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편지 · 테레사의 가게
von 나츠하나 · 2026-10-27
도윤은 봉투를 뜯지 않았다.
우편함 앞에서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른다. 위층에서 내려온 이웃이 옆에서 제 우편함을 열고 닫는 동안에도 도윤은 움직이지 못했다. 층계참마다 봉투를 다시 보느라 계단을 올라가는 데는 평소의 세 배가 걸렸고, 글씨는 볼 때마다 같은 글씨였다.
집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감정용 면장갑을 꺼낸 것이었다. 도윤은 장갑을 끼다가, 성하의 편지를 장갑 낀 손으로 만질 수는 없어서 도로 벗었다.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아 오래 보았다. 발신인 칸의 글씨는 볼수록 성하의 글씨였고, 그것이 문제였다.
한 시간쯤 지나 도윤은 봉투를 들고 스탠드 아래로 가서, 불빛에 비스듬히 비춰 종이의 결을 보았다. 중성지에 가까운 편지지용 봉투에 항공우편 스티커가 붙고 국제 소인이 찍혀 있었다. 소인도 우표도 평범했고 모서리가 눌린 것도 장거리 우편이면 흔한 일이었다. 이상한 데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도윤에게는 제일 이상했다.
봉투를 뜯기 전에 먼저 조명 아래 비춰볼 것이다, 종이의 산성도부터 따질 사람이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는데 도윤은 그 순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성하가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얼른 치웠다. 봉투는 칼을 쓰지 않고 손으로 뜯었다. 성하의 편지는 늘 그렇게 뜯었다.
성하는 편지를 짧게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 생일 카드에도 여백이 모자랐는데, 편지지는 한 장이었고 그것도 반을 채우지 못한 몇 줄이 전부였다. 도윤은 그 몇 줄을 읽었다.
우리가 서프라이즈로 만났던 이 주소로 와줘.
사랑해.
그 아래 적힌 주소는 피렌체 구시가의 골목 이름과 번지였다. 도윤은 편지를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가 다시 읽었다. 읽는 것은 두 번째가 더 어려웠다. 서프라이즈로 만났던, 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서프라이즈로 만난 적이 없다. 여덟 해 전 팔월에 접이식 의자와 유성우 사이에서 만났고, 그 만남에 놀란 사람은 통계를 준비해 간 도윤 쪽이었다. 피렌체의 주소에서 만난 적은 더더욱 없다. 도윤은 피렌체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글씨는 성하의 것이었고, 도윤은 그것을 감정사로서 확인했다. 표본이 필요해서 냉장고 앞으로 가 일 년 만에 자석을 떼고 여행 일정표를 가져왔다. 여덟 밤 아홉 날의 손글씨 가운데 팔월 십이 일 칸에는 별표가 있어서, 도윤은 거기서 서둘러 눈을 떼고 글자만 보았다. ㅎ의 꼭지를 끝에서 살짝 올려 붙이는 버릇도, 받침 ㄹ의 마지막 획이 다음 글자로 흘러드는 각도도 그대로였고, 문장 끝에서 필압이 옅어지는 것까지 같았다. 위조는 형태를 복제하지 결함을 복제하지 못한다. 편지의 글씨에는 성하의 결함이 전부 있었으니 진품이었다.
마지막 두 글자만은 감정하지 못했다.
소인 날짜를 다시 보니 발송된 것은 최근이었다. 편지를 맡기면 적어 둔 날짜에 부쳐 준다는 함, 느린 우체통을 도윤도 알고 있었다. 이 주가 무슨 주인지는 예식장의 젊은 직원이 이미 알려주었으니, 성하가 고른 배송일이 언제인지는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일 년 전의 성하는 결혼식 일 주년에 도착할 편지를 부쳤고, 결혼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편지는 제날짜에 왔다. 도윤은 식탁에 이마를 대고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봉투 안에는 한 가지가 더, 인화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요즘은 사진을 잘 인화하지 않는데, 성하는 지갑에도 냉장고에도 인화한 사진을 붙여 두는 사람이었다. 도윤은 사진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웃고 있었다.
루페로 들여다본 인화지에는 은염 인화 특유의 입자가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 떨어지는 광원의 각도는 일치했고, 경계선의 픽셀 뭉개짐도 그림자의 모순도 없었다. 합성이 아니었다.
