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von 한용운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빗물 젖은 하늘 위로 길게 퍼져 나갔다.
순영은 멀리 숨어 선 채 그 연기만 바라보았다.
대철이 지금 어느 칸에 타 있는지.
창밖을 보고는 있는지.
자기를 떠올리고는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멀어지는 기차만 보일 뿐이었다.
전송객들이 하나둘 정거장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순영은 다시 몸을 숨겼다.
혹시라도 누가 자기를 볼까 봐.
하지만 눈만큼은 끝내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식과 정순이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식은 거의 정순 어깨를 감싸듯 가까이 붙어 있었고, 두 사람은 아까보다 훨씬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정순을 향해 치밀던 질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봄눈 녹듯이.
대신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부러움.
아주 깊고 애틋한 부러움이었다.
순영은 멍하니 그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기차 연기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기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이 흐려진 탓인지.
순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지금쯤 어디쯤 갔을까…’
그 생각이 들자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식과 정순은 어느새 가까운 청요릿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과일가게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과일 몇 개를 사 들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듯 뛰던 마음이—
기차와 함께 멀리 떠나 버린 것 같았다.
순영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숙자가 마침 무언가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얘.”
숙자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 앞으로 전보 왔다.”
순영은 순간 멈춰 섰다.
“……전보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전보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자기 이름 앞으로 전보가 온 건 처음이었다.
순영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대철이 보낸 건 아닐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아무리 빨라도 지금쯤 경성에 도착해 전보까지 보낼 시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누가 보낸 거예요?”
“모르겠다.”
숙자도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도 막 받아서 안 뜯어봤어.”
순영은 전보를 내려다봤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송씨 위독 직상래〉
순간 순영 얼굴이 굳었다.
“위독…”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흔히 말했다.
위독이라는 건 곧 죽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어떤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순영은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숙자가 옆에서 물었다.
“누구신데?”
순영은 한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경성에서 온 거예요…”
방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당장 간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말도 있었고, 그래도 한번은 가 보는 게 옳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숙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 보는 게 맞다.”
순영은 한동안 전보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경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