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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혼자 맞는 마지막 아침

von 외인 · 2026-10-14

강금자는 자기 장례식 견적서를 세 장 받아 놓고 있었다.

강금자: A사는 꽃값이 너무 세고, B사는 수의가 너무 싸구려야. 사람이 마지막에 입고 가는 옷인데.

볼펜 끝으로 C사 견적서를 톡톡 두드렸다. 꽃 제단 120만 원.

강금자: 이거 90에 해 주면 오늘 계약해요.

전화기 너머 장례지도사가 잠시 말을 잃었다.

"저, 고객님. 혹시 어느 분 장례를..."

강금자: 내 거요.

"...네?"

강금자: 내 장례식이라고요. 석 달 남았대요. 그러니까 90.

결국 95에 합의를 봤다. 금자는 견적서에 동그라미를 치고 '완료'라고 적었다. 5만 원을 더 깎을 수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남의 장사도 남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고 문자 문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강금자: 기본으로 해요.

잠시 뒤 핸드폰에 시안이 도착했다.

<故 강금자 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 드립니다.>

금자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강금자.

64년을 쓴 이름인데, 마지막까지 정이 안 간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막걸리 한 사발을 비우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돈 많이 벌라고 금자. 그 자리에서 고민한 시간은 막걸리 한 사발보다 짧았을 것이다.

국민학교 때 별명은 '금자탑'이었다. 중학교 때는 '황금 돼지'였다. 동대문에서는 삼십 년 내내 '금자 언니'였는데, 그건 그럭저럭 장사꾼 이름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맞선이었다. 스물여섯 살, 다방에서 마주앉은 은행원은 이름을 듣자마자 커피를 뿜을 뻔했다. 스물아홉 살의 공무원은 "이름이 참 복스럽네요"라고 했는데, 그 눈빛이 딱 복덕방 보는 눈빛이었다.

이름값은 했다. 상가 건물이 두 채다. 그런데 이름 덕은 한 번도 못 봤다.

강금자: 할아버지도 참. 기왕 지어 줄 거면 연애운 있는 이름으로 지어 주지.

금자는 부고 시안에 '확인'을 눌렀다.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었다. 개명 신청서를 내도 처리 기간이 남은 수명보다 길었다.

책상 위에는 그런 서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상가 건물 두 채의 임대 장부, 세입자 명단, 은행 서류, 공증받은 유언장. 맨 위에는 손으로 쓴 목록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인생 정산 목록>

장례식장 계약 - 완료

영정 사진 고르기

건물 관리 인수인계 - 조카

미용실 외상 갚기 - 완료

석 달 전,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치료를 받으시면 조금 더 사실 수는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셔야 하고요."

금자는 그 자리에서 계산을 끝냈다. 병원 천장 보며 여섯 달. 내 집 천장 보며 석 달.

강금자: 남는 장사가 아니네요.

의사는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삼십 년 장사한 사람의 계산은 한 번 끝나면 잘 뒤집히지 않는다는 걸, 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영정 사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보는 두 장이었다. 작년에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 그리고 마흔다섯 살 때 동대문 첫 점포 앞에서 간판을 들고 활짝 웃는 사진.

강금자: 이걸로 하자. 내 인생 최고 실적 낼 때 얼굴이니까.

2번 옆에 '완료'가 붙었다.

유언장은 일찌감치 공증까지 끝내 두었다. 건물 두 채는 조카에게. 나머지는 예금이며 적금이며 보험 해약금까지 몽땅 기부였다. 보육원 두 곳, 무료 급식소 한 곳, 그리고 그녀가 열아홉에 처음 일했던 봉제공장 동네의 야학.

은행 직원은 서류를 받아 들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정말 전부요? 금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강금자: 착한 일을 해야 좋은 일이 생기는 거예요.

반은 진심이었다. 나머지 반은 장사꾼의 셈이었다. 저승에도 심사라는 게 있다면, 이 정도 실적이면 가산점은 받을 것이다. 보험은 들 수 있을 때 드는 법이다.

저녁에는 조카가 전화를 걸어 왔다. 건물 관리를 넘겨받을 아이였다.

"고모, 진짜 병원 안 가요?"

강금자: 가서 뭐 하게. 세입자 명단 다 외웠지? 3층 치킨집은 월세 매달 5일에 들어오는데 한 번도 제때 들어온 적이 없다. 7일까지는 기다려 주고, 8일엔 전화해.

"고모..."

강금자: 그리고 내 장례식 꽃값 95만 원에 해 놨으니까, 더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마.

"알았어요, 알았어. 아, 고모. 그거 알아요? 우리 수아가 요즘 보는 만화에선요, 사람이 죽으면 딴 세상 공주로 다시 태어난대요."

강금자: 공주?

"네. 요즘 애들 그런 거 엄청 봐요. 회귀니 빙의니 하면서. 죽었다 깨어나 보니 무슨 공작 집 아가씨가 돼 있고, 그런 거요."

금자는 코웃음을 쳤다. 손녀뻘 아이가 핸드폰을 붙들고 킥킥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걸 보면 공부는 언제 하나 싶었다.

강금자: 그럼 나도 공주 시켜 달라 그래라. 이번엔 이름 예쁜 걸로.

수화기 너머로 한참 말이 없다가, 조카가 코 매인 목소리로 웃었다.

"고모는 진짜... 강한 사람이야."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말이 귀에 남았다.

강한 사람. 평생 들은 말이었다. 칭찬이었고, 사실이었다. 열아홉에 보따리 하나 들고 상경해서,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남자한테 기대면 끝이다." 엄마가 남긴 유일한 재산이던 그 말을, 금자는 원금 한 푼 안 깎고 지켜 냈다.