도윤은 그 문장을 속으로 세 번 되풀이했다. 나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없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나는 이탈리아에 있다. 성하가 입은 카디건은 유품 상자에서 돌아온 그 카디건이고, 내가 입은 회색 셔츠는 지금 안방 옷장에 걸려 있는 그 셔츠다.
사진 속의 서도윤은 지금의 서도윤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늦은 오후의 빛이었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같은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성하는 인화한 사진 뒷면에 꼭 날짜를 적는 사람인데, 이 사진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을 날짜가 아직 없다는 듯이.
도윤은 밤새 사진을 감정했다. 배율을 올리고 광원과 각도를 바꿔 가며 몇 번씩 다시 보았지만 흠은 나오지 않았다. 합성이라면 도윤이 아는 모든 합성보다 완벽했고, 합성이 아니라면 그다음에 이을 문장이 없었다. 도윤은 평생 처음으로, 판정란이 비어 있는 감정을 끝냈다. 진품이다. 존재할 수 없는 진품이다.
새벽에 도윤은 서랍을 열었다. 켜는 순간 마지막 것들이 쏟아질까 봐 켜지 못했던 성하의 휴대폰이 일 년 동안 그 안에 있었다. 도윤은 충전기를 꽂고 화면이 켜지자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손가락은 번호를 잊지 않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게 되어서 켠 것은 아니었다. 식탁 위에 존재할 수 없는 사진이 놓여 있는 이상, 전화기 속의 마지막 것들은 더는 제일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화면은 일 년 전의 그날에 멈춰 있었다. 사진첩을 처음부터 볼 자신이 없어서 마지막부터 보기로 했는데, 그 전에 통화 목록이 먼저 열렸다. 맨 위는 도윤의 이름으로, 여행 이레째에 신호가 갔고 받지 않은 전화였다. 그 아래로 같은 이름이 몇 번 더 이어지면서 내려갈수록 간격이 벌어졌고, 성하가 마지막으로 받은 것은 닷새째였다. 이미 아는 참이어서 도윤은 목록을 닫았다. 문자함에는 임시 저장된 초안이 하나 있었다.
숙소 골목에 이상한 가게 있어. 당신 취향.
쓰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보내지 않은 문장이었다. 도윤은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일 년 전의 성하가 어느 골목에 서서 이 문장을 쓰고는 지우지도 보내지도 못한 채 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진첩의 마지막 사진은 저녁에 찍은 어느 가게 정면이었다. 셔터가 반쯤 내려가 있었고 그 틈으로 불빛이 한 줄 새어 나왔다. 진열장은 셔터 그늘에 가려 안이 보이지 않았고, 간판의 글자는 낡아서 반쯤만 읽혔다. 촬영 정보의 날짜는 여행 이레째였다.
도윤이 편지의 주소를 사진의 촬영 정보 옆에 놓아 보니 골목 이름이 같았다. 서프라이즈로 만났다는 주소와 성하가 마지막 밤에 찍은 가게, 보내지 못한 문자까지 세 가지가 한 골목에 모였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윤은 알 수 없는 것을 그냥 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도윤은 항공권을 끊었다. 일 년 전에도 끊었다가 다음 날 취소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취소하지 않았다. 가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지만,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몇 번을 다시 따져 보아도 저울은 평생 처음으로 불확실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회사에는 휴가계를 냈다. 작년의 휴가는 시작하기도 전에 일로 썼지만 이번에는 쓴다. 대표는 서류를 받아 들고 무언가 물으려다가 도윤의 얼굴을 보고는 묻지 않았다.
원장에게는 전화를 했다. 다녀올 데가 생겼습니다, 하고 도윤이 말하자 원장은 어디냐고 묻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 전화를 끊기 직전에는 도윤아, 시계는 가지고 다니니, 하고 덧붙였다. 도윤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네, 하고 대답했다. 절반쯤은 거짓말이었고, 이틀 뒤에는 참이 될 대답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편지와 사진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누군가는 착오라거나 위조라거나, 아니면 슬픔이 만든 것이라고 할 것이다. 도윤은 그 두 장의 종이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로 했다.
짐은 가볍게 쌌고, 편지와 사진과 스케치북, 그리고 성하의 휴대폰을 챙겼다. 문을 나서기 전에 도윤은 감정실에 들러 책상 왼쪽 모서리의 회중시계를 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는 따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하나쯤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기내에서 도윤은 편지를 세 번 다시 읽었다. 열한 시간 동안 세 번이면 참는 편이었다. 읽을 때마다 독서등에 비춰 보는 버릇이 나와서, 옆자리의 노부인이 두 번째부터는 못 본 척해 주었다.
