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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낙애곡(落崖谷)

von 음악의 신 · 2026-08-31

행렬은 하루를 꼬박 걸었다.

산길이 끝나고 관도로 접어들자 길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닫아건 객잔, 짐을 꾸려 떠나는 촌가, 밭일을 하다 말고 행렬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눈빛에는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먼저 있었다. 무장한 행렬이 지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밤에는 벌판 어귀에서 노숙을 했다. 불침번을 서는 속가제자들의 그림자가 모닥불 가장자리를 오갔고, 잡졸들은 짐수레 사이에 웅크려 새우잠을 잤다. 무현도 진곤의 등에 등을 기대고 눈을 붙였으나, 잠결에도 손은 검자루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진곤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잠이 와야 자지."

진곤은 불씨를 뒤적이며 낮게 웃었다.

"이상하지. 막상 나오니까 무섭다기보다, 집 걱정이 먼저 되는구먼. 땔감은 넉넉히 쌓아 놓고 왔나, 막내 놈 신발은 아직 발에 맞나, 그런 것들 말이야."

무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걱정할 집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잘 몰랐다. 다만 그 걱정이 사람을 살게도 하고, 도망치지 못하게도 한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게. 내일도 걸어야 하니."

진곤이 먼저 등을 돌렸고, 무현도 다시 눈을 감았다.

이튿날, 행렬은 평탄한 벌판 어귀에서 다른 무리와 합류했다.

진가보(陳家堡)의 군사들이었다.

세가의 깃발 아래 모인 그들은 무현이 지금껏 보아 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몸집부터 대체로 컸고 팔다리가 굵었으며, 갑옷이나 보호구도 저마다 갖추고 있었다. 창, 도, 장병기, 쇠몽둥이, 사슬 달린 병기까지 무기도 가지각색이었다.

화산의 속가제자들이 검과 도 위주로 단정하게 갖춰져 있었다면, 이쪽은 실전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고나온 듯한 행색이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다르다.

여러 전장을 겪어 본 자들이었다. 서 있는 모양새부터 달랐다. 걷는 법, 주위를 살피는 눈, 무기를 손에 쥐는 태도, 심지어 쉬는 순간조차 빈틈이 없었다. 허겁지겁 끌려와 형식만 갖춰 칼을 쥔 저희와 달리, 밥벌이로 사람을 베는 일에 익숙한 자들.

무현 일행이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 주명수가 코웃음을 쳤다.

"처음 보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가 턱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저자들은 용병이다."

"용병, 입니까?"

누군가 조심스레 되묻자 주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가들은 돈이 있다. 번화가 가까이 터를 잡고 장사와 표행, 땅장사로 재물을 불리니, 이런 때가 되면 용병을 잔뜩 끌어모을 수 있지. 우리 같은 구파일방은 사정이 다르다. 산중에 있으니 세속의 돈줄이 세가만큼 넉넉지 못해. 사문 인력과 속가제자들을 최대한 쥐어짜는 수밖에."

그는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용병 놈들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큰 전쟁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고 세가들이 큰돈을 풀겠다 싶으면 벌떼처럼 모여들지. 위험한 만큼 품삯을 더 받을 수 있으니."

진곤이 낮게 물었다.

"그럼, 저자들은 모두 싸움에 익숙한 자들입니까?"

"익숙한 정도가 아니다."

주명수가 피식 웃었다.

"저자들은 그걸로 먹고산다. 싸우고, 죽이고, 살아남아 품삯을 받는 자들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잣거리에서 본 혈풍십귀와 무당 제자들의 싸움이 다시 떠올랐다. 전쟁이란 결국 저런 자들이 맞부딪히는 곳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틈에 던져질, 하찮은 숫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진가보 쪽 용병 몇이 이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눈에 서려 있었다. 누군가는 어깨를 으쓱했고, 누군가는 입꼬리를 비틀었으며, 누군가는 아예 들으란 듯이 말했다.

"저런 것들도 군사라고 데려왔나 보군."

"칼 잡아 본 지 한 달은 됐으려나?"

"전장 가면 사파 놈들 칼밥이나 되겠지."

