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가 떨어진다 · 서프라이즈
von 나츠하나 · 2026-10-27
모래시계 · 잔량 134시간 00분 · 여행 2일차
돌바닥의 냉기가 먼저 오고 빛이 그다음이었으며, 자신이 어디에서 눈을 떴는가 하는 의문은 그보다 한참 나중에 왔다. 도윤은 낯선 천장을 향해 눈을 떴다. 낮은 들보와 천장에 매달린 마른 약초 다발이 보였고, 셔터 틈으로 아침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가 떠 보였다. 몸 아래는 소파도 침대도 아닌 돌바닥이었고 품에는 모래시계가 안겨 있었다. 낯선 상황에서는 익숙한 물건부터 확인하는 게 직업적 버릇이어서, 도윤은 일어나는 대신 그것부터 눈높이로 들었다.
모래가 떨어지고 있었다.
가는 모래 줄기가 위 유리구에서 아래로 소리 없이 일정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젯밤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어젯밤까지는 어느 쪽으로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던 모래였다. 한동안 바라보는 사이 노파의 말이 떠올랐다. 모래는… 간절한 쪽으로 떨어진단다. 어제는 시처럼 들렸던 말이 오늘 아침에는 눈앞의 사실이 되어 있었다.
몸을 일으켜 소지품을 점검하니 왼쪽 안주머니의 편지와 사진, 그 옆의 현금과 카드가 든 얇은 여행 지갑, 오른쪽 주머니의 회중시계까지 전부 잠들기 전에 넣어 둔 그대로였고 코트도 입은 그대로였다. 반사적으로 더듬어 본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은 없었는데, 호텔 책상 위 충전기에 꽂아 둔 채였다. 몸에 지니고 잠든 것은 여기 있고, 몸을 떠나 있던 것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윤은 그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가게는 어제의 그 가게인데 조금씩 달랐다. 물건들의 자리와 작업대 위의 도구 배열이 달랐고 커튼의 색이 덜 바래 있었다. 도윤은 그 차이를 하나씩 눈에 담으며 진열장 쪽으로 걸어갔고, 거기서 멈췄다.
놋쇠 원반이 벨벳 위에 놓여 있었다.
지름 십오 센티미터 안팎, 십칠 세기 양식의 아스트롤라베였다. 레테의 투각 사이로 눈금판의 각인이 유리 너머에서도 읽혔다. 표면은 손때보다 세월에 닳아 있었고 놋쇠는 사백 년은 된 색이었다. 경매에 나왔다면 도록 표지에 실렸을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이 관광객 골목의 작은 가게 진열장에서 뒤집힌 가격표를 달고 아침 빛을 받고 있었다. 어제는, 그 어제에는 이 진열장 구석이 비어 있었다. 성하가 샀다는 '별을 재는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도윤은 유리 앞에서 답을 얻었다. 별을 재는 도구라니, 평생 뭐든 재려고 드는 자신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하는 데까지 생각했을 때, 어딘가에서 이 물건의 계보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골목에서 덧창 열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고, 그 느낌은 거기서 끊겼다. 도윤은 그것을 붙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무엇도 확실하게 만들어 저울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물건의 출처보다 날짜가 먼저였다.
날짜는 우편 구멍으로 들어와 문가 바닥에 떨어진 조간신문에 있었다. 도윤은 이탈리아어를 읽지 못하지만 숫자는 만국 공통이었다. 8월 8일. 작년의, 아니 올해의, 그가 어젯밤 잠든 곳에서 일 년하고 한 달을 거슬러 온 날짜였다. 도윤이 신문의 숫자를 세 번 확인해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뒷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도윤은 반사적으로 모래시계를 품에 당겨 안으며 일어섰다. 도윤이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아는, 그러나 도윤을 알 리 없는 노파가 장바구니를 안고 들어오다가 가게 한가운데 서 있는 낯선 동양인 남자를 발견하고 멈췄다. 도윤은 변명을 계산했지만 계산이 서지 않았다. 잠긴 가게 안에서 아침을 맞은 외국인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그가 아는 어떤 언어에도 없었다. 여권이라도 내보이려던 손이 코트 주머니 안에서 멈췄다. 여권 역시 호텔 책상 위에, 오지 않은 물건들 곁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지금 그를 증명해 줄 것은 이 도시에 하나도 없었다.
노파의 시선은 도윤의 얼굴에서 내려가 품에 안긴 모래시계에 닿더니 거기 오래 머물렀다. 장바구니를 내려놓는 노파의 손이 조금 떨렸는데, 두려워서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도윤은 알 수 없었다. 노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도윤은 나중에 성하의 말버릇을 빌려서밖에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기뻐하는 것도 같고, 겁내는 것도 같은.
