지 등을 찢던 통증이며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아픔이 거짓말처럼 멀어져 있었다. 동시에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정자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흰옷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허."
짧은 한마디가 천둥처럼 울렸다.
도포 사내도 시선을 들었다. 그는 무현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떨어진 것이냐."
"사람인 것 같구나."
"보인다. 내 말은, 어째서 살아 있는 아이가 이리로 흘러들어 왔느냐는 것이다."
무현은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앞 광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인지, 제가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흰옷 노인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몸이 정자 앞, 바닥 아닌 바닥 위에 털썩 떨어졌다. 분명 무언가에 닿았는데 흙의 감촉도 돌의 감촉도 없었다. 구름을 억지로 다져 만든 마루 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죽기 직전이로군."
"그렇군."
"아슬아슬하게 틈새에 걸렸어."
두 사람은 길가에 굴러든 짐짝이라도 보듯 무현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정자 바깥의 안개가 다시 일렁였다.
머리만 하얗게 셌을 뿐, 얼굴은 여전히 20대처럼 보이는 노파가 걸어 나왔고, 뒤이어 어깨가 산처럼 넓은 거구의 노인이 하품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눈빛이 매서웠고, 거구의 노인은 반쯤 졸린 표정이었으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묵직했다.
노파는 무현을 보더니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또 바둑판 밖으로 돌을 떨어뜨렸느냐? 내 언젠가 이런 날이 또 올 줄 알았다!"
흰옷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아니다."
노파가 곧장 도포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럼 네놈이겠지."
"아니다. 이번 수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럼 설마 바둑알이 제 발로 굴러 나왔다는 게냐?"
그들은 무현이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언성을 높였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신선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으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달랐다.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주위의 안개가 물결처럼 일렁였고, 손끝을 까딱일 때마다 허공의 선들이 바둑알처럼 움직였다. 천지의 이치가 그들 손안에서 놀아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결국 죽었구나.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저승이로구나.
그런데 저들의 말을 들어 보니, 제가 가야 할 저승과는 조금 다른 곳인 듯했다. 잠깐 스쳐 가는 길목인지, 애초에 살아 있는 인간이 와서는 안 되는 틈인지, 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흰옷 노인이 무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재미있군. 이 정도면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 끈이 남아 있다."
도포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하찮은 인간 하나다. 그냥 흘려보내면 그만이거늘."
그때 노파가 무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눈빛이, 아주 잠깐 누그러졌다.
"참으로 불쌍한 아이로구나."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울컥했다.
어째서인지, 일찍 돌아가신 부모 대신 저를 키우고 지난해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당신은 굶어도 손주 입에 들어갈 죽 한 숟갈을 먼저 챙기던 사람. 무현의 삶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 불현듯 밀려왔다.
노파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정자 안의 둘을 노려보았다.
"내 이곳에서는 바둑을 두지 말라 몇 번을 말했느냐. 당신들이 바둑알을 잘못 떨구어 공간에 틈이 생겼고, 그 틈으로 이 아이가 흘러들어 왔잖아. 이제 어쩔 셈이냐?"
도포 사내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허, 큰일은 큰일이로군. 다시 돌려보낼 방도도 마땅치 않고."
흰옷 노인은 시큰둥했다.
"가야 할 곳으로 자연히 흘러가게 두면 될 일이다. 어차피 인간계로 돌아가도 죽을 목숨이니."
"그리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노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살아 있는 혼이 이 틈에 걸렸다는 것은, 적어도 천명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구의 노인이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무현을 내려다보았다.
"음."
그는 허리를 숙여 무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가, 피식 웃었다.
"텅 비어 있군."
"무엇이 말이냐?"
"그릇이."
거구의 노인은 느릿느릿 말했다.
"내공도 없고, 기혈은 엉망이며, 근골도 썩 빼어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흰옷 노인이 비웃었다.
"그런 놈일수록 더 쉽게 깨진다."
"그건 네 방식이 너무 거칠어서 그렇지."
노파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이 아이를 지금 돌려보낼 방법은 없다. 이곳의 시간은 인간 세상과 다르니, 아이가 스스로 길을 찾을 때까지 머물게 하면 된다."
도포 사내가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하얀 인간에게 무얼 가르치겠다는 것이냐."
노파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 짚었다.
"가르치면 된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티격태격하던 것과는 결이 다른 침묵이었다. 무현은 흐려지는 눈으로, 신선들의 시선이 일제히 흰옷 노인에게 쏠리는 것을 보았다.
흰옷 노인은 바둑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르치면 된다라."
낮은 목소리가 안개를 갈랐다.
"이백 년 전에도, 누가 꼭 그런 소리를 했었지."
노파의 지팡이가 허공에서 멎었다. 도포 사내는 말없이 부채를 접었다.
"그때도 텅 빈 그릇이라 했다.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담을 수 있겠다고. 그래서 담아 주었지. 그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는 인간을 가르치지 않는다."
흰옷 노인이 바둑알 하나를 판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이.
노파가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 아이가 그 아이는 아니잖느냐."
"같은 곳에서, 같은 틈으로 흘러들었다. 내게는 그거면 충분하다."
도포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법도의 문제도 있다. 산 사람을 이곳에 들인 것만으로 이미 경계를 넘었는데, 가르쳐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면 그것은 인간계의 판에 손을 대는 일이다."
"판에 손을 댄 게 누군데."
거구의 노인이 하품 섞어 중얼거렸다. 바둑을 두다 돌을 떨어뜨린 것이 누구냐는 소리였다. 도포 사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는 대신, 무현 쪽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백 보를 양보해서, 가르쳐 돌려보낸다 치자. 이 아이가 제가 떠나온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느냐. 틈은 사람의 셈대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한 달 뒤일 수도 있고, 백 년 뒤일 수도 있어. 아는 얼굴 하나 남지 않은 세상에 떨어뜨려 놓는다면, 그것을 살리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느냐."
정자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흰옷 노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반박이 아니라 동조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걷어 낸 것은 노파였다.
"어느 때에 떨어질지는, 우리가 정할 몫이 아니다."
"…"
"하늘이 정한다. 천명이 끊기지 않은 채로 이 틈에 걸린 아이야. 하늘이 아직 이 아이를 쓸 자리를 남겨 두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이 돌을 놓을지도 하늘이 알아서 할 일. 우리 걱정이 닿을 데가 아니다."
도포 사내가 무어라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바둑을 업으로 삼는 자에게, 돌 놓을 자리는 판을 쥔 자가 정한다는 말만큼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노파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딱. 말다툼을 끊는 소리였다.
"다투어 정할 일이 아니다. 가르칠지 말지는 두고 정해도 늦지 않아. 그릇이 비어 있다 한들, 무엇을 담아도 되는 그릇인지는 들여다봐야 아는 법이니."
"허."
기가 막힌다는 헛웃음이 정자에 울렸다.
무현은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저는 죽은 것이냐고, 아니면 그저, 형님이 죽었다고. 무엇 하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거구의 노인이 그 꼴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급할 것 없다. 여기서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
그 말의 뜻을 그때의 무현은 알지 못했다.
다시 까무룩 잠겨 드는 의식 속에서 조각난 말들이 맴돌았다.
가르친다니. 누구를. 설마, 나를. 그리고 이백 년 전의 '그 아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죽어 가는 문지기 하나를 두고 신선들이 다투는 이 광경이 꿈인지 저승인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아득해지는 귓가에, 바둑알 놓이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딱.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지난해 겨울 화롯가에서 할머니가 밤을 깨물어 쪼개 주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