텔레비전에서는 여행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백발의 노부부가 제주 바닷가를 걸었다. 할머니가 바람에 모자를 놓치자,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뛰어가 주워 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손을 잡았다.

금자는 리모컨을 든 채 한참 그 장면을 봤다.

그리고 목록의 빈칸을 내려다봤다.

5번. 몇 번을 썼다 지운 자리였다. 여행은 다녀 봤고, 맛있는 것도 먹어 봤고, 비싼 가방도 사 봤다. 다 해 봤다. 딱 하나만 빼고.

금자는 볼펜을 들었다.

연애

쓰고 나서 피식 웃었다. 달력을 보나 수명을 보나, 이건 기한을 넘긴 항목이었다. 장사하는 사람은 못 한 걸 못 했다고 적는 법이다.

그녀는 옆에 두 글자를 더 적었다.

연애 - 이월

그날 밤, 금자는 이불의 각을 맞추고 자기 침대에 누웠다. 장부는 닫혀 있었고, 목록은 한 줄만 빼고 전부 완료였다.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이름만 빼면.

정산 끝.

그런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이월된 항목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연애 한 번 해 볼 걸.

기왕이면, 이름도 좀 예쁜 걸로.

****************** ************************

눈을 떴을 때, 천장은 지나치게 높았다.

아, 저승이구나.

생각보다 인테리어에 돈을 많이 쓴 저승이었다. 금박을 입힌 천장 몰딩, 유리알 수백 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샹들리에. 저거 하나 닦는 데 인건비가 얼마야.

그녀는 누운 채로 상황을 정리했다.

죽었다. 확실. 여기는 저승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대체로 접수일 것이다. 어느 관청이나 창구부터 찾는 법이니까.

저승사자가 오면 물어볼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대기 시간, 구비 서류, 그리고 수수료.

물론 수수료는 돈이 아니고 생에서 지은 죄 가 같은 것일 거다.

그리고 중요한거 하나 더. 다음 생에 이름 지정이 되는지.

딸깍.

문이 열렸다.

저승사자치고는 너무 어렸다. 열대여섯 살쯤 된 소녀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검은 갓도 없고, 명부도 없었다.

눈이 마주쳤다.

쟁반이 떨어졌다.

니나: 꺄아아악!

저승은 직원 교육이 엉망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민원인을 보고 비명부터 지르는 창구라니.

레티시아: 얘, 진정 좀 하렴.

그 순간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가늘고, 높고, 맑았다. 삼십 년 동대문 바람에 까끌하게 섞인 금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녀는 눈을 끔뻑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주 이상한 걸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니나: 아, 아가씨가...

그러더니 몸을 홱 돌려 복도로 뛰쳐나갔다.

니나: 누구 없어요! 아가씨가, 레티시아 아가씨가 눈을 뜨셨어요!

발소리가 멀어졌다. 방에는 떨어진 쟁반과 엎질러진 차, 그리고 침대 위의 그녀만 남았다.

레티시아.

그녀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레, 티, 시, 아. 혀끝에서 사탕처럼 똑똑 떨어지는 소리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름 하나는 잘 타고났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손을 꺼냈다.

하얗고 가늘었다. 손목이 젓가락만 했다. 삼십 년 원단 두루마리를 나르던 손이 아니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맨들맨들한 손끝에, 손톱에는 연분홍색 기가 돌았다.

협탁 위에 은테두리 손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거울을 집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금다발 한 단도 안 되는 거울이 천근같았다.

거울 속에 소녀가 있었다.

열일곱쯤 되었을까. 햇빛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 하얀 얼굴에, 베개 위로 은빛 도는 금발이 흩어져 있었다. 눈은 봄에 나는 새잎 같은 연두색이었다.

소녀가 거울 너머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녀가 오른쪽 볼을 꼬집었다. 그녀도 꼬집었다. 아팠다.

레티시아: ...아이고, 이 양반아.

거울 속의 예쁜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걸 보고 있자니, 그녀는 조금 미안해졌다. 누구한테인지는 몰랐다.

그녀는 거울을 내려놓고 천장을 다시 올려다봤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

어디 보자.

나이, 예순네 살에서 열일곱 살. 마흔일곱 해 이익.

얼굴, 상급. 아니, 특상급.

이름, 레티시아. 이건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

집안, 이 방 천장만 봐도 계산이 안 끝났다.

체력, 바닥. 거울 하나 들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원금은 날렸는데, 이자로 원금보다 큰돈이 들어왔다.

역시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었다. 기부금 영수증이라도 챙겨 올 걸 그랬다.

이런 거래는 삼십 년 장사하면서 한 번도 못 봤다. 그리고 이런 거래에 따져 묻는 사람은 보통 기회를 놓친다.

그때, 복도 끝에서 우당탕 소리가 터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의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고, 치맛자락이 부산하게 스쳤다.

뒤이어 계단 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율리안: 아악!

"도련님!"

잠깐 잠잠해지나 싶더니, 곧 발소리가 다시 몰려왔다. 방금 무언가에 부딪힌 남자는 아픈 와중에도 달리는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울음인지 고함인지 모를 남자의 목소리.

율리안: 레티! 레티가 깨어났단 말이냐!

그녀는 이불 속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난리를 치며 달려오는 걸 보니, 적어도 자신이 깨어난 걸 반기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저 문이 열리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 목록의 마지막 줄이 떠올랐다.

연애 - 이월

아무래도, 정산이 한 번 더 남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누구든 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첫 거래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