킥킥대는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소리 사이로, 곰 같은 몸집의 사내 하나가 말을 몰고 지나갔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등에 멘 대도. 용병들이 길을 비키는 품새로 보아 우두머리인 듯했다. 사내는 화산의 잡졸 행렬을 위아래로 훑더니, 코웃음 한 번으로 평가를 끝내고 지나가 버렸다. 그 무심한 한 번의 눈길이, 낄낄대는 조롱보다 더 아팠다.

무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문 앞에 서 있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검을 쥔 지 한 달 남짓. 이런 자신이 전쟁터에 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주명수는 그런 반응에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로만 말했다.

"저런 소리 듣기 싫으면 살아남아라. 전장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증명하는 곳이니까."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그저 건조한 사실이었다.

행렬은 다시 움직였다.

화산의 제자들, 속가제자들, 잡졸들, 그리고 진가보의 용병들까지 뒤섞인 긴 줄이 석양 물든 길 위로 이어졌다. 붉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깃발들이 펄럭였고, 먼지가 발밑에서 자욱하게 일었다.

무현은 무거운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저잣거리의 피비린내가 남아 있었다. 그 피비린내가 남의 일이 아니라 제 앞날이라는 생각이 들자 숨이 막혔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낙애곡(落崖谷).

행렬 어딘가에서 그 이름이 들려왔다. 떨어질 낙에 낭떠러지 애. 골짜기 이름 치고는 불길하기 짝이 없다고, 무현은 생각했다.

곁에서 나이 든 속가제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낙애곡이라. 오백 년쯤 전에도 여기서 큰 싸움이 있었다더군. 그때도 골짜기가 시체로 메워졌다던가."

"그걸 어찌 아십니까."

누군가 묻자 속가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늙은이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얘기지. 하필 그런 자리를 또 전장으로 골랐으니, 영 께름칙한 일이야."

누가 골랐을까. 무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접었다. 잡졸이 알 일도,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었다.

무림맹의 진은 완만한 고지 위에 깔려 있었다. 비탈을 따라 목책과 방패진이 길게 늘어섰고, 그 뒤로 각 문파와 세가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화산, 무당, 종남, 남궁, 진가보. 서로 다른 이름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하나의 군진이었다.

고지 아래로는 너른 평지가 펼쳐졌고, 그 끝에서 지면이 푹 꺼져 내린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협곡 너머로는 검은 절벽이 길게 뻗었으며, 그 아래 어딘가에서 쉼 없이 물 우레 같은 소리가 올라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낭떠러지 저 밑에 큰 물줄기, 아니면 폭포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축축한 물비린내가 흙먼지 냄새에 섞여 끼쳤다.

화산의 잡졸들은 진의 중간쯤, 속가제자들 뒤편에 배치되었다.

명령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길고 나빴다. 할 일이 없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연신 물을 마셨고, 누군가는 같은 기도문을 웅얼거렸고, 누군가는 아까부터 말없이 흙바닥에 검끝으로 무언가를 긋고 있었다.

무현은 검을 반쯤 뽑았다가 도로 밀어 넣었다.

철컥.

첫 훈련 날 공터에 어지럽게 울리던 그 소리가, 이제는 한 번에 매끄럽게 났다. 고작 그 정도가 한 달의 전부였다. 왼발 반 보. 어깨 힘 빼고. 허리는 곧게. 왕철산의 호통을 속으로 한 마디씩 되뇌었다. 배운 것이 그것뿐이니, 붙들 것도 그것뿐이었다.

"긴장되나."

진곤이 옆에서 물었다.

"예. 손에 땀이 나서, 검자루가 자꾸 미끄러질 것 같습니다."

"흙을 좀 묻히게. 막일할 때도 그리하지 않았나."

무현은 시키는 대로 손바닥에 마른 흙을 비볐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 마음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진곤은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무현이 지형이며 저 아래 물소리를 더 살필 여유는, 거기까지였다.

맞은편 언덕과 벌판을 메운 적의 군세가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다.

붉은 깃발이었다.

핏빛 바탕에 검은 태양 문양이 새겨진 기가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그 아래 검붉은 옷의 무리가 줄지어 섰고, 좌우로는 행색이 제각각인 패거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저 검은 해가 그려진 깃발은 뭡니까."

누군가 묻자, 근처의 나이 든 속가제자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흑양교다. 마도의 신흥 종파인데, 이번 사파 연합의 돈줄이자 중심이라더군. 그 옆은 흑사방, 혈응채, 파혼문, 귀살곡. 이름 석 자만으로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는 무리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리가 한데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자들은 사람이라기보다 피비린내를 뒤집어쓴 짐승들 같았다.