일 년 늦은 휴가였고, 생애 첫 이탈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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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테레사의 가게
처음 보는 도시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제일 낯설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창밖으로 두오모의 지붕이 나타났을 때, 도윤은 그 곡선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성하가 스케치북 넷째 장에 연필로 스무 번쯤 겹쳐 그은 윤곽이었고, 실물은 그림보다 크고 낡았을 뿐 윤곽은 같았다. 성하는 늘 정확하게 그리는 사람이었다. 대상을 좋아할수록 더 그랬다.
호텔은 성하가 묵었던 곳으로 잡았다. 예약 사이트에서 그 이름을 확인하는 데도, 로비에 들어서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체크인 서류에 서명하며 도윤은 이 프런트 앞에 캐리어를 세우고 섰을 성하를 생각했다. 화가 덜 풀린 얼굴로,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라고 이미 반쯤 설렌 얼굴로.
방 창문에서는 두오모가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방이었을 것이다. 도윤은 그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 미웠다.
호텔 창문에서 두오모가 보여. 당신 몫까지 봐둘게.
당신 몫은 아직 남아 있어. 도윤은 커튼을 닫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보러 왔어, 늦었지만.
가게를 찾아간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편지의 주소는 구시가의 골목 안쪽이어서, 관광 지도의 큰길에서 두 번을 꺾자 소리가 줄었고 세 번째 꺾자 성하의 마지막 사진 속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휴대폰의 사진과 실물을 겹쳐 보니 셔터가 올라가 있고 각도가 조금 다를 뿐, 반쯤만 읽히는 간판 글자까지 같은 장소였다. 일 년 전 성하는 이 자리에서 이 가게를 찍었다. 밤이었고 셔터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하는 데까지 가서 도윤은 생각을 멈췄다. 그다음을 생각하러 온 것도 그다음을 바꾸러 온 것도 아니었고, 무엇을 하러 왔는지는 사실 그도 몰랐다. 편지가 오라고 해서 왔을 뿐이었다.
진열장 안에는 황도십이궁이 그려진 접시와 놋쇠 촛대, 별자리 지도책, 유리 문진 같은 오래된 것들이 있었다. 도윤은 금세 눈으로 그 물건 전부에 연대와 대략의 값을 매기고는, 그러는 자신이 지겨워서 문을 밀었다. 종이 울렸다.
가게 안은 어둑했고, 놋쇠와 종이와 밀랍 냄새가 감정실과 비슷해서 도윤은 잠깐 어지러웠다. 안쪽 작업대에서 고개를 든 노파는 놀라지 않았다.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가 아침 첫 손님으로 들어왔는데도 안경 너머로 도윤을 한 번 보고 조금 더 오래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작업대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파는 어서 오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커피를 내리마. 이야기가 길 것 같으니."
도윤의 영어와 노파의 영어는 둘 다 모국어가 아니어서, 대화는 느려도 모자람 없이 이어졌다. 도윤은 사진부터 꺼내지 않고 먼저 물었다. 일 년 전 여름에, 한국 여자가 이 가게에 왔었습니까. 혼자였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웃음이…
"기억한다." 노파는 도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잘랐다. "그런 손님은 잊는 게 더 어렵지."
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샀습니까.
노파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답할지 가늠하는 눈치였는데, 그건 도윤도 매일 하는 일이었다.
"별을 재는 물건." 노파가 말했다. "새길 것이 있어서 맡겨 두고 갔다. 아주 특별한 밤하늘을 새겨 달라더구나."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노파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찾으러 오지 않았지."
그 사람의 약혼자였습니다, 하고 도윤은 말했다. 였습니다, 라는 시제를 발음하는 데 힘이 들었다. 노파는 그 시제를 알아듣고 안경을 벗더니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노파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한참이 걸렸고, 도윤은 그동안 가게의 시계들이 저마다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윤은 편지에 들어 있던 사진을 꺼냈다. 이것을 보면 무언가 설명해줄 수 있을까 해서였지만, 사진을 받아 든 노파는 놀라지 않았다. 노파는 한참 들여다보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는데, 이미 아는 답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좋은 사진이구나." 노파는 그렇게만 말하고 사진을 돌려주었다.
