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von 한용운
다음 날.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인데 순영은 벌써 정거장에 나와 있었다.
전보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명일 오후 착〉
하지만 인천으로 드나드는 기차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다.
오후라고만 적혀 있으니 정확히 몇 시 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순영은 차라리 일찍 나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기차는 몇 번이나 들어왔다.
증기 소리와 함께 플랫폼이 흔들릴 때마다 순영 가슴도 함께 뛰었다.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만 봐도—
마치 행복을 가득 싣고 자기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와도—
그 속에 대철은 없었다.
그래도 순영은 원망스럽지 않았다.
다음 기차가 또 있었으니까.
조금 더 기다리는 시간조차 어쩐지 행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거의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순영은 마침내 기다리던 얼굴을 발견했다.
기차에서 내리는 대철.
순영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그녀는 자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대철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선생님!”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자 그 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철은 돌아보자마자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니, 여기까지 왜 나오셨어요?”
그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순영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웃었다.
“저 오전부터 나와 있었어요.”
그리고 조금 투정 섞인 얼굴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미안합니다.”
대철은 웃으며 말했다.
“안 나오셔도 됐는데.”
하지만 순영은 이미 그의 손에 들린 짐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엔 가방.
다른 손엔 사과 바구니.
“이리 주세요.”
순영은 두 손을 벌리며 몸을 숙였다.
“제가 들게요.”
대철은 잠시 웃더니 사과 바구니만 넘겨주었다.
가방은 끝까지 자기가 들었다.
순영은 사과 바구니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어머, 사과예요?”
그녀는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며 활짝 웃었다.
“이거 진짜 좋아 보이는데요?”
“원산 명산입니다.”
대철이 말했다.
“순영 씨가 사과 좋아하시잖아요.”
그 말에 순영 눈이 먼저 웃고 입이 나중에 웃었다.
“조금 더 사 오려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못 가져왔습니다.”
“아유, 이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순영은 사과 하나를 슬쩍 만져 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절 사과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하시나 봐요.”
대철이 피식 웃었다.
“별명이라도 붙인 셈입니까?”
“그런 셈이죠.”
순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과 잘 먹는 순영.”
“그 정도 별명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함께 정거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대철이 말했다.
“예전 여관으로 갈까요?”
하지만 순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멀기도 하고 재미없어요.”
그리고 대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제가 따로 방 알아놨어요.”
대철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방을요?”
“네.”
순영은 손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여관은 아니고 그냥 조용한 집인데, 제가 잘 아는 집이에요.”
그녀는 괜히 뿌듯한 얼굴이었다.
“주인도 늙은 여자 혼자 살아서 편해요.”
대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거기까지 신경 써 주셨군요.”
순영은 괜히 얼굴을 붉혔다.
“자, 이쪽이에요.”
그녀는 사과 바구니를 안고 앞장서 걸었다.
순영이 안내한 집은 정말 조용했다.
숙자네 집에서 몇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작은 기와집 하나.
마당도 넓지 않았고 방도 많지 않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깨끗했다.
늙은 집주인 여자는 인상이 순했고 말수도 적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순영과 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건넌방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순영은 가장 먼저 대철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금세 눈빛이 흐려졌다.
“선생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얼굴이 많이 축나셨어요.”
대철은 피식 웃으며 자기 광대뼈를 손으로 만졌다.
“그런가요?”
“당연하죠.”
순영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생하셨잖아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편지에 돈 때문에 걱정이라고 쓰셨던 거… 결국 어떻게 됐어요?”
대철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되긴요.”
그는 한숨처럼 말했다.
“요즘 세상에 돈 구하는 게 그렇게 쉽습니까.”
순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리고 괜히 분한 얼굴로 말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원래 남 사정 안 봐주잖아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피식 웃었다.
“부자는 돼지 같다잖아요.”
말하고 나서 스스로 민망해진 듯 웃음을 터뜨렸다.
대철도 웃었다.
“그건 괜히 세상 탓하는 거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다 내 능력 부족입니다.”
그러다 문득 순영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데 순영 씨는…”
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오히려 얼굴이 좋아진 것 같은데요?”
순영은 손바닥으로 두 볼을 감싸며 웃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투정 부리듯 말했다.
“요 며칠 사이에 쪽 빠졌는데요.”
“왜요?”
순영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성미가 급해서 그렇죠 뭐…”
그리고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편지 보내 놓고 답장 기다리느라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대철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순영은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송씨가 죽은 일.
유산으로 돈이 생긴 일.
숙자가 남은 기한 문제를 허락해 준 일.
이제는 언제든 결혼해도 거리낄 게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작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까지.
순영은 숨김없이 다 말했다.
대철 역시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다.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금광 출원을 마친 일.
곧바로 광산 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일.
그 뒤로는 시굴 자금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는 이야기.
그리고—
순영 편지를 받고 결국 인천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까지.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대철 마음속에는 여전히 현실적인 걱정이 남아 있었다.
“결혼은…”
그는 천천히 말했다.
“나도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습니다.”
순영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광산 일을 하려면 당분간은 계속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철은 솔직하게 말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가정이 안정되기까지는 쉽지 않을 겁니다.”
순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는 곧바로 말했다.
“저도 같이 다니며 고생할 수 있어요.”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정 안 되면 저 혼자 있어도 되고요.”
대철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순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바느질이든 빨래든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손을 꼭 모았다.
“선생님 일하는 데 방해만 안 되면 돼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순영 눈빛이 흔들렸다.
“선생님 없이 작부로 사는 것보단 훨씬 나아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대철은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두 사람 마음은 완전히 하나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