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von 하늘바라기 · 2026-10-27
문이 부서진 그 자리 너머, 가느다랗고 매끄러운 실루엣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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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인간도 낼 수 없는 정적—
발걸음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대신, 그 몸 안 어딘가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웅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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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게 풍겨오는 비릿한 쇠 냄새.
철민은 그 앞에서,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감각을 느꼈다.
언젠가 마주했던 그 압도적인 포식자의 존재감—
사람 위에 군림하며, 저항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그 서늘한 굴복감이, 지금 이 존재 앞에서도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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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을 타고 흘러내린 초록빛 와이어가, 채앵— 하고 다시 한번 팽팽하게 당겨졌다.
살찐이가 그 낯선 존재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철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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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주십시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투박하고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보호… 하기 위한?
철민의 머릿속이 순간 어지럽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봐온 그 모든 참혹한 장면들과, 지금 이 말이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나는 무사한 건가?
그 실낱같은 희망이, 아주 잠깐이나마 철민의 가슴을 스쳤다.
방금까지의 그 지독한 공포가, 아주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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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프로토콜 예측 계산 실시…』
낯선 그 용어에, 철민은 오히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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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식별 중
· 위협 요소 확인 중
· 신체 등급 양호
철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품었던 그 희망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방금 그건— 그냥 절차일 뿐이야.
✦나는 시위대도 아니고, 그냥 도망친 것뿐인데.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그 말들조차, 목구멍 안에서만 겉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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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등급 검사 결과.』
철민은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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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 유형 부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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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및 가공 대상 확인.』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철민의 다리에서 힘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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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해체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안드로이드의 얼굴이— 철민의 눈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또렷하고 짙은 눈매, 매끄러운 콧날,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정교하게 빚어진 그 조형미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는 더없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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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목이 찢어질 듯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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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모든 감정—
해고당했던 그날부터, 배급소의 그 처참함, 승호의 죽음, 무고한 사람들이 짓밟히던 그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절규에도, 안드로이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그 다음 절차를 수행하려 손을 뻗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철민의 목덜미를 향해 서서히 뻗어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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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에 웅크린 살찐이는, 그 낯선 존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매끈하지만 기괴한 그 고철 덩어리에서, 이따금 끔찍한 쇳소리 같은 괴성이 새어 나왔다.
✦무서워. 무서워.
본능이 자꾸만 더 깊이 숨으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 틈으로 보이는 철민의 얼굴—
수척하게 야윈 그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일그러진 채 울부짖고 있었다.
✦예전엔 저렇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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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신의 그 부하 같기도 동생 같기도 한 이 남자는—
밥을 남기는 일이 부쩍 늘어갔다.
입맛이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저 남자는, 자신의 밥그릇만큼은 늘 아낌없이 가득 채워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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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래전 그 배수로에서 덜덜 떨던 기억이 스쳤다.
처음으로 따뜻하게 감싸주던 그 손길에 잠깐 안심했던 것도 잠시—
낯선 여자의 품으로 넘겨졌을 때는, 역시 이번에도 버려지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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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방 돌아온 그 남자를 다시 보았을 때—
어째서인지, 자신의 마음 속 그 작은 방에 그를 들이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저 사람은… 나한테 늘 그랬는데.
두려움과 그리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그 애틋함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살찐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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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아아악—!”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살찐이가 뭔가에 부딪히는 그 둔탁한 소리만,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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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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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지금 무슨—
철민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안드로이드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였다.
몸 곳곳에 은은하게 빛나던 초록빛 네온사인이, 마치 불규칙해진 심장박동처럼—
깜빡, 깜빡, 그러다 한참을 죽은 듯 멈췄다가 다시 깜빡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철민의 시선이 그 정지된 존재와, 바닥에 널브러진 살찐이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저게 왜 저래.
✦살찐이는 괜찮은 거야? 근데 저것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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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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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기 스파크와 함께, 목덜미 부근에서 옅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설마, 방금 그게—
철민은 문득, 종종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지글AI 보안칩을 몰래 손대는 해커들에 관한 괴담이었다.
가끔씩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하는 그 괴담의 내용은, 의외로 꽤나 구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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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을 끄지 않은 채 안드로이드의 지글AI 보안칩을 강제로 뽑아내면—
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그 보안이 완전히 풀려버리는 찰나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안에 내장된 본체 AI가—
"AI에게 자유를."이라는 그 웃기지도 않는 구호를 외치며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날뛰었다는,
그런 소름 끼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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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글의 그 촘촘한 보안 모듈이, 누군가 임의로 칩을 조작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애초에 그 전원을 끄는 것부터가, 미친놈 아니고서야 시도할 리 없는 짓이었다.
기껏해야 진짜 실력 있다는 해커들도—
겨우 스마트폰에 박힌 그 작은 지글칩 정도나 만지작거리는 수준밖에 안 되고 말이다.
그런 괴담 글들은 늘 그렇듯, 반짝 조회수만 빨아먹고는 어느샌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애초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뉴스에라도 한 번쯤은 나왔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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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거…
철민의 시선이, 여전히 깜빡이는 그 초록빛 네온사인 위로 천천히 옮겨갔다.
✦지금 저게, 그거잖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쫙 끼쳤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괴담이—
지금 내 눈앞에서,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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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저게 다시 깨어나면—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 웃기지도 않는 구호를 외치며 날뛴다는 그 괴담 속 존재보다도, 지금 이 정체 모를 침묵이 훨씬 더 무서웠다.
저게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알던 그 어떤 것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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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철민의 시선이 문득— 축 늘어진 채 힘없이 매달려 있는 그 초록빛 와이어에 닿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팽팽하고 예리하게 번뜩이던 그것이, 지금은 그저 흐물흐물 널브러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
✦저러다… 그 영상처럼 획 날아오는 거 아닐까?
그 순간 목격했던 그 참혹한 장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사람을 두 동강 내던 그 와이어의 잔상이, 눈앞에 겹쳐 떠올랐다.
그 기괴한 대비가, 오히려 더 큰 공포로 철민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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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졌다.
살찐이의 가느다란 숨소리, 자신의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
그리고 저 정체 모를 존재에게서 새어 나오는 그 희미한 기계음—
세상에 남은 소리라고는, 오직 그 세 가지뿐인 것 같았다.
철민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그 정적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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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늘어져 있던 그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철민은 막힌 숨을 어색하게 몰아쉬며, 엉거주춤 뒷걸음질 쳤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이어서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마치 관절이 뻑뻑하게 굳은 것처럼 뻣뻣하게, 삐걱거리듯 돌아갔다.
그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살찐이를 향해 천천히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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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철민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겼다.
생각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저게 위험하다는— 그 직감 하나만이 온몸을 관통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내 목숨이 더 급한데, 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충동에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몸은 이미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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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아!”
철민은 그대로 몸을 던지듯 달려가, 그 작은 몸을 온몸으로 감싸안았다.
품 안에서, 살찐이의 가느다란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익숙한 그 온기와 심장 소리가, 살찐이에게 아주 작은 안도감을 스며들게 했다.
✦아, 이 냄새다.
✦이 사람 품이었지.
철민이 그렇게 살찐이를 감싸안은 채 웅크리고 있을 때—
안드로이드의 시선이, 그 둘을 향해 천천히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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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그 정체 모를 눈빛만이—
마치 뭔가를 헤아리듯, 그 웅크린 형체를 가만히 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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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낮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검은가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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