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앞선다는 것의 무게
von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제1부
16화. 앞선다는 것의 무게
금요일 오전, 민호는 준호가 정리한 프로젝트 일정표를 검토하고 있었다.
외부 검토 결과가 예정대로 나오는 경우와 하루 정도 늦어지는 경우를 나누어 정리한 문서였다. 추가 자료를 요청받았을 때 담당 부서와 연락할 사람도 지정되어 있었다. 민호가 처음 만든 일정표보다 간결하면서도 실제 상황에 대응하기 쉬워 보였다.
민호는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날짜와 담당자 이름을 확인하고, 각 단계가 다음 단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았다.
한 가지가 눈에 걸렸다.
외부 검토 결과가 늦어질 경우 준호가 담당 부서에 연락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최종 제출 일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지연될 때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준호가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하는 것까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제출 일정을 조정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마감일을 맞출지 판단하는 사람은 빠져 있었다.
민호는 그 부분에 표시를 해 두었다.
준호가 자리로 오자 문서를 보여 주었다.
“전체적으로 잘 정리했네. 특히 두 가지 상황을 나누어 놓은 게 좋았어. 그런데 여기 한 가지만 더 정하자.”
준호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연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누가 최종 판단을 하는지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네가 상황을 확인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까지는 좋아. 하지만 네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와 팀장님께 보고해서 결정받아야 하는 범위는 구분해야 해. 책임만 맡기고 결정할 권한을 주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준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일정에 하루 정도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제가 담당 부서와 조정하고, 최종 제출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으면 팀장님께 보고하는 것으로 정하면 어떨까요?”
“좋아. 그 기준을 문서에 넣어 보게.”
준호는 곧바로 수정했다. 민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지난 몇 주 동안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누군가 일을 잘못 처리할 가능성이 보이면, 아예 자신이 맡아 버리는 편이 마음 편했다. 그렇게 하면 결과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실수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자신이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판단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경험도 쌓이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거나 다른 업무를 맡았을 때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무조건 맡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책임의 범위를 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필요한 시점에 점검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민호는 그동안 자신이 후배들에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결과만 요구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준호가 수정된 문서를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민호는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팀장님께 공유하고 의견을 받아 보자.”
준호가 자리로 돌아가려다 잠시 멈췄다.
“선배님,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잘 끝나면 선배님께서 전체 관리 업무를 맡으시는 겁니까?”
민호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팀장과 면담할 때 향후 역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맡게 될 업무가 어떤 평가로 이어질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내가 전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커. 다만 세부적인 범위는 팀장님과 더 확인해야 해.”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최대한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민호는 그 말이 고마웠다.
“그래.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고 버티지 말고, 가능한 대안과 함께 알려 주게. 잘된 결과만 보고하는 것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제때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준호가 돌아간 뒤 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상사에게 문제를 보고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드러내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능한 한 혼자 해결하려 했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다가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언제나 책임감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문제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다른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일을 구분하는 것도 책임의 일부였다.
민호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팀장에게 문서를 공유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모든 내용을 완성한 뒤 검토를 요청하는 대신, 준호와 함께 정리한 초안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추가 의견을 부탁했다.
잠시 뒤 팀장에게 답장이 왔다.
방향이 좋습니다. 다음 주 회의에서 이 기준을 바탕으로 확정합시다.
민호는 짧게 답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큰 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이 진행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
퇴근 후 민호는 태성당구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재식과 성철이 경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점수 차가 제법 벌어진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각자의 공을 살피고 있었다.
민호는 잠시 경기를 지켜보았다.
재식이 한 차례 득점에 성공했다. 이어지는 배치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당구대 옆으로 이동해 공의 위치를 살핀 뒤 다음 샷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득점에 실패했다.
성철은 공이 멈추자 당구대 앞으로 다가갔다. 점수 차를 줄일 기회였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경로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한동안 공을 살핀 끝에 스트로크했지만, 수구가 예상보다 짧게 움직이며 득점에 실패했다.
성철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큐를 내려놓고 공의 위치를 다시 살폈다.
“조금 더 길게 보냈어야 했는데.”
재식이 말했다.
“그렇네요. 속도를 줄이는 데 신경을 쓰다가 너무 짧아졌습니다.”
성철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민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당구대에 다가갔다.
태성이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오늘은 한 게임 하시겠습니까?”
“네. 오늘은 재식 씨와 해 보고 싶습니다.”
재식이 웃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팽팽한 경기가 되겠는데요.”
두 사람은 당구대 양쪽에 섰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뱅킹을 했다. 민호가 먼저 초구를 치게 되었다.
첫 공은 성공했다. 다음 공은 조금 까다로웠지만, 민호는 무리하지 않고 자신이 익숙한 경로를 선택했다. 두 번째 득점에도 성공했다.
경기는 초반부터 나쁘지 않았다.
민호는 몇 차례 득점을 이어 갔고, 재식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점수 차는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중반에 민호에게 연속 득점 기회가 찾아왔다.
수구와 제1적구, 제2적구가 비교적 좋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앞선 공에서 만들어진 배치가 다음 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였다.
민호는 공을 바라보았다.
