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結婚)
von 한용운
순영은 대철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애를 썼다. 대철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마치 태반의 소원을 이룬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순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색주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제 몸은 더럽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체면도 아니고,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평생 간직해온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뵐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정말 못생겼지만, 제 몸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 점만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순영은 말을 이어가려다 주저했다.
"아, 그렇겠지요?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여자는 집안에 갇혀 지내고, 외출할 때는 누군가의 동행이 필요하니, 아무리 조심해도 일어나는 일들이 많지요. 술잔을 들고 손님을 대하면서도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대철은 순영의 말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로서 제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저는 제 못생긴 몸이라도 깨끗하게 유지하다가 선생님께 은혜를 갚을 기회를 기다려왔습니다."
순영은 망설이다가 겨우 이 말을 꺼냈고,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영은 정말 순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은혜를 갚겠다는 도덕적 관념으로 오랜 시간 대철을 생각해온 그녀가, 여자로서 차마 먼저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경솔함이나 무례함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한 성격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정순이 들어왔다.
"정순씨도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소리를 들은 순영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어쩔 줄 몰랐다.
"순영씨가 오셨군요."
정식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정순이 의아한 듯 순영을 바라보았다. 순영은 일어나 인사를 하며,
"여기 오세요."
라고 말했지만, 정순에게는 활발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그들은 대철을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대철에게는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 순영씨를 여기서 뵙게 되다니 의외네요."
정식이 말했다.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정순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 웬 일이냐?"
정순이 다그치듯 물었다. 순영은 정순의 웃음을 소리 없는 말로 받아들이며 불안해졌다. 그녀는 그때의 분위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없었다.
"저는 먼저 가겠어요."
순영은 일어섰다. "아닙니다, 더 놀다 가세요."
정식의 웃음이 밉살스러웠고, "우리가 와서 방해하는 것 같군요. 그러면 우리가 갈 테니 더 놀다 가세요."라고 말하는 정순의 태도도 그랬다. 대철이 "더 놀다 가세요."라고 말할 때, 순영은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섭섭했다.
순영은 그곳을 나서며 어두운 굴속에서 벗어난 듯한 시원함과 함께, 아끼던 보물을 잃어버린 듯한 슬픔을 느꼈다. 한 걸음에 뛰어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을 숙이고 가로등의 빛을 피하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순영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철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이 괴로웠고, 특히 정순을 만난 것이 더욱 불쾌했다. 왜 그날 저녁에 갔던 것인지 후회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순과 특별히 꺼릴 이유도 없었다. 대철을 만난 후, 정순이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없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알게 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대철의 태도가 기대와는 달리 냉담했던 것이 아쉬웠다. 순영은 대철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운명이 그에게서 시작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이 실패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대철의 말이 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하기도 했다.
순영이 대철에게서 나온 뒤, 그들의 대화는 순영에게로 향했다.
"선생님, 순영이를 그전부터 아셨나요?" 정순이 물었다.
"그전부터 알다니요? 어제 정순씨의 소개로 처음 인사했어요."
"그런데 순영이가 어떻게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어제 인사한 사람은 서로 심방을 못하나요?"
"어제 인사했다고 심방을 못할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밤중에 찾아온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딴은 이상한 일일세. 어제 처음 인사한 사람을 밤중에 찾아왔으니, 순영이가 수영하는 것을 보고 반한 것일세. 그렇지만 연애로는 너무 특급이야."
정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자네 말대로 수영 때문에 반했다고 하면, 나보다 더 잘하는 자네에게 반하지 않고 내게 반할 리가 없지."
대철도 웃었다.
"그거야 말이 그렇지, 아무리 수영 때문에 반했기로 단순한 수영만이 조건이 될 수는 없지.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지."
정순은 영리하게 알아차린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서 선생님도 이따금 그렇지 않으세요? 번연히 아는 일을 아니라고 뚝 잡아떼기가 일쑤구, 연애하는 남자들은 다 그런가 봐. 그저 어리석은 것은 여자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여자들은 속는 법이거든."
정순은 다시 정식을 향해 눈을 힐끔했다.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나까지 연루자가 되겠네. 바른대로 말을 하게."
정식은 대철을 보았다. 대철은 순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았다.
"그건 다 농담이고, 순영이 정체가 어떤 사람인가요?" 대철이 정순에게 물었다.
