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공녀님이 사라졌다
von 외인 · 2026-10-16
눈은 알람 없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검푸렀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드는 빛이 거의 없었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삼십 년 동안 몸에 박힌 시간이었다. 새벽 다섯 시.
이 몸은 그 시간을 몰랐을 텐데, 눈은 정확히 떠졌다. 몸이 말과 글씨를 기억하듯, 영혼도 기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만 돌려 옆을 봤다. 니나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자고 있었다.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어젯밤 열한 시까지 질문 공세에 시달린 아이였다. 깨우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이불을 걷었다.
이상하게, 몸이 어제보다 조금 가벼웠다. 밤사이 푹 자서 그런가. 아니면 저녁 약을 마신 지 한참 지나서인가. 레티시아는 그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다. 지금은 걷는 게 먼저였다.
침대 기둥을 잡고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벽을 짚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여섯 걸음을 넘겼다. 일곱, 여덟. 벽에 걸린 풍경화 액자를 하나 지나고, 둘 지났다.
문고리에 손이 닿았을 때는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그래도 섰다. 열두 걸음이었다. 어제의 두 배였다.
봐라. 장부는 거짓말을 안 한다.
문을 열자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붉은 융단이 깔려 있고, 벽마다 촛대가 꽂혀 있었다. 대부분은 꺼져 있었고, 군데군데 하나씩만 남아 흔들렸다.
레티시아는 벽을 짚고 걸었다. 벽지가 손바닥 아래에서 매끄러웠다. 비단이었다.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복도 끝에 계단이 있었다. 넓고 둥글게 휘어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이었다. 레티시아는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한 칸씩 내려갔다. 등산 내리막길과 같았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서두르지 않는다. 그건 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는 일이었다.
계단 한가운데에서 한 번 쉬었다. 두 번째 층계참에서 한 번 더 쉬었다. 그리고 1층에 닿았을 때, 그녀는 승리감에 차서 숨을 몰아쉬었다.
현관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집에는 늘 다른 문이 있다.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 레티시아는 부엌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를 찾아냈고, 그 끝에서 빗장이 걸린 작은 문을 발견했다. 빗장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두 손으로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밀어 올렸다.
문이 열렸다.
새벽 공기가 얼굴에 쏟아졌다.
차갑고, 축축하고, 풀 냄새가 났다. 레티시아는 문틀을 붙잡은 채 그 공기를 한참 들이마셨다. 3주 동안, 아니 어쩌면 2년 동안 이 몸이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공기였다.
정원은 니나의 말보다 넓었다. 잘 깎은 잔디밭이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장미 덤불에서 끝났다. 그 너머로 연못이 보였다. 연못 위에 물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하늘 끝이 아주 조금씩 묽어지고 있었다.
해 뜨기 직전.
전생의 그녀가 북한산 대피소 바위에 앉아 보온병 뚜껑을 열던 시간이었다.
저기까지만.
레티시아는 연못가의 돌 벤치를 목표로 정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서른 걸음쯤. 어림해 보니 침대에서 창가까지의 세 배였다.
무모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장사도 그랬다. 계산이 다 맞을 때까지 기다리면, 물건은 남이 가져간다.
잔디는 이슬에 젖어 있었다. 맨발에 닿는 감촉이 차갑고 간지러웠다. 열 걸음. 숨이 찼다. 열다섯 걸음. 다리가 떨렸다. 스무 걸음. 귀에서 웅웅 소리가 났다.
스물다섯 걸음째에 그녀는 장미 덤불 옆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았다기보다는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잔디밭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누웠다. 이슬이 잠옷 등판을 적셨다.
하늘이 보였다. 검푸른 색이 연보랏빛으로, 연보랏빛이 분홍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 예쁘다.
일어날 힘은 없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기도 버거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스물다섯 걸음. 어제는 여섯 걸음이었다. 하루 만에 네 배였다.
이 정도면 성장률로는 동대문 최고 점포 저리 가라였다.
그녀는 그대로 누워 해가 뜨는 걸 봤다. 장미 덤불 끝에 맺힌 이슬이 하나씩 빛으로 바뀌었다. 연못의 물안개가 흩어졌다. 새가 울었다.
그리고 깜빡, 잠이 들었다.
그레고르: 아가씨?
누군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인이었다. 검은 연미복 차림에, 손에는 은 쟁반 대신 정원 일지가 들려 있었다. 어제 문가에 서 있던 그 집사였다.
노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니, 무표정하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입가의 주름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레고르: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레티시아는 누운 채로 대답했다.
레티시아: 산책이요.
그레고르: ...산책 말씀이십니까.
레티시아: 네. 좀 길게 했더니, 쉬고 있었어요.
노인은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슬에 젖은 잠옷, 풀물이 든 맨발,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해를 보며 웃고 있는 얼굴.
그레고르: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정원을 둘러보는 것이 제 오랜 습관입니다. 사십 년 동안 이 시간에 이 정원에서 사람을 마주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레티시아: 그럼 저랑 같은 시간에 출근하시네요.
그레고르: ...출근 말씀이십니까.
레티시아는 아차 싶었지만, 노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연미복 윗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펴더니, 저택을 향해 낮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레고르: 토마스! 한스! 들것을 가져오너라. 조용히.