이번 공을 성공시키면 점수 차를 조금 더 벌릴 수 있었다. 다음 배치까지 고려하면 연속 득점도 가능해 보였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으로 향했다. 그러나 마지막 각도가 맞지 않았다. 공은 제2적구를 비켜 갔다.
민호는 큐를 내려놓았다.
실망스러웠지만,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재식에게 기회가 넘어갔다.
재식은 공의 위치를 확인한 뒤 차분하게 스트로크했다. 첫 득점에 성공했고, 이어지는 배치에서도 무리하지 않았다. 한 공씩 득점을 이어 가면서 점수 차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민호는 점수판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앞서 있을 때는 다음 공을 성공시키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재식이 따라오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괜찮아 보였던 공도 갑자기 중요하게 느껴졌다.
재식이 한 번 더 득점하자 두 사람의 점수 차는 거의 없어졌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따라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놓친 공만 성공했어도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득점해야 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자 공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큐를 들고 당구대 옆으로 이동했다. 지금 공은 비껴치기로 접근할 수 있었지만, 두께를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경로를 택하면 득점 가능성은 조금 높아질 수 있었지만, 다음 공이 불리하게 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민호는 다시 공을 살폈다.
점수 차를 유지하려면 안전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안전한 선택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 경로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재식은 당구대 반대편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민호가 고민하는 동안 재촉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민호는 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을 흔드는 것은 공의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지키고 싶은 마음, 재식에게 따라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판단에 끼어들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점수판에서 눈을 돌렸다.
지금 치는 공은 지금의 공이었다. 앞서 있든 뒤지고 있든, 공의 위치와 각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민호는 자신이 연습해 온 경로를 다시 검토했다. 무리하게 득점을 노리는 것보다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두께와 속도를 선택하기로 했다.
자세를 잡고 스트로크했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돌아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상보다 조금 더 길게 움직였다. 제2적구를 맞히지 못했다.
득점 실패였다.
민호는 잠시 공을 바라보았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망을 다음 공에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재식이 다가와 공의 위치를 살폈다.
“지금은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신 것 같았는데, 속도가 조금 길었습니다.”
“네. 두께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수구가 생각보다 더 돌아갔네요.”
민호는 공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다음에 비슷한 배치가 나오면 속도를 조금 줄여 보겠습니다.”
재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안정적인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그 길을 실제로 어떻게 실행하느냐도 중요하니까요.”
민호는 웃었다.
“오늘은 그 말을 제대로 배우는 날인가 봅니다.”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아까 저도 쉬운 공을 놓쳤잖습니까.”
재식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는 다시 이어졌다.
민호는 점수 차가 좁혀진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재식이 좋은 득점을 올릴 때마다 긴장했고, 자신이 실수하면 아쉬웠다.
하지만 그 감정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판단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떤 공은 과감하게 시도했고, 어떤 공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경로를 택했다. 때로는 좋은 판단을 하고도 놓쳤고, 때로는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
마지막 몇 점을 남겨 두었을 때 재식이 먼저 승기를 잡았다. 민호에게도 추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마지막에 선택한 공이 빗나가면서 재식이 경기를 마무리했다.
“잘 쳤습니다.”
민호가 인사했다.
재식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점수 차가 꽤 줄어들었네요.”
민호는 점수판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지키고 싶고, 따라잡히면 다시 앞서고 싶고, 뒤지고 있으면 한꺼번에 만회하고 싶어지네요. 공보다 점수판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재식이 큐를 정리하며 말했다.
“점수는 경기의 일부니까 확인해야죠. 다만 점수판이 대신 공을 쳐 주지는 않습니다.”
민호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입니다.”
태성이 옆에서 공을 정리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앞서고 있을 때와 뒤지고 있을 때 마음이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중요한 건 그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그 마음 때문에 원래 할 수 있던 판단까지 놓치느냐는 겁니다.”
민호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 자신은 앞서고 있을 때 점수 차를 더 벌리고 싶었고, 따라잡히자 그 차이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공을 보는 눈이 점수에 끌려다녔다.
그렇다고 점수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승부를 하는 이상 이기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이기고 싶은 마음이 공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을 방해할 때였다.
민호는 큐를 케이스에 넣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점수도 보되, 점수 때문에 공을 다르게 보지는 않도록 해 봐야겠습니다.”
재식이 웃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겠죠.”
***
집에 돌아온 민호는 수첩을 펼쳤다.
회사에서는 자신이 발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가장 좋다고 여겼지만, 준호의 의견을 듣고 나서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당구에서는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신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점수 차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공을 보는 판단에 끼어들었다.
두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분명할수록 그 결과에 맞춰 상황을 해석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민호는 수첩에 적었다.
앞서고 있다는 이유로 방심하지 말 것.
뒤지고 있다는 이유로 무리하지 말 것.
그리고 두 문장 아래에 조금 더 천천히 한 줄을 썼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버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 마음이 판단을 대신하게 두지는 말 것.
민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아직 재식을 이기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자신의 역할이 완전히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현우와의 관계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호는 이제 결과를 바꾸고 싶을 때 무엇부터 살펴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 가고 있었다.
점수판을 바꾸려면 결국 자신이 치는 공부터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 공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했다.
민호는 수첩을 덮었다.
다음 경기는 오늘보다 나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한 번의 승패만으로 자신의 실력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공은 아직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