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Orc)들이 사는 마을
von 음악의 신 · 2026-03-18
이메이런 대륙의 동쪽은, 거대한 산맥 그레이블루 마운틴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잿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그 산맥은 봉우리마다 만년설을 이고 있을 만큼 높고도 험준했으며, 아직도 심장부에서는 용암이 끓어오르는 활화산이었기에 사람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인적이 끊긴 그레이블루 마운틴은, 말 그대로 진정한 몬스터들의 낙원과도 같은 땅이었다.
그 산의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서도 바다로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은 부에인 봉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오크들의 영역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크는 몬스터라기보다 인간, 엘프,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족으로 분류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호전적인 성정과, 때때로 인간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일삼는 행위 탓에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몬스터라 여기고 있었다.
몇 해 전, 유나스 제국 국립대학의 교수 류레이튼 얼더나스 크라임은 오크가 분명한 지성 종족임을 증명하겠다며 오크 남매를 직접 거두어 기른 바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남매가 끝내 그 교수를 살해하고 달아나 버리면서, 그의 주장은 세상의 조롱 속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크들은 초록빛 피부와 작은 키, 그리고 아래턱에서 도드라지게 솟아난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만큼 높은 지능을 타고나지는 못했으나, 강인한 체력과 완력을 지녔고, 무리를 지어 살아가며 인간과 같은 언어를 쓰고 기초적인 농사도 지을 줄 알았다.
다만 그들의 사회는 지나치게 원시적이었고, 무리가 커질수록 내부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대개는 오십에서 이백 남짓한 규모로 마을을 이루어 살아갔다.
현재 크라문 족장이 이끄는 오크 무리는 바다와 맞닿은 부에인 봉 동쪽 정상에 터를 잡고 있었다.
사냥감조차 드문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근근이 농사를 짓고 벌레까지 잡아먹으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들의 마을에는 더없이 흉악한 재앙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거.
무려 삼 미터를 넘나드는 거대한 몬스터인 그 괴물은, 심지어 오크들마저 먹잇감으로 삼고 있었다.
이미 여러 오크가 놈의 뱃속으로 사라졌고, 마을 전체가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의 경계를 맡은 오크들은 쉼 없이 이어지는 경계 근무에 하나같이 지쳐 있었다.
그중 로우타는 경계대의 대장이었고, 그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오거의 침입을 남들보다 먼저 발견하여, 그나마 마을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는 것.
“여, 로우타! 저기 바다 쪽을 봐라. 뭔가 있다.”
경계병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로우타는 처음엔 바다 쪽에서 무언가가 나타날 리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그 경계병이 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마침내 못 이기는 척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멀리 바닷가 쪽에는 사람인지 엘프인지 모를 형체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데 죽은 것 아니냐?”
경계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보 같은 놈아. 저렇게 먼 데서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네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로우타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첫 번째 돌은 한참 모자라게 떨어져 버렸다.
“다시 던져. 좀 더 세게!”
휘익~
탁.
“음……”
류향은 멀리서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운기조식을 멈추었다.
비록 아득히 먼 곳에 떨어진 자잘한 돌멩이 소리일 뿐이었으나,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진 그가 그 미세한 기척을 놓칠 리 없었다.
하물며 운기조식 중에 기습을 당하면 자칫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는 법.
그렇기에 그는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게 사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몸속 내공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했다.
매화방의 장로 할머니들이 넘겨준 막대한 공력 탓에, 체내 음기가 지나치게 치솟아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기 때문이다.
원래 남자는 양기를, 여자는 음기를 주로 쓰는 법.
그런데 류향은 음기를 주로 다루는 여인들의 공력을 억지로 받아들여 무리하게 운용했다.
그 결과 기혈이 뒤틀리고, 몸 안의 기운이 역류하며 심상찮은 이상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까스로 기운을 가다듬은 류향은 천천히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후…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왜 내가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야?”
분명 그는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여긴 끝에, 할머니들에게서 받은 공력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부신 빛을 보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홀로 이 낯선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류향의 눈빛이 깊어졌다.
배반.
구대문파의 협공 속에서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죽음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마지막 찰나, 반지에서 터져 나온 빛이 그의 최후의 기억이었다.
류향은 손가락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구슬은, 이제 탁한 빛을 머금은 채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한쪽은 바다.
반대편 육지는 눈앞을 가로막은 깎아지른 절벽뿐이었다.
비록 그 절벽은 수직에 가까울 만큼 가팔랐으나, 류향 정도의 내공을 지닌 자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장벽이 아니었다.
그는 절벽 앞으로 걸어가 손과 발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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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서 아래를 살피던 오크들은, 사람인지 엘프인지 하던 그 형체가 돌연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류향이 절벽 바로 아래쪽으로 다가간 탓에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절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이리로 올라올 수도 없어. 그쪽은 신경 끄고 오거 경계나 해!”