"왜 몰라서 물으세요?" 정순은 대철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 듯했다.
"모르지 어떻게 아나요? 자세히 아시겠지요. 말씀해 주세요."
"또 순영이 정체는 자세히 알아서 무얼 하세요?"
"기왕 말이 났으니까 들어보잔 말씀이지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저 여기 와서 색주가 노릇하고 있지요. 고향은 강원도라나요. 처음에는 누구한테 속아서 서울로 왔다가 홍숙자의 술집에 팔려온 모양이에요. 그래서 지금 술을 팔고 있지요."
"그런 이야기를 할 겨를이 있나요? 순영이가 와서 얼마 안 있자 두 분이 오셨는데요. 그리고 대강 말을 한들 제 말 듣고서야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있나요? 그러면 사람은 보잘것없이 타락된 사람이구요."
정순은 입술의 표정을 이상하게 하며 냉담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게 말할 것은 아니지. 색주가 아니라 아무 짓을 하더라도 저 하기에 달린 것이지, 술잔을 두고 앉았다고 덮어놓고 나쁘게 보면 안 되지요."
정식은 사리대로 말하며 대철을 위로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지요. 순영이는 그 집에 와서 있는 지가 삼 년이나 되서도 이렇다는 말이 없어요. 그런데 있는 계집애들이 나이 열 너댓 살만 되어도 별별 행동이 다 많은데, 순영이는 나이 열여덟이나 되고 인물도 미인은 아니라도 그 만큼이나 되었는데도 이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은 난잡하든지 그렇든 않은 모양이어요."
정순은 정식을 보고 다시 대철을 보았다.
"그런 일이야 비밀이니 만큼 누가 아나요? 색주가로 있는 계집애가 나이 그만큼이나 되고서 성 할 수가 있나요. 그런 일은 소문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거든요."
대철은 더욱 정순의 말이 자세히 나오기를 원했다.
"아니오, 그런 일이 아무리 비밀이라 하지마는 남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는 일일수록 탄로가 나기 마련입니다. 순영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보증합니다. 그래서 인천 바닥에서는 순영이가 아주 얌전하다고 야단입니다."
정순은 순영의 변호보다 자신의 말을 세우기 위해 힘있게 말했다.
"글쎄요, 정순이가 그렇다고 하시는 것을 구태여 아니라구 할 수는 없으니, 그렇기가 쉬울까요, 원?"
대철은 오히려 미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순영이 행동을 자네가 그렇게 새삼스럽게 물을 것이 무엇인가? 자네 암만 해도 순영이에게 다른 생각이 있나 봐."
정식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기왕 말이 났으니까 말일세. 그런 것이 다 이야기지 별말 할 것이 있나. 심심한데 그런 얘기가 좋지 않은가."
대철은 자신의 무슨 의미를 그렇게 돌리려 했다.
"그러지 마시고 연애를 하려면 하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순영이가 난잡하지 않은 것만은 제가 보증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 애가 원체 얌전하니까 손님들도 귀엽게 보아서 술 먹으러 가면 돈냥씩이나 집어주고, 그 주인 마누라도 이따금 금 뭣에 쓰든지 쓰라고 돈 원씩이나 착실히 주어서, 지금 저금한 돈이 삼 년 동안에 수백 원이나 되나 봐요.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저만 알지요. 저 보고서는 무슨 말이든지 속내를 다 이야기하거든요. 어쨌든 그만한 사람이 쉽지 않으니 연애를 하시려면 하세요. 망설이지 마세요."
정순은 반 농담으로 말했다.
"술꾼들이 돈푼씩이나 주었기로 무슨 수백 원에 되겠어요? 쪽해야 몇십 원 되겠지."
대철은 심상히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정으로 알고 싶었다.
"아니오, 그것은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지요. 제가 얼마 전 순영이가 저금하고 오는 길에서 만나서 저금통장을 보았는데요. 그때에 벌써 이백 몇십 원인가 되었으니까, 그 사이에 얼마간이라도 붙었겠지요. 오래잖아 한 밑천 꺼리가 될 텐데요. 사람은 고만큼 되기가 어려워요. 살 아끼고 인정 있고 그러기에 저는 성미가 야릇해서 별로 친한 애들이 없어요. 순영이하고는 참 친합니다."
정순은 그 말을 듣고 순영을 한껏 칭찬했다. 그들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