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von 한용운
다음 날 아침.
순영은 누구보다 일찍 은행 앞으로 갔다.
아직 문도 열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젖은 돌계단 앞에 서서 몇 번이고 손에 쥔 통장을 만지작거렸다.
백오십 원.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돈 가운데 하나였다.
그 돈이면—
조금만 더 버티면 자기 몸값 일부를 치를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은행 문이 열리자 그녀는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돈 백오십 원을 찾아 들고 곧장 대철이 묵는 여관으로 향했다.
대철은 막 일어난 참이었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 자리옷만 걸치고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 이제 일어나셨어요?”
순영이 웃으며 들어서자 대철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어젯밤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피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슬쩍슬쩍 순영 눈치를 보고 있었다.
“참 일찍 나오셨군요.”
“손님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오기 어렵잖아요.”
순영은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은행 문 열리자마자 갔다 왔어요.”
그리고 품에서 종이로 싼 돈을 꺼냈다.
“여기요.”
그녀는 일부러 다시 돈을 세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침까지 묻혀 가며 한 번 세고, 다시 돌려 세고, 또 한 장씩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는 대철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일백오십 원 맞죠?”
순영은 환하게 웃었다.
대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십 원짜리 지폐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결국 가져오셨군요…”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낮았다.
순영은 그런 말쯤은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물었다.
“언제 떠나실 거예요?”
“……”
“사정으로 보면 진작 떠났어야 할 일입니다.”
대철은 시계를 한번 보며 말했다.
“갈 거면 하루라도 빨리 가야죠.”
그리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다음 차로 바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순영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웃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일은 보셔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저야… 많이 섭섭하지만.”
순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제 사정 때문에 선생님 급한 일 막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오래오래 같이 살면서 그때 서운했던 이야기 하죠.”
대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세숫물을 가져오라고 사람을 부르고, 짐을 정리하고,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순영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떠나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 얼굴빛까지 달라졌다.
“선생님.”
순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지금 가셔도 오늘 바로 출원은 어려운 거 아니에요?”
대철이 돌아봤다.
“그러면 저녁 차 타셔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영은 웃으려 애썼다.
“저녁까지 계시다가… 이따 와서 술이라도 한잔 더 하고 가세요.”
그녀는 단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 손으로 술을 따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철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바로 출원 못 하더라도 준비할 일이 많습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가능하면 빨리 가야 합니다.”
순영은 아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서울 가셔서 출원하시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 번만 더 들렀다 가세요.”
대철은 애매하게 웃었다.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말은 순영 마음을 다시 무겁게 만들었다.
“시간이 허락할지는 모르겠군요.”
순영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겨우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정거장까지 가서 배웅할래요.”
그녀 눈가엔 벌써 붉은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철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단호했다.
“서 정식 군도 만나고 가야 하고…”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결혼 이야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안 했으니까요.”
순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철은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은 함께 여관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