그게 전부였고, 도윤은 무언가가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노파는 무언가 안다. 그러나 묻지 않은 것에는 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서 도윤은 묻는 대신 청했다. 그 사람이 맡긴 물건을, 제가 찾아가게 해주십시오. 값이 남았다면 치르겠습니다. 각인이 끝나 있다면… 그 사람 것이니, 제가.
노파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 대신 가게 안쪽, 도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보았다.
"안 된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도윤은 정식으로, 유족에 준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청했고, 유족이라는 단어에서 또 한 번 시제가 아팠다.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아직 여기 있을 시간이야."
물건을 아이라고 부르는 노파의 말투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다. 도윤의 세계에서 물건은 목적어였는데 이 가게에서는 주어였다. 도윤은 더 조르지 않고 물러섰다.
이야기가 성하의 마지막 밤에 닿은 것은 커피가 식은 뒤였다. 그 아이는 어떻게 갔니, 하고 노파가 물었다. 이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여행 이레째 밤에,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하고 도윤은 대답했다. 아무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노파는 이번에는 성호를 긋지 않고, 슬픔과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오래 가만히 있었다. 도윤은 그 표정을 어디서 봤는지 더듬다가 기억해냈다. 감정 결과가 예측과 맞았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을 때 자기가 짓는 얼굴이었다.
노파는 말없이 일어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고, 커튼 뒤에서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와 나무 상자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온 노파의 손에는 모래시계가 하나 들려 있었다.
놋쇠 틀과 유리로 된, 높이 한 뼘 남짓의 낡은 물건이었다. 도윤은 버릇처럼 연대를 가늠하다가 멈췄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양식은 십칠 세기인데 마모는 그보다 얕고, 유리의 기포는 오래된 유리의 것인데 투명도가 맞지 않았다. 사백 년 된 새 물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모래도 이상했는데, 한 알도 떨어지지 않은 채 전부 위쪽 유리구에 담겨 있었다. 도윤은 실례를 무릅쓰고 모래시계를 받아 뒤집어 보았지만 모래는 위쪽에 그대로 있었고, 다시 뒤집어도 그대로였다. 어느 쪽이 위가 되든 모래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하고 도윤은 물었다. 고장입니까, 아니면…
노파는 도윤의 손에 들린 모래시계를, 아이를 보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모래는… 간절한 쪽으로 떨어진단다."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도윤은 더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누가 만든 겁니까, 왜 저한테…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고, 더 물어도 소용없겠다 싶어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값을 치르려 하자 노파는 처음으로 웃었다.
"이 아이는 파는 물건이 아니야. 맡기는 물건이지."
호텔로 돌아온 밤, 도윤은 테이블 위에 가진 것들을, 편지와 사진과 모래시계를 늘어놓고는 코트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그 옆에 놓았다. 멈춘 시계와 떨어지지 않는 모래, 시간이 고장 난 물건 두 개가 스탠드 불빛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윤은 의자를 당겨 앉아 감정실에서처럼 그것들을 마주 보았다. 오늘 밤은 물건들이 그에게 묻는 것 같았다. 너는 무엇을 재러 왔느냐고.
구월의 밤은 생각보다 서늘했고 창틈으로는 강 냄새가 섞인 바람이 들어와서, 도윤은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는 대신 코트를 걸쳤다. 방 안에서 코트를 입고 앉아 있는 게 우스운 줄은 알았지만, 낯선 방에서는 익숙한 무게가 필요했다.
버릇처럼 중요한 것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안주머니에는 편지와 사진, 오른쪽 주머니에는 회중시계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지닌다는 감정사의 오랜 습관이었다. 캐리어는 열린 채 벽에 붙어 있었고, 스케치북은 침대 머리맡에, 성하의 휴대폰은 그 옆에서 충전 중이었다.
도윤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모래시계를 들어 유리 너머의 모래를 바라보았지만, 간절한 쪽으로 떨어진다는 모래는 여전히 한 알도 움직이지 않았다. 간절함이 모자란 걸까, 그럴 리가. 그렇다면 방향이 문제인가, 간절한 쪽이라는 게 어느 쪽인가. 아래인가, 과거인가, 당신인가. 거기서 생각의 끝이 흐려졌고, 비행과 시차에 일 년의 피로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밤 도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위쪽 유리구에 고요히 쌓여 있는, 아직 떨어지지 않는 모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