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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von 뮤즈 · 2026-03-23

지후가 자신의 볼일을 처리하겠다고 떠나고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어색했다. 키패드가 원래보다 작아 보였다.

집 안에 들어서자, 어제 아침까지의 내 삶이 그대로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 반쯤 비운 커피 컵. 쇼핑몰 택배 상자. 세탁기 앞에 던져 놓은 블라우스. 그리고,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화장품들. 피부톤을 맞추던 파운데이션. 눈매를 살리던 아이라이너. 입술을 살짝 살려주던 틴트.

나는 한참을 그것들만 바라봤다.

나: 이제… 쓸 일이 있을까.

혼잣말이 나왔다.

손등으로 볼을 문질러 봤다. 피부는 전보다 매끈했다. 털이 조금 더 거칠게 느껴지고, 턱선은 더 단단했다.

피부 좋아진 건 맞네.

웃기지도 않았다.

옷장을 열자, 브라우스들과 원피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회사용 슬랙스, 하이웨스트 치마, “살 빼면 입어야지” 했던 스키니진.

어제의 내가 이제 다른 사람 옷장 털어보는 기분이었다. 잠깐, 손이 한 블라우스 위에서 멈췄다. 흰색, 레이스 카라. 중요한 날 입으려고 아껴 두던 옷.

나: 입을 몸이 없네…

목소리가 너무 낮게 나와서, 스스로도 잘 안 들렸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내가 답장을 치기도 전에 전화가 바로 걸려왔다.

나: 여보세요.

지후: 야. 숨소리 왜 이렇게 무겁냐. 울었냐?

나: …네가 문자로 그런 걸 물어보니까 그렇지.

지후: 그래, 안 울었으면 이상하지. 일단 옷 사야 되니까 나와. 집 앞 편의점 앞에서 보자.

나: 응.

전화를 끊고, 옥상에서 빨랫줄에 말려 두었던 검은 마스크를 꺼내 썼다. 후드를 다시 눌러쓰고,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

지후: 어.

편의점 앞, 지후가 손을 흔들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동네에서 늘 보던, 그 모습.

지후: 생각보다… 멀쩡하네.

나: 뭐가.

지후: 더 무너져 있을 줄 알았는데. 어제보단… 눈이 좀 살아있다.

나: 안 그러면 네가 더 걱정할 거잖아.

말해 놓고 나서, 내가 한 말에 내가 먼저 놀랐다.

얘 걱정을 내가 왜 신경 쓰고 있지.

지후가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지후: 야.

나: 왜.

지후: 넌, 그래도 여전히 ‘너’다.

나: 당연하지, 이 사람아.

지후: 응. 그 말을 너한테 해줘야 되는 거 알지?

말이 또 목에 걸려서, 그냥 고개만 돌렸다.

지후: 가자. 요즘 남자 옷 싼 데 하나 안다.

대형 쇼핑몰 말고, 동네에서 버스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로드숍 거리. 지후가 일부러 그렇게 골랐다.

지후: 사람 많으면, 네가 더 힘들어 할 것 같아서.

나: 쓸데없이 눈치 챙기긴…

지후: 고맙다고 해도 돼.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켠이 조금 따뜻해졌다.

남성복 매장은 생각보다 냄새부터 달랐다. 향수, 세제, 약한 땀 냄새가 섞인 그 특유의 공기.

지후: 남자 옷 쇼핑, 생애 첫 경험이네?

나: 누가 좋아서 하냐…

그래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점원: 어서 오세요~!

점원이 다가오다가, 나와 지후를 번갈아 봤다.

점원: 커플… 이세요?

아니요.

나랑 지후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봤다.

…뭐래.

몰라. 그냥 저 말이 자동으로 나오나 봐.

점원이 민망한 듯 웃었다.

점원: 죄송합니다. 편하게 둘러보시고 불러주세요.

지후가 작게 속삭였다.

지후: 아까보다 표정 많이 풀린 거 알지?

