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참이슬 두 병의 의미
von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23화. 참이슬 두 병의 의미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윤서하는 주방에서 두부를 썰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
말끝이 멈췄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눈빛. 그리고 서하가 어젯밤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던 사람.
강태준이었다.
“……왔어요?”
서하가 먼저 물었다.
태준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려 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어딘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네. 사장님이 오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언제요?”
“어제 전화로요. 남자친구 할인은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오라는 말이 아니었거든요?”
“그럼 오늘부터 오지 말까요?”
“……누가 오지 말래요?”
태준이 웃었다.
“그럼 앉아도 되죠?”
“손님이 앉는 데 허락까지 받아야 해요?”
“저는 특별한 손님이니까요.”
“아이고, 네네. 특별한 손님님. 얼른 앉으세요.”
서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태준이 구석의 익숙한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저 그가 다시 자신의 가게에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제까지 텅 비어 보이던 공간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서하는 도마 위에 칼을 내려놓고 물었다.
“오늘은 뭐 드실 건데요?”
태준은 메뉴판을 보는 척했다.
“두부김치 하나요.”
“술은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참이슬 두 병이요.”
서하의 손이 멈췄다.
“두 병이요?”
“네.”
“평소에는 한 병만 마시잖아요.”
“오늘은 두 병 마시고 싶은데요.”
서하는 태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웃고 있기는 했지만,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마른 것 같기도 했고,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요?”
태준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아니요.”
“거짓말.”
“…….”
“강태준 씨는 거짓말할 때 대답이 짧아져요.”
태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서하 씨한테는 못 당하겠네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요.”
“나중에요.”
서하는 그 말을 듣고도 더 묻지 않았다.
어젯밤 전화에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고, 혼자 결론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모든 걸 알아내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알았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서하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말해야 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하지만 막상 서하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를 웃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그 웃음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태준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숨기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었는데도 쉽지 않았다.
“자, 두부김치 나왔습니다.”
서하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두부와 매콤하게 볶은 김치. 태준이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태준은 젓가락을 들었다.
두부 한 조각에 김치를 올려 입에 넣었다.
“……맛있다.”
서하가 피식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아니요. 오늘따라 더 맛있네요.”
“배고팠나 보네.”
“그런가 봐요.”
태준은 몇 점을 더 먹었다.
그러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하를 올려다보았다.
“서하 씨.”
“네?”
“오늘 장사는 어때요?”
“평소랑 비슷해요.”
“힘들지는 않고요?”
“괜찮아요.”
“잠은 잘 잤어요?”
서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태준 씨.”
“네.”
“오늘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요?”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어요?”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서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거면 천천히 말해도 돼요.”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
“대신 혼자 끙끙 앓지는 말아요. 나도 그건 싫어요.”
서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태준이 그녀를 불렀다.
“서하 씨.”
“네?”
“고마워요.”
서하는 잠시 멈췄다.
“뭐가요?”
“그냥요.”
그녀는 작게 웃었다.
“또 그냥이래.”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태준은 그 자리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자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고마웠다.
그래서 더더욱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상처를 피하려고 진실을 감추는 건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일이었다.
태준은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오늘 두 병을 주문한 이유는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한 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술의 힘을 빌려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첫 번째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잔에 조금만 따랐다.
저녁 여덟 시가 넘자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하는 바쁘게 움직였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고, 빈 접시를 치웠다.
태준은 그런 서하를 바라보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평소라면 서하가 바쁜 틈을 타 장난을 걸었을 것이다.
“사장님, 저 배고파요.”
“두부김치 드셨잖아요.”
“그건 간식이죠.”
“그럼 집에 가서 밥 드세요.”
“서하 씨가 해 주면 먹을게요.”
그런 말을 하며 그녀를 귀찮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서하가 손님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아니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자기 일을 해내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버티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도 한 번 마음을 주면 진심을 다하는 사람.
그런 서하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결정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걸까.
자신의 삶에 중요한 사람이 생겼다면, 그 사람과 함께 고민하는 게 맞지 않을까.
태준은 두 번째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아직 뚜껑도 열지 않았다.
그때 서하가 다가왔다.
“태준 씨.”
“네?”
“첫 번째 병 거의 다 마셨네요.”
“그러네요.”
“오늘 술 많이 마시려고요?”
“……조금요.”
서하는 태준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하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무서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태준은 잔을 내려놓았다.
“사실은요.”
“네.”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어요.”
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이요?”
“네.”
“무슨 일이에요?”
태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저한테 해외 법인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서는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주방에서는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만 조용해졌다.
“해외 법인이요?”
“싱가포르요.”
“언제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니에요. 내일 아버지랑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서하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래요?”
태준은 잠시 망설였다.
“최소 일 년이라고 하셨어요.”
서하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일 년.
그저 숫자일 뿐인데, 그 숫자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동안 태준은 한국에 없을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가게에 찾아오는 일도, 퇴근길에 전화를 거는 일도,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도 쉽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요즘은 영상 통화도 있고, 비행기를 타면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이제 말해요?”
서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태준은 그 차분함이 더 무서웠다.
“미안해요.”
“어제 전화했을 때도 알고 있었어요?”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고 있었구나.”
“어제 아버지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서…….”
“그래서 말 안 했어요?”
“서하 씨가 겨우 조금 편해진 것 같아서요. 괜히 더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서하 씨.”
“……네.”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태준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아버지랑 이야기해 보고, 결정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서하 씨를 보니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서하는 시선을 내렸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을 것이다.
어제 겨우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었으니, 그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서하를 아프게 했다.
