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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이번에는 내가 갈게요

von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24화. 이번에는 내가 갈게요

새벽 두 시.

윤서하는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강태준과 나눈 대화가 떠 있었다.

서하 씨, 아버지랑 이야기 끝났어요.

어떻게 됐어요?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 그런데 서하 씨랑 꼭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오늘 가게 끝나고 와요. 두부김치 해 놓을게요.

네. 꼭 갈게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평소 같으면 태준이 하트 하나라도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뜬금없이 자기 사진을 보내며 잘생겼느냐고 물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준도 생각이 많을 것이다.

자신이 해외로 나가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까지.

서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나도 참.”

시간을 갖자고 한 건 자신이었다.

태준이 연락을 줄였을 때는 서운했고, 연락이 오면 반가웠다. 그가 자신을 배려해 주면 고마우면서도 외로웠다.

마음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태준 씨.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네, 서하 씨. 안 자요?

잠이 안 와요.

저도요.

서하는 피식 웃었다.

대표님이 잠도 안 자면 회사는 누가 운영해요?

최도윤 씨요.

불쌍하다.

그러게요. 내일은 커피라도 사 줘야겠네요.

태준 씨가 사 줘요?

네. 서하 씨도 같이 사 줄까요?

서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내 몫은 내가 살게요.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그럼 제가 사 주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해요?

서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태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면서도, 자신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그 마음이 마냥 고마웠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는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밥 살게요.

좋아요.

그리고 태준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서하 씨.

네?

보고 싶어요.

서하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안았다.

몇 번이나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그 말을 마주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저도요.

잠시 후 태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서하는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여보세요.”

“안 자네요.”

“태준 씨도 안 자잖아요.”

“그러게요.”

전화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 씨.”

“네.”

“내일 가게 끝나고 만나면……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이야기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요. 제가 해외로 나가게 될 수도 있고, 아버지와의 문제도 있고…….”

태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서하 씨가 무섭다고 했던 것들, 저도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서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고마웠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없애 주겠다는 말보다, 함께 고민하겠다는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좋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데 태준 씨.”

“네.”

“이번에는 제가 갈게요.”

“……어디를요?”

“태준 씨가 사는 곳이요.”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서하는 괜히 긴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맨날 태준 씨가 우리 가게로 왔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태준 씨가 사는 세상을 조금 구경해 보고 싶어요.”

태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하 씨.”

“네?”

“정말 괜찮겠어요?”

그 질문에 서하는 웃었다.

“아직 안 괜찮을 수도 있죠.”

“…….”

“그래도 계속 무섭다고 도망만 다닐 수는 없잖아요. 태준 씨가 어떤 세상에서 사는지,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저도 조금씩 알아 가고 싶어요.”

그녀는 잠깐 숨을 골랐다.

“물론 제가 갑자기 멋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회장님을 만나서 말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적어도 태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어요.”

태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아직 고마워하기는 일러요.”

“왜요?”

“가서 길 잃으면 태준 씨가 데리러 와야 하거든요.”

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그리고 저 비싼 음식 못 먹어요.”

“알아요.”

“옷도 없어요. 그런 데 갈 만한 옷.”

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서하 씨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오면 돼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옷이 아니라 서하 씨니까요.”

서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또 이런다.

사람을 괜히 울컥하게 만든다.

“……그런 말은 반칙이에요.”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요. 더 이상해지니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웃었다.

전화를 끊을 무렵, 태준이 말했다.

“잘 자요, 서하 씨.”

“태준 씨도요.”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통화가 끝났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두부참이슬.

“뭐라고?”

박미자는 반찬통을 들고 있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서하는 앞치마를 두른 채 말했다.

“오늘 가게 끝나고 태준 씨 집에 가 보려고요.”

“집에?”

“네.”

“강 사장님 집?”

“네.”

미자는 반찬통을 내려놓았다.

“세상에. 드디어 우리 서하가 재벌가 입성하는 거야?”

“아니거든요!”

“그럼 뭐야? 상견례야?”

“아니라고요!”

서하는 얼굴이 붉어져 손을 내저었다.

“그냥 이야기 좀 하려고요. 태준 씨랑 앞으로 어떻게 할지.”

미자는 서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무섭지?”

서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서워요.”

“그런데 가려고?”

“네.”

“잘했네.”

서하는 놀라서 미자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럼. 네가 무서워하는 걸 억지로 참으라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가 보는 것도 좋지.”

미자는 서하의 앞치마 끈을 매만져 주었다.

“다만 하나는 기억해.”

“뭔데요?”

“네가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해서 네 세계를 버릴 필요는 없어.”

서하는 조용히 미자를 바라보았다.

“네 가게도, 네가 살아온 시간도, 네가 좋아하는 방식도 전부 너잖아. 그걸 부끄러워하지 마.”

미자는 씩 웃었다.

“그리고 혹시 그 집에서 누가 너한테 무례하게 굴면 나한테 전화해. 내가 반찬통 들고 달려갈 테니까.”

서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님, 반찬통은 왜 들고 가요?”

“무기로 쓰려고.”

“아, 진짜!”

미자도 웃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진지해졌다.

“서하야.”

“네.”

“너는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걸 누구한테 증명하려고 애쓰지 마.”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저녁 여섯 시.

서하는 가게 문을 닫기 전에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봤다.

평소에 입던 옷보다 조금 더 단정한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

머리도 평소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다.