로우타가 일행들에게 윽박지르듯 말하며 제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오크들은 다시 긴장한 채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허, 도대체 어떤 악독한 무공을 익혔길래 외모가 저리 흉측하게 변했을까. 쯧, 참 안되었네.”
그 순간, 사람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알아듣기 힘든 말로 중얼거렸다.
깜짝 놀란 로우타가 검을 치켜들었다.
“사, 사람이다! 어떻게 사람이 있는 거지?”
“말 좀 물어보자. 나는 류향이라 한다. 혹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나?”
오크들이 흉흉한 얼굴로 검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 인간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미친 인간인가 보다. 크크, 어쨌든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죽여!”
인간 사냥을 해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로우타는 이 뜻밖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크들이 일제히 류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인간!”
“역시 사악한 마공을 익힌 게 맞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로우타가 검을 들고 인간에게 달려드는 순간, 느닷없이 그의 눈앞으로 산처럼 거대한 주먹이 들이닥쳤다.
퍽!
“캐액!”
로우타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가 늘 자랑으로 여기던 날카로운 아래 송곳니는 산산이 부서져 몸 주변으로 흩어졌다.
넘어진 로우타는 자신이 대체 누구에게 맞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여전히 처음 섰던 자리 그대로, 미동도 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네. 진짜로 아버지가 가르쳐주었던 언어를 쓰는 자들이 있네.”
이번에는 인간이, 그것도 로우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륙어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로우타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멀쩡한데, 자신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뿐이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저 인간을 죽여!”
송곳니가 부러져 바람 새는 발음으로 로우타가 고함치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의 명령에도 다른 오크들은 누구 하나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로우타가 그들을 향해 다시 소리치려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오크들의 검이 모두 두 동강 나 있었기 때문이다.
류향은 한 손으로 로우타에게 권을 날리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지풍을 쏘아 오크들의 검을 모조리 부러뜨린 것이었다.
그는 로우타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어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대륙어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어느 방파 녀석인가? 무위도 형편없어 보이는데 어찌 얼굴이 그리 흉측하게 변했노? 무공을 헛배웠나 보구나. 쯧.”
“이, 흰간! 도대체 후슨 호리를 하는 거냐?”
“쯧, 멍청한 녀석. 우선 너희 방주를 만나 보아야겠다.”
이런 하급 무리와 백날 입씨름해 보았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류향은, 그대로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로우타를 저만치 내던진 뒤, 두 손을 뒷짐 진 채 태연하게 오크 마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로우타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저토록 황당한 인간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단신으로 오크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인간이라니.
도대체 겁이라는 것을 저 멀리 바다의 해룡에게라도 맡겨 두고 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은 마을의 경비대장이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로우타는 인간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뛰어들며 목청껏 소리쳤다.
“큰일 났다! 인간이 나타났다!”
가뜩이나 오거가 또 들이닥칠까 불안해하던 크라문은 그 외침을 듣자마자 곧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뭐가 나타났다고?”
투구를 쓰고, 녹이 슬기는 했으나 사슬 갑옷 상의를 걸쳐 족장임을 과시한 크라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향은 그를 보자마자 단번에 이곳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온 크라문은 황당하다는 듯 눈앞의 류향을 바라보더니, 검끝으로 그를 가리키며 로우타에게 물었다.
“얘 때문에 큰일 났다 그런 것이냐?”
“그, 그렇다. 대장. 보통 놈이 아니다. 아마도 흰간들이 말하는 소드하마스터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해, 크라문은 당장이라도 멍청한 로우타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소드마스터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허풍 잘 떨기로 이름난 인간들이 꾸며낸 허깨비 같은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크라문은 평생 단 한 번도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크라문의 사정일 뿐, 소드마스터란 허황된 전설이 아니었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자라면 한 나라에서도 상위 귀족 대우를 받는 존재였으니, 이런 불모지나 다름없는 변방에 올 일이 없었을 뿐이다.
“얘가 소드마스터란 말이냐?”
크라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로우타는 한없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대장! 경계병들이 모두 한 방에 당했다.”
크라문은 경계병들을 훑어보았다.
로우타의 송곳니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다른 오크들은 겉보기엔 멀쩡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인간은 체격이 호리호리했고, 나이 또한 어려 보였다.
소위 소드마스터라면 적어도 건장한 체구에, 어느 정도 연륜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범상치 않은 기세라도 풍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인간에게서는 그런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드마스터라면 적어도 검은 쥐고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맨손이었다.
물론 어깨에는 보자기로 칭칭 감싼 거대한 물건 하나가 메어져 있었고, 얼핏 보기에는 검 같기도 했으나, 그것을 뽑아 든 흔적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