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von 한용운
이튿날 저녁.
순영은 다시 대철을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날마다 몸을 빼내듯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젯밤 대철이 어딘가 냉담하게 굴던 모습까지 떠오르자, 괜히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궁금했다.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때였다.
“순영아, 손님 오셨다.”
산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술손님이려니 하고 무심하게 나갔을 순영이었지만, 오늘은 저도 모르게 먼저 물었다.
“웬 손님이냐?”
“모르겠다. 전에 못 보던 손님인데. 아마 술꾼이겠지.”
“늙은이야? 젊은이야?”
순영은 ‘전에 못 보던 손님’이라는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인데, 키가 호리호리하고 그렇다.”
“응… 그래?”
순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 김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어요?”
기다리고 서 있던 대철을 본 순간, 놀란 얼굴로 말을 멈췄다.
“안녕하셨어요?”
대철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순영은 대답하다 말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누가 듣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대철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곤하셨지요? 제가 온 뒤에도 손님들이 오래 앉아 계셨을 텐데…”
“아닙니다. 손님들은 조금 있다가 가셨어요. 잠을 못 잔 건 그 때문이 아니고… 그냥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오더군요.”
대철은 순영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 그러세요?”
순영은 그 말의 뜻을 눈치챈 듯하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글쎄요. 순영 씨가 어두운 길을 혼자 잘 가셨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덧들었어요. 정신 차려 보니 날이 새더군요.”
“에구,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저는 와서 눕자마자 푹 잤답니다.”
“그러셨겠지요. 이런 데까지 오가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까.”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 생각도 안 하고 쿨쿨 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솔직히 순영 씨 생각만 하고 있었죠. 순영 씨가 어떨지는 생각도 못 하고요.”
“그랬을까요? 하지만 선생님이 제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다면… 저도 선생님이 잘 주무셨나 걱정하면서 잠을 못 잤을지도 모르잖아요?”
순영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대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젯밤에도 바로 찾아오고 싶었지만… 순영 씨 처지가 처지인지라 쉽게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낮에는 분주하실 것 같아서 늦게 온 겁니다.”
그러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방해되는 건 아니겠지요?”
순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다가, 이내 미닫이를 열었다.
“여보, 술상 좀 차려 와요.”
그러고는 대철을 향해 살짝 웃었다.
“잠깐 실례할게요.”
그녀가 나가고 혼자 남은 대철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먼저 청한 것도 아닌데 순영이 먼저 술상을 차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안했고, 또 한편으로는 혹시 자신에게 술을 팔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며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에구, 오래 기다리셨지요?”
순영이 직접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제 손으로 좀 보느라 늦었어요.”
그녀는 공손하게 상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기다리셨어요?”
“기다리긴 했습니다만… 술상이 늦어서 기다린 건 아닙니다.”
“그럼요?”
순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순영 씨가 안 보이니까 기다려진 거지요.”
“에구, 선생님도… 공연한 말씀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순영의 얼굴에는 분명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왜 공연한 말씀이라고 하세요? 사람마다 마음의 기준은 다른 법 아닙니까. 순영 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나는 순영 씨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기다려집니다.”
대철은 웃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순영은 괜히 몸을 틀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술이나 한 잔 드세요.”
그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조심스럽게 술잔을 권했다.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술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대철은 술상을 바라보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순영은 그 말 속의 의미를 읽은 듯 피식 웃었다.
“저녁 드신 지가 언제인데요. 지금 밤중 다 되어 가는데.”
그러고는 잔을 들어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아까 하신 말씀이 정말이라면, 술이 싫으셔도 제가 드리는 술은 달게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대철은 결국 웃으며 잔을 받았다.
“글쎄요. 순영 씨가 권하는 술을 안 마실 수야 있겠습니까.”
그는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선생님, 술을 왜 그렇게 뜨막하게 드세요?”
순영은 대철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마시기 싫으신 걸 억지로 드시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원래 내가 술을 이렇게 먹습니다.”
대철은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처음엔 다들 내가 술을 못 먹는 줄 압니다. 그런데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또 그렇지도 않거든요. 두고 보세요.”
그는 안주도 손대지 않은 채 다시 술잔을 들었다.
“술이라는 건 혼자 마시면 재미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고는 순영 쪽으로 잔을 내밀었다.
“순영 씨도 한잔하시죠.”
“에구, 선생님도 참. 제가 술을 마실 줄 아나요?”
순영은 잔을 받아 들고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혼자 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순영 씨가 안 드시면 나도 그만두지요.”
대철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순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금만 먹을게요.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먹는 건 같은 거니까.”
