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부인전
von 장지연
한편,
그 무렵 프랑스와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나라가 곧 영국이었다.
두 나라는 백 년 넘게 원수로 지내며 끊임없이 싸워 왔다.
서기 1338년부터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6세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고,
그 뒤 1356년에는 영국의 흑태자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를 크게 무찔러 프랑스 왕 장 2세를 사로잡았다.
그 후 몇 해 지나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다시 영국과 맞섰으나, 패하여 영토를 떼어 주고 막대한 배상까지 치른 뒤에야 겨우 화친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조정 안에는 두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왕실을 지키려는 아르마냑파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과 몰래 손을 잡고 프랑스를 어지럽히는 부르고뉴파였다.
두 파벌은 나라 안에서 끊임없이 다투며 내분을 일으켰고, 그 틈을 영국이 놓칠 리 없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를 다시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크게 무너졌고, 1417년 이후 영국은 거듭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를 압박했다.
마침내 두 나라는 조약을 맺었는데, 프랑스 왕의 딸 카트린을 헨리 5세의 왕비로 삼고, 장차 영국 왕이 프랑스 왕위까지 함께 잇는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파리로 들어가 프랑스 왕 샤를 6세를 사실상 몰아내고, 프랑스 전역을 손에 넣으려 했다.
이때 프랑스 북부의 많은 도시들은 이미 영국에 굴복한 상태였다.
오직 남쪽의 몇몇 지역만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 곧 훗날 샤를 7세가 될 인물을 받들어 영국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던 1428년, 영국은 다시 대군을 일으켜 프랑스 남부마저 완전히 쓸어 버리려 했다.
영국 해협 쪽에서부터 몰려드는 병력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고, 군기와 창칼이 하늘을 뒤덮어 해와 달빛조차 가릴 듯했다.
수군과 육군이 동시에 밀려들어 루아르 강을 건너 남쪽 땅을 침범하자, 프랑스 왕은 더 남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미 파리를 비롯한 수도권과 북부 대부분은 영국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프랑스는 수많은 병사를 모아 맞섰지만, 용맹과 전투력 모두 영국군을 당해 내지 못했다.
장수들 또한 영국처럼 지략과 용맹을 함께 갖춘 이가 드물었다.
게다가 조정의 대신들 가운데는 이미 영국의 눈치를 보거나 그 지시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왕은 몸을 의탁할 땅조차 넉넉지 않았고, 군사들은 더 이상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못했다.
사람들은 제 목숨 하나 건지기에 급급했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뜻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랑스 전체가 영국의 영토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백성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쳐 있었다.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스스로 타국의 종처럼 살아가게 될 처지인데도, 많은 이들은 그것을 치욕으로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만약 남쪽 지방마저 버티지 못했다면, 프랑스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때 끝까지 프랑스 왕을 지켜 주던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리안성이었다.
이 성은 루아르 강 북쪽에 맞닿아 남부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핵심 요새였다.
지형이 험하고 방어에 유리하여, 남쪽 지역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 만했다.
강 북쪽 언덕에 자리한 성과 남쪽 언덕 사이에는 큰 다리가 놓여 있어 왕래가 이어졌는데,
다리 남쪽에는 여러 겹의 성벽과 포대가 쌓여 있어 적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 방어 거점을 교두보라 불렀고, 다리 위에는 두 개의 돌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이름이 지미로였다.
북쪽에서 탑에 이르는 길은 흙과 돌로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지형 또한 몹시 험준했다.
또 탑의 남쪽에는 나무다리가 이어져 있어 곳곳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교두보와 지미로 두 곳에 병력을 두텁게 배치해 영국군을 막아 냈다.
아리안성은 바로 이 험한 지세와 견고한 성책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의 대장 솔즈베리 백작은 아리안성의 방어가 워낙 견고한 것을 보고 곧바로 계책을 세웠다.
‘이 성을 단숨에 깨뜨리기는 어렵다.
차라리 각지의 병력을 모두 모아 힘을 합친 뒤, 먼저 지미로를 무너뜨리는 편이 낫다.’
그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일제히 지미로를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3일 밤, 기습 공격으로 마침내 지미로를 함락시켰다.
영국군은 곧 돌탑 위에 대포를 설치하고, 성 아래 백성들의 집을 불태웠다.
험한 곳마다 병력을 배치한 뒤 아리안성을 향해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성안의 프랑스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버텼다.
영국군이 아무리 몰아쳐도 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영국 대장 솔즈베리마저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러자 영국은 다시 새로운 장수를 앞세워 밤낮으로 공격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영국군은 생각을 바꾸었다.
당장 성을 깨뜨리는 대신, 오랫동안 포위하여 구원군의 길을 끊고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성안의 병사들이 먹을 것을 잃으면 결국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영국군은 성 밖 곳곳에 흙을 높이 쌓아 인공 언덕을 만들고, 여섯 곳의 포대 위에 대포를 걸어 날마다 성을 포격했다.
그때가 바로 1429년 정월이었다.
아리안성은 그야말로 물샐 틈 없이 포위되었다.
새 한 마리조차 드나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른 곳의 프랑스군이 성을 구원하려 해도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주변의 용맹한 기사들과 장사들도 수천의 병사를 모아 아리안성을 구하려 했으나, 번번이 영국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모아 온 양초와 군수품, 식량만 적에게 빼앗길 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영국군의 강한 군세를 당해 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성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점점 기운을 잃어 갔다.
형세는 날이 갈수록 기울었고, 그 고달픔과 절망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말했다.
“차라리 일찍 항복하여 성 안 사람들의 목숨이라도 살리는 편이 낫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항복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쪽이 점점 많아졌다.
그럼에도 성 안의 프랑스 대장 디누아 공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이름난 장수였고, 항복을 입에 올리는 자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끝까지 싸워 지키자고 독려했다.
그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항복을 말하지 못했고, 성안의 군사들은 마침내 죽기를 각오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때 아리안성의 처지는 칼 위에 올려진 고기와도 같고, 끓는 가마 안에 던져진 살점과도 같았다.
한순간도 위태롭지 않은 때가 없었다.
옛날 우리 역사에도 이와 같은 때가 있었다.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당 태종의 백만 대군을 막아 내며 백여 일을 버텨 끝내 적을 물리쳤다.
을지문덕은 한 번의 계책으로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키고 나라를 지켜 냈다.
고려의 강감찬 역시 적은 병력으로 거란의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프랑스에는,
양만춘과 을지문덕과 강감찬 같은 충의의 영웅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고,
백성의 탄식은 하늘에 사무치는데,
이 거센 물결 한가운데에서 몸을 던져 나라를 붙들 의로운 인물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