나: 뭐가.

지후: 방금 네 표정, 진짜 ‘짜증난 동네 누나’였어.

나: …씨.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걸려 있는 옷들을 보는 것도 어색했다. 헐렁한 티셔츠, 루즈핏 셔츠, 후드, 조거팬츠.

‘남자라면 하나쯤 있다’는 기본템들. 남자 옷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톤이 어두웠다. 다 그게그거 같았다.

지후: 일단 위에는 후드 하나 더 사고, 반팔 티 몇 개. 밑에는… 조거랑 청바지 두 개면 되겠지?

지후가 손에 옷들을 쥐어주며 말했다.

지후: 색은 무채색으로 가고.

나: 왜.

지후: 튀면 네가 더 신경 쓰잖아.

…맞는 말이다. 피팅룸 앞에 서자, 가슴이 또 뛰었다.

지후: 입어봐.

나: 여기서?

지후: 어디서 입냐 그럼. 길거리에서 벗으면서 갈아입을래?

나: 정말 싫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팅룸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작은 거울 안, 낯선 남자가 또 있었다. 이번엔 맨몸에 가까운 차림으로. 후드를 벗으니

어깨와 팔 근육 윤곽이 더 드러났다. 가슴은 평평하고, 복부는 살짝 탄탄했다.갔다.

나: 진짜… 누가 봐도 남자네.

중얼거리고, 티셔츠를 입었다. 생각보다 잘 맞았다. 조심조심 청바지도 입어봤다. 허리도, 다리도 딱 맞았다.

거울 속 남자는 이제 좀 더 ‘사회에서 보던 평범한 남자’에 가까워졌다.

근데......

거울 속 남자가 나인 건, 아직도 이상하다.

문을 열자, 지후가 대기 중이었다.

지후: 봐보자.

나: 싫어.

지후: 뭘 또 부끄러워 해. 원래도 네 코디 내가 반쯤 했잖아.

나: 그건 여자 옷이었잖아.

지후: …그리운가 봐?

그 질문에, 대답이 한참 늦어졌다.

나: 조금.

생각보다 솔직하게 나왔다. 지후가 순간 눈을 피했다.

지후: 그래도… 지금도 잘 어울리긴 한다.

나: 뭐가.

지후: 그 옷.

말은 툭 내뱉었지만, 귀 끝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지후: 어쨌든 저거랑 저거랑… 아, 속옷도 사야지.

그 한마디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나: …그 얘기를 꼭 여기서 해야겠냐.

지후: 사야 될 거 아냐. 너 지금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지?

나: 입었거든? 여자 팬티.

지후: 그게 더 문제지, 이 사람아.

지후가 머리를 감쌌다.

지후: 알았어, 그럼… 내가 계산 쪽 보고 있을 테니까 저쪽 속옷 코너 가서 알아서 골라.

남성 속옷 코너.

멀리서 봐도 박스들에 근육질 남자의 허리와 엉덩이가 프린트 되어 있었다.

나: ………….

지후: 야.

나: 왜.

지후: 거기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찍어서 골라. 어차피 남자 거 다 거기서 거기야.

나: 너무 막 얘기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결국 트렁크형 몇 개, 드로즈형 몇 개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색깔도 최대한 무난한 걸로. 카운터로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정라은〉

심장이 살짝 뛰었다.

지후: 받아.

지후: 난 계산하고 있을게.

그가 옷들을 카운터에 올려놓는 동안, 나는 매장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나: 여보세요.

정라은의 목소리는 어제와 비슷하게 차분했지만, 어딘가 붓기 빠진 듯한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

정라은: 지금… 괜찮으세요?

나: 네.

나: 지후랑… 옷 사러 나왔어요.

정라은: 그래요? 잘 했어요.

잠깐 침묵이 있었다.

정라은: … 조금씩 몸을 보여줘야 해요. 혼자 숨기기만 하면, 더 무서워지거든요.

그 말이 의외로 위로로 들렸다.