붉은 깃발 아래에서 기괴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

심장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처럼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적진이 움직였다.

가장 앞에 선 검붉은 옷의 병사들이 창과 도를 치켜들고 전진했다. 걸음은 느렸으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피로 물든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 사파의 무리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들고 웃거나 고함을 지르며 쏟아져 내려왔다. 누군가는 사슬낫을 돌렸고, 누군가는 톱니 박힌 괴검을 어깨에 걸친 채 달려왔다. 살의와 광기가 벌판을 뒤덮었다.

"온다…."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

무림맹 쪽에서도 명령이 떨어졌다.

"전열 유지!"

"방패 앞으로!"

"궁수 준비!"

고지 위의 군세가 일제히 긴장했다. 화살 먹인 시위 소리가 줄지어 울렸다.

그리고 잠시 뒤, 더 직접적이고 더 잔인한 명령이 떨어졌다.

"속가와 보조병, 용병 전진!"

무현의 심장이 턱 막혔다.

저들, 곧 저와 같은 잡졸들과 진가보의 용병들에게 내려진 출격 명령이었다.

앞열의 용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기를 들고 튀어나갔다. 그 얼굴에는 공포보다 흥분이 먼저 떠올라 있었다. 무현의 발은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진곤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무현! 뛰어!"

그제야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고지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세상이 터져 버렸다.

하늘에서 먼저 화살비가 쏟아졌다. 무림맹 쪽 화살과 적진의 화살이 허공에서 뒤엉키며 날아들었다. 사람 몸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 목을 꿰뚫는 소리,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소리가 삽시간에 사방에서 터졌다. 앞에서 달리던 사내 하나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피가 튀었다.

"으아악!"

비명이 터지는 와중에 양쪽 전열이 마침내 충돌했다.

쾅!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히고, 창끝과 칼날이 쇳소리를 터뜨렸다. 사람과 사람이 들이받히는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살이 찢기는 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였다. 무현은 검을 어떻게 쥐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앞사람의 등을 따라 달렸다.

곧바로 적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검붉은 옷의 병사였다. 눈빛이 번들거리고 입가에 거품이 맺혀 있었다. 놈은 무현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도를 휘둘렀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칼날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머리카락 몇 올이 흩날렸다.

그때 옆에서 진곤이 악을 쓰며 몸을 던졌다.

"죽어라!"

진곤의 칼이 병사의 옆구리를 비스듬히 갈랐다. 그러나 상대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고꾸라지면서도 손에 쥔 짧은 철추를 휘둘렀고, 그것이 진곤의 어깨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곤이 휘청였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무현은 두 손으로 검을 치켜들고 그대로 내리쳤다.

왼발 반 보. 몸이 기억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칼날이 병사의 목덜미에 어설프게 박혔다.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 번으로 상대는 무너졌다. 피가 뜨겁게 튀어 얼굴과 입술에 묻었다.

멍하니 손이 떨렸다.

사람을 죽였다.

그 사실이 실감 나기도 전에, 곁에서 또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악!"

돌아보니 화산 쪽 잡졸 하나가 배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사파인이 히죽 웃으며 장검을 비틀어 뽑아내고 있었다. 사내는 쏟아지는 것을 두 손으로 붙들려다 그대로 얼굴부터 처박혔다.

전장은 사람이 죽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누가 쓰러졌는지, 누가 살았는지, 어느 쪽이 밀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피와 살점, 잘린 팔과 부러진 창대, 먼지와 비명이 뒤엉켰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다음 순간 목이 없었다.

'붙어 있어야 한다.'

진곤의 등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이 지옥에서 무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 위로 거대한 살기가 내려앉았다.

고수들이 합류한 것이다.

어디선가 푸른 검광이 번개처럼 내리꽂히며 검붉은 옷의 병사 셋이 한꺼번에 허리가 잘려 나갔다. 반대편에서는 검은 장포의 사파 고수가 허공을 밟듯 솟아올라 장력을 뿌렸고, 그 일격에 무림맹 쪽 병사 넷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무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섬광이 번뜩이면, 다음 찰나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본 그 폭풍이, 이제 사방에서 동시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무현과 진곤은, 그 폭풍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