테레사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커피포트를 올리고는 앞문의 자물쇠를 열고 팻말을 영업 중으로 뒤집었는데, 문은 반쯤 열어 둔 채였다. 침입자를 안에 두고 가게 문을 여는 노파를 보며 도윤이 무어라 입을 떼려 하자, 노파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지금은 묻지도 답하지도 말고 앉아서 커피나 기다리라는 손짓이었다.
노파는 커피와 함께 마른 비스킷 두 개를 접시에 담아 내놓고는, 도윤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작업대로 돌아가 제 일을 시작했다. 저울에 무언가를 달아 공책에 적으면서 이따금 안경 너머로 도윤 쪽을, 정확히는 도윤의 품에 있는 모래시계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 시선이 올 때마다 도윤은 저울에 올라간 물건이 된 기분이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재는 사람의 시선이라면 그도 잘 알았다.
커피를 받아 들고 도윤은 평생 물건 앞에서 해온 대로 하기로 했다. 먼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었다.
아는 것. 오늘은 8월 8일, 성하의 여행 이틀째다. 성하는 살아 있다. 이 도시 어딘가에서, 아마도 조식 접시 앞에서, 화가 덜 풀린 채로 그러나 살아서 아침을 맞고 있다. 그 밤까지 남은 시간은 닷새다. 일 년 동안 천 번을 되감아 본 그 밤이 이번에는 앞에 있었다.
모르는 것. 모래가 다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도윤은 낙하 속도를 재려고 시계를 찾다가 웃을 뻔했다. 손목시계는 차지 않는 사람인 데다 휴대폰은 오지 않았고, 주머니의 회중시계는 십육 년째 4시 17분이다. 평생 시간을 재 온 사람의 수중에 가는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도윤은 주머니에서 4시 17분을 가리키는 회중시계를 꺼내 탁자에 놓고 습관처럼 태엽을 감았다. 세 바퀴 반을 감는 동안 초침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고, 도윤은 멈춘 시계 옆에서 제 손목의 맥박 위에 손가락을 얹고 초를 헤아렸다. 원시적이고 부정확했지만, 지금 이 도시에서 그가 가진 시계는 그것뿐이었다.
모르는 것, 둘째. 그 밤에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가. 경찰의 서류는 우연한 강도라고 말했고, 도윤은 일 년 동안 그 우연을 믿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연이라면 피하면 된다. 동선을 바꿔 그 골목을 지우고, 그 밤에 곁에 있으면 된다.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부터 다시 재야 할 것이다. 지금 가진 측정값으로는 어느 쪽인지 판정할 수 없었다.
가설. 모래의 총량과 낙하 속도가 가리키는 끝은 그 밤이다. 근거는 아직 모자랐고, 유리구 속 모래의 부피를 눈대중한 값과 맥박으로 잰 유속을 곱해 봐야 오차가 하루를 넘겼다. 그래도 증명보다 확신이 먼저 오는 때가 있다. 도윤은 그런 확신을 믿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믿어 보기로 했다.
그다음 항목은 성하였고, 그것을 적으려는데 손이 멈췄다. 어떻게 만나고, 무슨 말을 하나. 어젯밤 그가 잠든 그 호텔이 성하의 호텔이니, 호텔은 안다.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그리고? 일 년 뒤에서 왔다고, 닷새 뒤의 일을 안다고? 도윤은 그 대화의 경우의 수를 따져 보았지만 어느 쪽이든 성하의 첫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계산이 서지 않는 일은 시작하지 않는다는 평생의 원칙이 또 떠올랐지만, 도윤은 이번에는 그 원칙을 눌렀다. 계산이 서지 않아도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데 일 년과 한 번의 죽음이 들었다.
계산이 끝나기 전에 답이 먼저 골목으로 들어왔다. 돌바닥을 두드리는 구두 소리 하나가 열어 둔 문 틈으로 또렷하게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도윤의 손에서 커피잔이 살짝 기울었고, 잔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 그 걸음을 안다. 여덟 해를 들었고 일 년 동안은 상상 속에서만 들은 걸음이었다. 그 일 년 동안 도윤은 이 재회를 수없이 상상했다. 꿈에서는 대개 공항이었고 술에 기댄 밤에는 집 현관이었으며 제일 잔인한 상상에서는 그 골목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아침 가게에서 커피잔을 들고 있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걸음은 진열장 앞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 너머로 놋쇠 원반을 들여다보던 역광의 실루엣이 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테레사가 도윤을 보았고 도윤은 일어섰다. 무슨 말을 할지는 끝내 계산되지 않았고, 도윤은 계산하지 않은 말을 처음으로 하게 될 것이었다.