정라은: 강지후 씨는…

뒤쪽에서 카운터 직원이 말했다.

점원: 총 합계, 십이만 삼천 원입니다.

지후가 지갑을 꺼내는 소리가 났다.

지후: 여기 카드로요.

정라은이 물었다.

정라은: 혹시… 불편하시면, 다음부턴 같이… 가드려도 돼요.

나: 여자 옷에서 남자 옷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정라은: 저도 그 기분… 완전히 이해는 못 하지만, 조금은…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말에, 마음 한 켠이 또 흔들렸다. 왈칵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감사해요.

내가 먼저 말했다.

나: 정말…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줄 몰랐어요.

정라은: 신경 써야죠.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나: 의사가… 자기가 약 준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외면하면, 그때부턴 진짜 괴물이니까요.

나: ………

잠깐 말이 막혔다.

정라은: 내일… 한 번 더 들르실 수 있어요? 간단한 검사만 더 하고 싶어서요.

나: 네. 그렇게 할게요.

정라은: 알겠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정라은이 갑자기 덧붙였다.

정라은: 지윤 씨.

나: 네?

정라은: 오늘… 옷 잘 어울리실 거예요.

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정라은: 그 몸은… 생각보다, 뭐든 잘 어울리는 구조거든요.

그 말에,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전화를 끊자, 뒤에서 지후가 말했다.

지후: 라은 선생님이야?

나: 응.

지후: 목소리… 좋네.

나: 뭐?

지후: 아니, 그냥. 의사치곤 너무 사람 냄새 나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 지후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 뭐래. 질투냐.

농담 반으로 던졌는데,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후: …에이.

한 박자 늦은 부정.

지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집에 돌아와 옷을 정리하는 건 또 다른 종류의 위기였다.

새로 산 남자 속옷들이 서랍 한 칸을 차지했다. 바로 옆 칸에는 레이스 팬티들이 그대로였다.

나: 둘 중에 하나는… 이제 영원히 쓸 일이 없겠지.

입술을 깨물었다. 후드를 갈아입고, 새 조거팬츠를 입어봤다. 거울 속 모습은 확실히 아까보다 ‘덜 수상한 남자’에 가까웠다.

나: 이제… 길에서 마주쳐도, 아무도 나 찾는 눈으로 보진 않겠지.

그게 다행인지, 서글픈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정라은도, 지후도 아닌 번호였다.

〈네오젠 파마 고객지원센터〉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 문자였다.

나: [네오젠 파마 임상지원팀]

나: 루멘 바이오 클리닉을 통해 시술받으신 고객님께 안내드립니다.

나: 보다 안전한 경과 확인을 위하여,

나: 금일 중으로 반드시 연락 부탁드립니다.

나: 회신이 없을 시,

나: 등록된 주소로 직접 방문하여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나: N-47 / 내선번호: 0XXX-XXXX -

나: …등록된 주소로?

입술이 마르면서 숨이 가빠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지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리자마자 지후가 바로 받았다.

지후: 지윤아? 왜 그래? 목소리… 떨려.

나: 지후야… 제약회사에서… 문자가 왔어. 뭔가… 불안해.

그 한 문장이 목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남자의 목소리인데, 울컥하는 감정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 잠깐만. 거기 있어.

나: 아니, 그냥 문자일 수도 있고......

뚝.

대답 대신, 옆집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센서 등이 켜지고, 잠시 뒤, 띵동.

문을 열자 지후가 서 있었다. 평소보다 헝클어진 머리, 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다.

지후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잠시 멈칫했다. 내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지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지후야, 나 괜찮아. 그냥 불안해서—

지후: 무서워서 그렇지.

그는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아주 짧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 오늘은… 내 집에서 자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뭐?

지후: 지금 네 집에 있으면… 더 불안해질 거야. 그리고......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덧붙였다.

지후: 지금은 남자끼리잖아. 뭘 그렇게 꺼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끼리라니.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 한가운데 박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