“태준 씨.”
“네.”
“나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요.”
서하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나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나한테 말하지 않는 건…… 조금 속상해요.”
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내가 아직 무섭다고 했잖아요. 태준 씨가 사는 세상이 무섭고, 내가 그 안에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요.”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를 빼고 태준 씨 혼자 결정하면…… 저는 언제까지나 태준 씨의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하가 말을 이었다.
“나는 태준 씨가 무조건 한국에 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가야 할 수도 있겠죠. 나 때문에 포기하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런데 적어도 나한테도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같이 고민할 수 있게요.”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
“서하 씨를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 마음이 편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서하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해결한 다음에 말하고 싶었어요.”
“태준 씨.”
“그런데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네요. 서하 씨가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 선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제가 마음대로 정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서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태준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다음부터는 숨기지 않을게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이어도 이야기할게요. 서하 씨가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요.”
서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럼…… 태준 씨는 가고 싶어요?”
태준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네?”
“싱가포르요. 가고 싶어요?”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회사 일만 생각한다면 갈 이유는 충분했다.
해외 법인을 직접 맡는 것은 중요한 기회였다. 경영자로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었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책임을 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에게는 지키고 싶은 일상이 생겼다.
퇴근 후 찾아갈 가게가 있었고, 매일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이유만으로 일을 거절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태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서하 씨.”
“네.”
“저는 서하 씨 때문에 무조건 안 가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회사 일 때문에 서하 씨와의 관계를 당연히 뒤로 미루고 싶지도 않아요.”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일 아버지와 이야기해 볼게요. 제 생각도 분명히 말씀드릴 거예요. 그리고 결정되기 전에 서하 씨와도 충분히 이야기하고 싶어요.”
서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더 고마워요. 화내지 않고 이야기해 줘서요.”
“화 안 난 거 아니에요.”
“……네?”
“속상해요. 많이.”
태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하는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태준 씨가 일부러 나를 아프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태준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우리 아직 서툴잖아요.”
태준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잘해 봐요. 혼자 결정하지 말고.”
그는 서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네. 약속할게요.”
그 순간 서하는 그가 오늘 두 병을 주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 번째 병은 말하기까지의 용기였을 것이다.
두 번째 병은 어쩌면 그 말을 꺼낸 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워서였을지도 몰랐다.
서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번째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네?”
“두 병이나 시켜 놓고 지금 한 병도 다 못 마셨잖아요.”
태준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네요.”
“오늘은 그만 마셔요.”
“한 잔만 더 마시면 안 돼요?”
“안 돼요.”
“여자친구가 너무 엄격한데요.”
서하는 눈을 흘겼다.
“남자친구가 걱정되니까 그렇죠.”
말을 하고 나서 서하는 스스로도 놀랐다.
남자친구.
자연스럽게 나온 그 단어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뭘요?”
“남자친구라고요.”
“싫어요.”
“왜요?”
“부끄러우니까요.”
태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진짜…….”
그는 서하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두 병 시키길 잘했네요.”
“왜요?”
“한 병만 시켰으면 이런 말 못 들었을 거 아니에요.”
“그건 술 때문이 아니거든요?”
“네. 알아요.”
태준은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 말만 기억하고 싶어요.”
서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요?”
“남자친구가 걱정되니까 그렇다는 말.”
서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 진짜! 이제 그만해요!”
“네, 사장님.”
태준은 웃으며 손을 놓았다.
오랜만에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웃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웃음이 끝난 뒤에도, 두 병의 소주가 놓인 테이블 위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밤 열한 시 반.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서하는 마지막 테이블을 정리하고 태준의 코트를 건넸다.
“이제 가요. 내일 아버님 만나야 한다면서요.”
태준은 코트를 받아 들었다.
“네.”
“잘 이야기하고 와요.”
“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든 연락해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하 씨.”
“네?”
“오늘…… 와도 된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서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한 적 없거든요.”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태준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
“안아도 돼요?”
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의 품으로 다가갔다.
“……네.”
태준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세게 붙잡지는 않았다.
언제든 그녀가 원하면 물러날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럽게.
서하는 그의 코트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이 났다.
그리웠던 냄새였다.
“태준 씨.”
“네.”
“싱가포르에 가게 되더라도…….”
그녀는 말을 멈췄다.
태준이 조용히 물었다.
“네. 말해 봐요.”
“아니에요.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니까.”
태준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결정되면 제일 먼저 서하 씨에게 말할게요.”
“……네.”
“그리고 제가 가게 되더라도, 우리 관계를 혼자 결정하지 않을게요.”
서하는 그의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나도 노력할게요.”
“무엇을요?”
“무서워도 도망치지 않는 거요.”
태준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밤이었다.
태준은 서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서하 씨.”
“태준 씨도요.”
“내일 연락할게요.”
“기다릴게요.”
그 말을 들은 태준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딸랑.
문 위의 종이 울렸다.
서하는 유리창 너머로 멀어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그는 돌아갔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어제의 빈자리는 그가 오지 않을까 봐 생긴 자리였다.
오늘의 빈자리는 그가 내일 다시 돌아올 거라는 약속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서하는 천천히 구석 테이블로 다가갔다.
태준이 앉아 있던 의자를 정리하고, 빈 소주병을 치웠다.
그리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두 번째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참이슬 두 병이라.”
그녀는 작게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술 두 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에게 두 병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한 병은 말하지 못했던 마음.
다른 한 병은 앞으로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
서하는 두 번째 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 오전 열 시.
태성그룹 회장실.
강현석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태준 앞으로 밀었다.
“읽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