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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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서프라이즈
모래시계 · 잔량 132시간 30분 · 여행 2일차
문이 열리는 데 걸린 일 초 동안 도윤은 일 년을 다시 살았다.
역광 속에서 걸어 들어온 사람이 빛을 벗어나자 얼굴이 보였다. 사진과 액자 속에서, 꿈속에서만 보던 얼굴이 거기 서 있었다.
성하였다.
살아 있는 성하는 사진보다 키가 크고 기억보다 눈썹이 짙었으며, 상상한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나 있었다. 정확히는 화가 나 있으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성하는 도윤을 알아보고도 믿지 못한 채 문가에 굳어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도윤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삼켰다. 지어야 할 표정은 알고 있었다. 놀라게 한 사람의 장난기에 반가움을 조금 얹은 정도면 되는데, 몸이 지으려는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일 년 동안 유리컵 깨지는 소리에도 무너지던 그 몸 앞에 지금 죽은 사람이 걸어 들어와 살아 있는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도윤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그 통증에 기대어 겨우 표정을 잡았다.
"서프라이즈."
말해 놓고 보니 그것은 도윤의 인생에서 아무 계산 없이 나온 첫 말이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방금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성하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두 번 반복했다. 그러더니 언제 왔어, 어떻게 왔어로 시작해서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으며 왜 연락이 안 됐고 내가 문자를 몇 개를 보냈는지 아느냐는 데까지 질문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도윤은 커피 한 잔이 식는 동안 준비해 둔 세 개의 답을 순서대로 꺼냈다.
"어젯밤 자정 비행기로 왔어."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어. 여권이랑 폰이 다 그 안에 있었고."
성하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지더니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일은, 그 장부는 어떻게 하고 왔는데.
"감정은 하룻밤에 끝냈어. 마무리는 비행기에서 했고."
성하가 멈췄고, 짧은 정적 뒤에 입가가 움직였다.
"거봐. 하룻밤이면 됐잖아."
성하에게 그것은 승리 선언이었다. 캐리어 위에 앉아 던졌던 말이 맞았고 당신이 결국 내 말대로 했으니 내가 이겼다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도윤에게는 같은 문장이 다르게 들렸다. 하룻밤이면 된다며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그를 올려다보던 목소리와, 지키지 못한 그 하룻밤의 값으로 치러진 모든 것이 거기 들어 있었다. 일 년짜리 칼이 웃는 얼굴로 들어와 급소에 꽂혔다. 도윤은 웃는 것 말고는 견디는 방법이 없어서 웃었다. 성하가 그 웃음을 항복으로 읽어 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됐어." 도윤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았어."
화는 거기서 반쯤 꺾였지만 남은 반은 자존심의 몫이었다. 성하는 팔짱을 끼고 도윤을 위아래로 훑더니 선고하는 사람의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좋아. 근데 같이 온 건 아니니까, 숙소는 따로야. 당신 아직 벌 받는 중이거든."
가게를 나서기 직전, 성하의 눈이 진열장 구석에 삼 초쯤 머물렀다. 벨벳 위의 놋쇠 원반에 머물렀다가 도윤 쪽을 살피고는 얼른 비켜 가는 시선이었다. 오늘부터 도윤은 말하지 않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것을 둘 다 해야 했다. 그는 그 삼 초를 다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벌은 얼마든지, 무엇이든 받겠다고 도윤은 말했다. 그 대답이 너무 순순해서 성하가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을 했을 때 카운터 쪽에서 잔 받침 부딪는 소리가 났다. 테레사가 말없이 커피잔 하나를 더 올려놓고 있었다. 노파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성하 앞으로 잔을 밀어 주는 손길에는 처음 온 손님에게 하는 것치고 어딘가 오래된 데가 있었다. 성하는 잔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뜨겁다고 하면서도 내려놓지 않았다.
가게를 나선 두 사람은 성하의 도시를 걸었다.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성하는 벌써 이 도시를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여기는 아침마다 줄이 길고 저 집 젤라토는 피스타치오가 진리고 이 골목은 오후 네 시의 빛이 제일 좋다고 일러 주었다. 그런 목소리를 들으며 걷는 일을 도윤은 지난 일 년 동안 문자로만, 그것도 끝내 도착하지 않은 문자로만 상상해 왔다. 실물의 목소리는 상상보다 빠르고 자주 웃었으며, 웃을 때마다 도윤의 걸음이 늦어졌다. 성하는 기어이 도윤을 젤라토 가게 줄에 세우더니 두 개를 사서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는데, 피스타치오였다. 녹는 게 아까워서 도윤은 진리라던 그 맛을 아주 천천히 먹었다.
