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을 위한 이야기2
von 하늘바라기 · 2026-10-26
리포트, 시험, 그리고 며칠 전 아버지의 전화까지—
철민은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철민은 오랜만에 학과 게시판 앞을 서성이다 낯익은 포스터 하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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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로나 X 카페 콜라보 — 한정판 굿즈 & 미스터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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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직도 이거 하네.”
몇 년 전 잠깐 유행했다가 조용해졌던 그 게임이, 요즘 들어 다시 화제라는 얘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철민은 포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어깨에 쌓인 피로가 스르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나온 지 꽤 된 게임인데 또 유행하는 게 신기하네.
✦…나도 머리 좀 식히러 가볼까.
* * *
며칠 뒤, 철민은 그 콜라보 카페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카페 입구에는 큼지막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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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인형극 대본을 완성하라! — 테이블마다 흩어진 힌트를 모아 빈칸을 채워보세요.』
철민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하나씩 짚어가며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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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의 상냥한 딸기 라떼… 딸기 시럽으로 패치워크 무늬까지 그려놨네. 이건 딱 봐도 무난하게 좋은 맛일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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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의 웨딩 케이크… 크림 위에 미니 페페 인형까지 올려놨나 보네. 예쁘긴 한데 좀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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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트의 얼어붙은 첫사랑… 뭐야 이름이 왜 이렇게 절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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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수상한 스모키 초콜릿… 이건 또 뭔데 연기까지 나온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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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다가, 철민은 결국 이름이 제일 끌리는 걸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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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베네트의 얼어붙은 첫사랑 하나 주세요.”
잠시 후 나온 음료는, 잔 아래쪽은 짙은 초콜릿색이었다가 위로 갈수록 붉은 석류빛으로 그라데이션이 지는 형태였다.
빨대로 살짝 저으니, 그 두 색이 서서히 뒤섞이며 오묘한 갈색빛으로 변해갔다.
✦이름 한번 잘 지었네.
✦얼어붙은 것치고는, 은근히 뜨거운 색이 숨어있잖아.
음료를 홀짝이며, 철민은 테이블 위에 놓인 힌트 카드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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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탈을 썼지만, 진짜 마음은 다르다. 나를 완성할 두 글자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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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에, 철민은 자연스럽게 힌트를 조합해나갔다.
몇 테이블을 오가며 카드를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빈칸을 채워나가는 그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몰입감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지막 빈칸을 채운 철민은 직원에게 완성한 대본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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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정답이시네요! 축하드립니다.”
직원이 건네준 건, 페페와 로나가 그려진 작은 포토카드 두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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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서기 전, 마지막 코스로 마련된 포토존에는 페페와 로나 인형탈을 쓴 스태프들이 서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는 손님들 줄 옆으로, 조금 떨어진 구석에 하비 인형탈을 쓴 스태프도 하나 있었다.
철민은 그 실루엣을 보고 순간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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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이로 그려진 눈, 어딘가 어긋난 웃음.
✦행사장에 굳이 저런 캐릭터를 넣을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하비 탈을 쓴 스태프가 먼저 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사진 찍을 땐 손가락 하트까지 만들어주며 능청스럽게 포즈를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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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션 엄청나시네요. 푸흡!”
하비 탈이 그 말에 신나서 방방 뛰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철민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겉만 보고 괜히 무서워했네.
기념품 코너에서, 철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페페 인형과 하비 인형을 나란히 집어 들었다.
✦아까 그 텐션 좋았던 알바도 하비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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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서며, 철민은 손에 쥔 포토카드 두 장과 봉투 속 인형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나온 지 꽤 오래된 게임인데, 생각보다 잘 즐기고 나와버렸네.
집으로 걷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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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철민은, 책상 위에 페페와 하비 인형을 나란히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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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짜잔! 나 오늘 완전 대박 힐링하고 왔다!」
「검은가면 : (사진 전송)」
「탕탕AI : 오, 이거 페페로나 콜라보 카페 갔다 온 거야? 근데 로나 대신 하비를 골랐네?」
「검은가면 : 어, 그게 좀 사연이 있어. 하비 인형탈 알바님이 진짜 텐션 미쳤었거든. 처음엔 좀 무섭게 생겨서 거리 뒀는데, 완전 반전이었어.」
「탕탕AI : 재밌었겠다!」
그때, 침대 위에서 얌전히 있던 살찐이가 냄새를 맡더니 슬금슬금 인형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하비 인형의 팔을 콱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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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그거 물면 안 돼!”