그녀는 술을 아주 조금 입에 댔다.
그러고는 남은 술을 어디에 따를까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웃었다.
“그런데 선생님.”
“예?”
“술을 혼자 드시기 심심하시면, 한 잔은 선생님 몫으로 드시고… 한 잔은 제 대신으로 드시면 되잖아요?”
순영은 웃음을 참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둘이 먹는 셈 아니에요?”
대철이 피식 웃었다.
“그거 아주 명답인데요?”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술 한 병은 술로 먹고 한 병은 안주로 먹는다고 했다더니… 순영 씨 말씀도 그와 비슷한 논리군요.”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그 잔부터 이리 주세요.”
“아니에요. 이건 버리고 새로 따라 드릴게요.”
순영은 마땅한 그릇을 찾으려 술상을 둘러봤지만, 남은 술을 버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자 대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입을 그냥 공기라고 칩시다.”
“예?”
“순영 씨가 마시다 남긴 술을 공기에 버리는 셈으로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손에 들린 잔을 거의 빼앗듯 가져갔다.
“자, 이건 공기에 따른 겁니다.”
그리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진짜 술 한잔 따라 주시오.”
“에구, 참 선생님도…”
순영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새 술을 따랐다.
술잔은 어느새 대여섯 잔을 넘기고 있었다.
잠시 뒤.
순영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생님.”
“예?”
“어젯밤에 제가 간 뒤에… 제 이야기 많이 하셨지요?”
그녀는 내내 궁금했던 이야기를 결국 꺼냈다.
대철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별로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제 얘기 한마디도 안 했어요?”
“조금은 나왔지요.”
“뭐라고 하셨어요? 분명 흉보셨겠지.”
순영은 새침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굳이 물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도 궁금한데요. 어떻게 흉을 보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순영은 일부러 샘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철은 그녀를 바라보다 조용히 웃었다.
“흉은 누가 봅니까. 순영 씨한테 흉볼 일이 있나요?”
“……”
“이야기하다가 순영 씨 말이 나왔는데, 정순 씨가 아주 극구 칭찬을 하더군요. 나는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정순이가요?”
순영의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
“뭐라고 칭찬했는데요?”
“그걸 그대로 다 옮길 순 없지만…”
대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씨도 좋고, 예의도 얌전하고, 저축도 잘하고… 여러 가지로 칭찬하던데요.”
“에구, 그건 정말 거짓말이에요.”
순영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제가 예쁘다구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만족한 기색이 감춰지지 않았다.
“얼굴은 누구 눈으로 봐도 뻔한 건데요.”
“그럼 얼마나 예뻐야 예쁘다는 겁니까?”
대철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며 여자도 많이 봤지만, 순영 씨처럼 여러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은 처음 봤는데요.”
순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에구, 선생님. 놀리지 마세요. 부끄러워 죽겠네…”
“놀리는 게 아닙니다.”
대철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꽃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듯, 사람 보는 눈도 다 다릅니다.”
그는 술잔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은 박색이라 하는 여자를 다른 사람은 절세미인이라 하기도 하지요.”
그리고는 순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습니다.”
순영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대철은 계속 말했다.
“나는 순영 씨 환심을 사려고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순영 씨도 지금은 아니라 하시겠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속으로는 ‘이만하면…’ 하고 웃으실 겁니다.”
순영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말대답하면 점점 더하실 테니까 가만있을래요.”
그러면서 술잔을 거의 그의 입가까지 들이밀었다.
“약주나 드세요.”
“먹어야죠.”
대철은 웃으며 잔을 받았다.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습니까.”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순영 씨 같은…”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웃었다.
“미인이라고 하면 또 화내실 테고. 그렇다고 박색이라 하긴 싫고. 그냥 순영 씨라고 합시다.”
그는 취기가 오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순영 씨 손으로 술 받아 마시는 것만 해도 나한텐 큰 영광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즐겁게 술 마셔본 건 처음이군요.”
그는 빈 잔을 내밀었다.
“한잔 더 주시오.”
“……”
“이번엔 내 몫으로 마셨으니, 다음 잔은 순영 씨 대신으로 마셔야지.”
순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했다.
“에구, 참…”
그 짧은 한마디에 수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술잔을 가득 채웠다.
“이건 제 대신이에요.”
그 순간 순영은 정말 자기 마음 전부를 술잔에 담아 건네는 듯했다.
그녀 안에는 이제 아무런 경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철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느낀 듯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들으니까 저금을 꽤 하셨다던데…”
그는 몸을 조금 숙이며 물었다.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저금을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