그 '조용히'는 지켜지지 않았다.
하인 둘이 들것을 들고 뛰어오던 바로 그때, 저택 2층 창문 하나가 벌컥 열렸다. 니나였다. 머릿수건이 반쯤 벗겨진 채로 창틀에 매달려 있었다.
니나: 아가씨가 없어요! 아가씨가 사라졌어요!
비명이 아침 공기를 찢었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2층의 창문들이 하나씩 열렸고, 1층의 문들이 쾅쾅 열렸다. 누군가 종을 쳤다. 개가 짖었다. 마구간의 말이 히힝 울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장롱이 튀어나왔다.
잠옷 바람이었다. 맨발이었다. 손에는 칼집도 없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오스윈: 누구냐! 내 딸을 데려간 놈이 누구냐!
바로 뒤로 율리안이 따라 나왔다. 셔츠 단추를 하나도 채우지 못한 채였고, 역시 검을 들고 있었다. 이마의 혹은 어제보다 조금 작아져 있었다.
율리안: 레티! 레티이!
집사가 한 손을 들었다.
그레고르: 주인님. 아가씨께서는 여기 계십니다. 산책 중이셨다고 합니다.
장롱과 그 아들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잔디밭을 내려다봤다. 들것 옆에, 집사의 연미복을 덮고 누운 레티시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레티시아: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의 손에서 장검이 떨어졌다.
레티시아는 들것에 실려 침실로 돌아왔다. 사양하려 했지만 다리가 따라 주지 않았다. 들것 위에서 보니 저택 사람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하녀, 하인, 요리사, 마부. 다들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그녀를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게 걱정만은 아니라는 걸, 레티시아는 알았다. 놀라움이었다. 그 까칠한 아가씨가, 2년 동안 커튼도 못 열게 하던 아가씨가, 제 발로 정원에 나갔다는 놀라움.
침실에서는 공작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처음으로 그녀가 머리를 내린 걸 봤다. 은빛 도는 금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올림머리를 할 틈도 없이 뛰어온 것이다. 공작가의 얼굴이 아니라, 그냥 엄마의 얼굴이었다.
공작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침대에 눕혀지는 것을 지켜보고, 하인들이 물러가는 것을 기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침대 끝에 털썩 앉았다.
엘레노어: 너는.
목소리가 떨렸다.
엘레노어: 너는 정말, 엄마를 몇 번이나 죽일 셈이니.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눈 밑이 거뭇했다. 3주 동안 밤을 새우고, 아침마다 단장을 다시 하던 얼굴. 그리고 오늘은 그 단장을 할 겨를도 없었던 얼굴.
전생의 그녀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엄마. 딸이 서울로 올라가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끝까지 손을 흔들던 엄마. 그 엄마한테 그녀는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말해 봤던가.
레티시아: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어머니.
방 안이 조용해졌다.
공작부인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문가에 서 있던 공작도, 그 옆의 율리안도 숨을 멈췄다. 니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레티시아는 뭔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그러다 니나가 어젯밤 한 말이 떠올랐다. 마님이 오시면 '시끄러워요'.
아. 이 아이는 사과 같은 걸 안 했구나. 아마 존댓말도 제대로 안 썼겠지.
공작부인의 입술이 떨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끝까지 공작가의 얼굴답게.
엘레노어: ...이 아이가 사과를 했어요, 오스윈.
오스윈: 들었소.
엘레노어: 존댓말로 했어요.
오스윈: 들었소.
공작은 문틀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장롱의 등이 들썩였다.
율리안만 예외였다. 그는 소리를 냈다. 아주 크게.
레티시아는 침대에 누워 그 소란을 바라봤다. 다리가 쑤셨다. 등판은 아직 축축했다. 그런데 가슴 한가운데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이 집 사람들은 손해 보는 장사를 너무 쉽게 한다. 사과 한마디에 이렇게 울어 버리면, 이 집 장부는 대체 어떻게 굴러가나.
그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드라벨: 공작 각하.
드라벨이었다. 새벽부터 불려 왔는지, 외투 단추가 하나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반지 세 개는 빠짐없이 끼고 있었다.
드라벨은 침대 옆으로 와서 레티시아의 손목을 짚었다. 그리고 길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드라벨: 각하.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아가씨의 몸은 유리 같다고.
오스윈: 면목이 없소, 선생.
드라벨: 맥이 매우 불안정합니다.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있으면, 저도 장담을 못 합니다.
레티시아는 그 말을 들으며 의원의 얼굴을 살폈다. 맥이 불안정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맥을 짚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손가락 세 마디도 안 되는 시간.
동대문에서 원단 검수를 저렇게 대충 하는 사람은 오래 못 갔다.
율리안이 눈물을 훔치며 앞으로 나섰다. 북부 기사단 부단장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율리안: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레티는 지금 무리하면 안 돼요.
그는 아버지를 돌아보고, 어머니를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침대 위의 동생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선언했다.
율리안: 오늘부터 레티의 운동을 금지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창가까지 걷는 것도요. 제가 직접 이 방 앞을 지키겠습니다.
레티시아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스물다섯 걸음.
하루 만에 네 배로 키운 실적이, 그렇게 영업정지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