화장을 진하게 하지는 않았다. 자신답지 않은 모습으로 그곳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윤서하.”

그리고 가게 문을 잠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준이었다.

가게 끝났어요?

네. 지금 나가요.

제가 데리러 갈까요?

서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니요. 주소 보내 주세요. 제가 찾아갈게요.

잠시 후 주소가 도착했다.

서하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태준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넓고 화려할까.

아니면 생각보다 평범할까.

그는 집에서도 회사에서처럼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 앞에서처럼 장난스러울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준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소개할지 궁금했다.

그의 집에 처음 가는 일이었다.

그저 남자친구의 집에 가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제 태준의 일상으로 한 걸음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뒤.

서하는 커다란 주택 앞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주택이라기보다 작은 저택에 가까웠다.

높은 담장과 정돈된 정원, 넓은 대문.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었고, 안쪽으로는 길게 이어진 진입로가 보였다.

서하는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화려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달랐다.

자신이 살던 동네의 골목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태준 씨, 저 도착했어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서하 씨!”

태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급했다.

“어디예요? 대문 앞이에요?”

“네. 그런데…….”

“잠깐만요. 지금 나갈게요.”

“아니, 괜찮아요. 저 그냥 기다리면…….”

전화가 끊겼다.

서하는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태준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평소 회사에서 입는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편안한 니트와 바지 차림이었다.

서하는 그 모습에 조금 안심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태준은 그녀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추웠죠?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방금 왔어요.”

“다행이다.”

그는 서하의 얼굴을 살폈다.

“긴장했어요?”

“조금요.”

“많이요?”

“……조금 많이요.”

태준은 웃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제 집에 놀러 온 거예요. 어려운 자리 아니에요.”

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집이…….”

“네?”

“너무 큰데요?”

태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살았어요?”

“네. 그런데 익숙해지면 그냥 집이에요.”

그는 서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서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수록 긴장이 조금씩 커졌다.

정원에는 잘 손질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깨끗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태준이 먼저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쪽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오셨어요?”

가사 일을 돕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현관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태준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옆에 서 있는 서하를 발견하고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준은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제 여자친구예요. 윤서하 씨.”

서하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서하입니다.”

여성은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께서 안에 계십니다.”

그 말에 서하의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다.

사모님.

태준의 어머니가 계신다는 뜻일까.

그녀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거실로 향했다.

넓은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와 높은 천장,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계단 쪽에서 여성 한 명이 내려왔다.

단정한 옷차림에 우아한 분위기.

그녀는 태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태준아, 왔니?”

“네, 어머니.”

태준은 서하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윤서하 씨예요. 제가 말씀드렸던…… 제 여자친구요.”

서하는 긴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서하입니다.”

태준의 어머니는 잠시 서하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태준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 말에 서하는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 자신을 밀어내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소파를 가리켰다.

“편하게 앉아요. 차라도 준비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서하는 태준과 나란히 앉았다.

태준은 그녀가 긴장한 것을 아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서하 씨, 우리 집에서 제일 맛있는 건 차가 아니라 라면이에요.”

서하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여기서 라면도 끓여 먹어요?”

“그럼요. 저 라면 좋아해요.”

“재벌집 아들도 라면을 먹는구나.”

태준이 웃었다.

“저도 사람입니다.”

“그건 아는데, 뭔가…….”

서하는 말끝을 흐렸다.

태준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태준이가 집에서도 그렇게 장난이 많아요.”

“네. 저한테는 더 심해요.”

“어머, 그래요?”

“어머니!”

태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하는 처음으로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도 태준은 태준이었다.

자신을 웃게 만드는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거실 입구 쪽에서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서하의 몸이 굳었다.

강현석 회장이었다.

태준의 아버지.

며칠 전 자신을 불러 만나자고 했던 사람.

서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회장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윤서하 씨.”

“네.”

“잘 왔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태준이와의 관계에 대해 나와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순간 거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회장은 아들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은 내가 서하 씨와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태준아.”

“서하 씨는 제 여자친구입니다. 서하 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빠져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서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신이 직접 이곳에 오기로 했다.

태준의 세상을 알고 싶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했다.

서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회장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태준의 시선이 서하에게 향했다.

서하는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제가 태준 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태준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태준 씨가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도 아직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배우고 싶습니다. 태준 씨가 살아가는 세상을요. 다만 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준 씨와 헤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준의 손이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쌌다.

서하는 그 손을 꼭 잡았다.

“저는 태준 씨의 돈이나 지위를 보고 이 관계를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지위 때문에 제 삶을 버릴 생각도 없습니다.”

회장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네.”

“태준이가 해외 법인으로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서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장은 말을 이었다.

“최소 일 년입니다. 상황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요. 태준이는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모든 결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태준이 끼어들었다.

“아버지, 그건 아직 결정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회장은 다시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있겠습니까?”

서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장거리 연애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태준이 지금처럼 매일 가게에 올 수 없을 것이다.

보고 싶을 때마다 만날 수도 없고, 힘든 일이 생겨도 곁에 있어 주지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자신은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태준이 없는 일상에서도 그를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 역시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서하는 이번에도 혼자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든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 것처럼.

서하는 다시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 여기서 무조건 괜찮다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일 것 같습니다.”

회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태준 씨와 떨어져 있는 게 무서울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힘들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부터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태준 씨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서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태준 씨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태준 씨도 제 마음을 대신 결정할 수 없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장은 말없이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솔직한 사람이군요.”

서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잘 보이려고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