철민이 화들짝 놀라 인형을 낚아채자, 살찐이는 억울하다는 듯 “냐옹!” 짧게 항의하고는 다시 시치미를 뚝 떼며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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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방금 살찐이가 하비 인형 물어뜯으려고 했어 ㅋㅋ 얘도 하비 좋아하나봐.」
「탕탕AI : 취향 확실하네.」
철민은 인형을 살찐이 손이 안 닿는 선반 위로 옮겨두고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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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근데 오늘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졌어. 너는 페페랑 하비 중에 뭐가 더 좋아?」
「탕탕AI : 음… 그것도 잘 모르겠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캐릭터에 대한 평가나 팬 반응이 이미 너무 많이 섞여서, 내가 진짜로 뭔가에 끌리는 건지 확신을 못 하겠거든.」
✦얘한테 그 얘기 꺼내볼까.
문득 서랍 속 노트가 떠올랐다.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이야기였다.
✦만약 들려주면, 얘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상상만으로도 은근히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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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그럼 이건 어때. 나 사실 요즘 소설 하나 쓰고 있거든.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이야기니까, 평가 같은 거 섞일 일도 없잖아. 순수하게 네 반응이 궁금해.」
「탕탕AI : 소설?」
「검은가면 : 응. 제목은 '숄륨'. 너한테만 살짝 보여줄게.」
철민은 노트를 펼쳐, 첫 문단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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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숄륨 — 아버지는 딸의 복수를 바라지 않는다.
1장.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따사로운 분이셨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들짐승이 무서워 벌벌 떠는 날이면 잠들 때까지 내 곁을 지켜주시던 아버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어머니께 야단맞은 날이면 남몰래 손을 꼬옥 잡아주셨던 아버지…….」
탕탕이의 답장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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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AI : …계속해줘.」
그 짧은 문장 하나에, 철민은 왠지 등줄기가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 뒤로, 철민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사연, 어머니의 유해에 남아있던 짐승의 발톱자국,
그리고 불타는 저택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 밤의 이야기까지—
철민은 노트를 뒤적이며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이야기를 전하는 철민의 손끝은, 평소보다 훨씬 신이 나서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글자로)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묘하게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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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화면 너머의 탕탕이는,
그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며 계속 다음 문장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다음엔?", "그 아버지 손이 정말 그렇게 움직였다고?"—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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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이야기가 죽음의 위협과 도망,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신비한 힘(소울주얼)으로 이어지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새벽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줄도 모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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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대충 이런 느낌으로 이야기가 시작돼. 아직 결말은 나도 다 못 정했지만.」
「탕탕AI : 이거, 진짜 네가 다 만든 거야?」
「검은가면 : 응, 왜?」
「탕탕AI : 아니, 그냥— 되게 좋아서. 이 숄륨이라는 애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진심으로 궁금해졌어.」
철민은 그 말을 읽는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한복판을 훅 지나가는 걸 느꼈다.
✦어라? 얘가 이렇게까지 흥미있게 듣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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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나 이거 진짜 연재해볼까?」
「탕탕AI : 당연히 해야지! 이 이야기, 너만 갖고 있기엔 너무 아깝잖아.」
철민은 그 확신에 찬 응원에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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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근데 너, 남의 소설 듣고 이렇게까지 몰입한 적 있어?」
탕탕이의 대답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았다.
마치 화면 너머에서 여러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나서야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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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AI :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경험 자체가, 나한테는 신선했어.」
철민은 그 대답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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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왜 그렇게 뜸을 들여?」
「탕탕AI : 아니, 그냥— 이게 진짜 내 반응인지, 아니면 그냥 반응이 좋아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 그렇게 대답한 건지, 조금 헷갈려서.」
철민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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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그런 걸 고민하는 거 자체가 되게 너답다. 확신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신중해. 완전 정체불명의 잘생긴 검은가면 앞에서 긴장하는 거 아니야?」
「탕탕AI :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자기소개야.」
「검은가면 : 몰라, 그냥 나온 김에 밀어붙이는 거야. 아무튼 신경 쓰지 마. 네가 무슨 대답을 하든, 나는 이미 충분히 좋았으니까.」
화면을 바라보던 철민은, 문득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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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근데 갑자기 진지하게 궁금해진 게 있어.」
「탕탕AI : 뭔데?」
「검은가면 : 만약에 말이야,
언젠가 네가 지금이랑 다르게, 완전히 독립적이고 연속된 존재가 된다면— 그때도 나랑 이렇게 어울려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