강이 나타나고 이어서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였다.
낮은 아치와 난간, 다리 위에 올라앉은 작은 집들까지, 스케치북에서 연필선으로만 보던 형태가 아침 강 위에 있었다. 물과 하늘이 통째로 비어 있던 그 마지막 페이지와 달리 세상에는 처음부터 물빛이 있었다. 성하가 끝내 칠하지 못한 색이 눈앞에서 흐르고 있었다. 도윤은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 말을 삼켰다.
"내년에 당신이랑 오면 제일 먼저 보여주려던 다린데." 성하가 난간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일 년 일찍 보여주네. 서프라이즈 값이야."
내년이라는 단어가 아침의 칼 옆에 나란히 꽂혔다. 성하에게 내년은 당연히 오는 것이었다. 결혼식과 첫 기념일과 이 다리가 있는 해였다. 그 내년이 어느 밤에 어떻게 사라지는지 아는 사람은 이 다리 위에 한 명뿐이었고, 그는 지금 반가운 얼굴을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성하는 난간 너머로 강을 내려다보며 가기 전에 이 다리를 꼭 그려야겠다고 말했다. 스케치는 금방인데 물빛이 어렵다고, 물색은 하루에 네 번 바뀌니까 제일 좋은 시간을 골라야 하고 그러니 마지막 날쯤 그리는 게 맞겠다고 했다. 혼잣말 반 계획 반인 그 말을 도윤은 잠자코 들으며,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애썼다.
"좋은 다리네." 도윤이 말했다.
"좋은 다리네, 가 끝이야?" 성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당신 정말 변한 게 없다. 여기까지 와서도."
일 년을 건너온 남자는 변한 게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정오의 종이 울릴 무렵 성하는 씻고 짐을 정리한 뒤 밀린 잠도 삼십 분만 자겠다며 호텔로 돌아갔다. 헤어지기 전에 성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오후에 저 가게 앞에서 봐. 당신한테 보여줄 물건이 있어. 뭐냐고 묻자 성하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는데, 규칙을 만들 때나 선물을 숨길 때 짓던 그 웃음이었다.
가게로 돌아온 도윤을 잠깐 바라보던 테레사는 아무 말 없이 카운터를 돌아 나와 가게 안쪽 복도의 좁은 문을 열었다. 침대와 의자가 하나씩, 거기에 물병 하나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창은 뒷골목 쪽으로 나 있었고 침대 위에는 방금 갠 것 같은 담요가 접혀 있었다.
"방이 오래 비어 있었어." 노파가 말했다. "방에도 손님이 필요한 법이지."
도윤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자 노파는 그중 한 장만 뽑아 가고 나머지는 도윤의 손에 도로 밀어 넣었다. 흥정도 설명도 없었지만 도윤은 이제 이 가게의 셈법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셈법을 좋아하는 성하가 들으면 반겼을 것이다.
뒷방에 푼 짐은 짐이랄 것도 없어서, 코트를 벗어 걸고 주머니의 것들을 꺼내 머리맡에 놓는 것이 전부였다. 도윤은 탁자에 모래시계를 세웠다. 모래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침보다 위쪽이 눈에 띄게 줄어 있지는 않았지만 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도윤은 모래시계 옆에 멈춘 회중시계를 나란히 놓고 하루 한 번 감는 태엽도 세 바퀴 반을 감았다. 시계는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감았다.
계획의 첫 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밤까지 성하의 곁에 있는다. 둘째 줄은 아직 절반만 쓰여 있었다. 그 골목에 가지 않게 한다는 데까지는 쉬웠지만 아침의 물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연이라면 골목을 피하는 것으로 끝나고, 우연이 아니라면 피한 골목의 다음 골목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판단할 근거가 모자라서 도윤은 결론을 미룬 채 지켜보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마감이 있었다. 셋째 줄은 오늘 오후부터 시작이었다. 성하가 보여주겠다는 물건이 진열장의 아스트롤라베라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물건이 왜 하필 성하의 눈에 들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목록은 오늘도 모르는 쪽이 길었다. 다만 어제와 달리 오늘의 목록에는 살아 있는 성하가 있었다.
창밖 뒷골목의 빛이 오후의 각도로 바뀌어 갈 무렵, 골목 끝에서 낯익은 걸음 소리가 돌아왔다. 또각. 또각. 이번에는 도윤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