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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von 한용운 · 2026-05-12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걸었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길바닥은 아직 젖어 있었다.

조금 앞까지 함께 걸어가던 대철이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작별하지요.”

순영은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아직 그러실 건 없습니다.”

대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들어가세요.”

순영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그녀는 애써 웃었다.

“가시는 것만 보고 갈게요.”

눈가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대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세요.”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영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빗물 고인 길을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모습.

그 그림자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따라갈까…’

순영은 정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다시 한번 보일까 싶어서.

하지만 거리에는 낯선 사람들만 오갈 뿐이었다.

대철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순영은 한참 망설이다가 문득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틀었다.

정거장 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큰길로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대철 눈에 띌까 봐 일부러 골목길만 골라 걸었다.

가고는 싶었다.

그러면서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단순히 대철 말을 따르려는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가 불쾌해할까 봐.

순영은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녀는 결국 정거장 근처까지 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대신 과일가게 앞에 멈춰 섰다.

‘실과라도 사서…’

순영은 잠시 상상했다.

대철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과일을 내려놓는 모습.

“길에서 드세요.”

그렇게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뻗으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저것 과일 값을 물어보기만 하고 끝내 사지 못했다.

정거장으로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과일 꾸러미가 오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부러웠다.

특히 자기 또래 여자들이 웃으며 과일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은 더더욱 그랬다.

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가도 되는 거잖아…’

대철이 나오지 말라고 한 건 자기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끼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마음까지 확인한 사이였다.

설령 정식이나 정순이 본다 해도—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과일이라도 들고 가 다정하게 배웅해 주면 대철도 기뻐하지 않을까.

순영은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끝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세 사람이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철.

정식.

그리고 정순.

순영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숨겼다.

하지만 눈만큼은 그들에게서 떼지 못했다.

그들은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웃고 있었다.

특히—

정순이 대철 가까이에 붙어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가슴 한구석이 욱 하고 타올랐다.

‘왜 저렇게 가까워…’

순간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질투가 치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뒤틀렸다.

순영은 자기가 여기까지 나온 걸 후회했다.

차라리 그냥 돌아갈 걸.

그녀는 그대로 뒷골목으로 도망치듯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숨어 선 채 그들을 바라봤다.

이제는 대철보다도—

정순 행동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잠시 뒤.

세 사람이 정거장으로 들어갈 때는 조금 달랐다.

대철이 앞서 걷고, 정식과 정순은 뒤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순영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정거장 안에서 기적 소리가 울렸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영은 멀리서 그 연기만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 마음도 함께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