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von 뮤즈 · 2026-03-23
어제 밤, 침대에 쓰러져 있을 때. 몸 안에서 뭔가 재배열되는 느낌, 심장 박동이 리듬을 바꾸던 느낌, 척추를 타고 오르내리던 전기 같은 감각.
누군가 계단 아래에서, 그 모든 걸 듣고 있었다는 건가.
정라은: 무서웠어요.
정라은이 아주 작게 말했다.
지후: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순간,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후가 거칠게 말했다.
지후: 그래서 그냥 돌아갔다고요?
정라은: 네.
그녀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정라은: 의사로서, 도망친 거죠.
기대하던 방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도 최선을 다했다’ 같은 말 대신, 아주 짧은 자기혐오 같은 고백이었다.
정라은: 그래서… 오늘 아침에 다시 연락이 오면, 어떻게든 병원으로 불러서 검사를 하고, 그 다음에… 제약회사를 상대할 생각이었어요.
정라은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라은: 근데… 당신이 먼저 왔네요.
거기까지 듣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울컥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질 않았다.
너무 많이 울어서일까. 아니면, 이게 너무 비현실적이라서일까.
나: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해요.
내 목소리가 방 안에 떨어졌다.
나: 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정라은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 질문을, 그녀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라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정라은: 지금 상태에서, ‘원래대로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어요.
가슴 속에서 뭔가가 구겨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잡힐 게 없었다.
그녀가 급히 덧붙였다.
정라은: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정라은: 일단, 지금 당신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최대한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도, 여기서 다시 정밀하게 분석해 볼 거고요.
잠깐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정라은: 그리고… 제약회사보다 우리가 먼저, 이 약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야 합니다.
정라은: 진짜 목적…
그 말이 입 안에서 굴렀다.
정라은: 정말로… ‘남성화’를 위해 만든 약인지, 아니면 그게 부작용인지만이라도 알아내야 해요.
지후가 끼어들었다.
지후: 근데 그걸 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데요. 그냥 이거, 신고부터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
정라은이 잠깐 그를 보았다.
정라은: 신고할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신고부터 하면…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낮게 말했다.
제약회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데이터’를 지우는 거겠죠.
데이터…
네. 당신 몸입니다, 지윤 씨.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지금 이 몸이, 그들에게는… 실패라고 기록될지, 아니면 대성공이라고 기록될지, 우리 아직 모릅니다.”
식은땀이 났다.
“그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면, 다시 찾으러 올 거고요. ‘실패’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끝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 것 같았다.
실패한 실험체에게 제약회사가 얼마나 상냥할지 상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정라은: …그래서요.
정라은이 손을 내밀었다.
정라은: 당신을, 여기서는 절대 혼자 내보낼 수 없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정라은: 여기는 병원이고, 저는 의사고, 당신은 제 환자예요. 당신이 원치 않는 실험을 당했다면…
정라은: 저는 그걸 막지 못한 책임이 있고,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당신 편에 설 책임도 있어요.
책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녀의 눈이 아주 약간 떨렸다.
정라은: 그래서… 부탁드릴게요.
정라은이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손인지, 동맹의 손인지 모를 제스처였다.
정라은: 당분간, 저를 믿어 주세요. 당신 혼자 이걸 감당하게 두진 않을게요.
나는 그 손을 바라봤다.
하얀 가운, 얇은 손가락, 명찰에 적힌 이름.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얼굴 중 하나였다. 이제는 내 인생에 가장 깊이 엮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정라은: 믿을 수 있겠냐고 물으면…
입안이 바싹 말랐다.
나: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라은이 아주 조금 웃었다.
슬프게.
정라은: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정라은: 근데…
나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나: 당장 지금은…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손과 손이 맞닿았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의사 손이라 그런지, 차갑게 관리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옆에서 지후가 짧게 기침을 했다.
지후: 야.
나: 왜.
지후: 너… 나도 있거든.
나: …알아.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물이랑 웃음이랑 같이 섞여서, 이상한 표정이 나왔다. 지후가 팔짱을 끼더니, 정라은을 향해 말했다.
지후: 좋아요. 일단 믿어볼게요.
말투는 여전히 경계 가득이었지만, 그 안에 어쩔 수 없는 인정이 섞여 있었다.
지후: 근데 한 가지만 확실히 해 주세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후: 지윤한테 일어난 거, 지윤 잘못은 절대 아니라고. 누가 뭐래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고.
정라은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네. 단언할 수 있어요.
그녀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정라은: 이건… 절대로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지윤 씨.
그 말이, 눈물샘을 마지막으로 건드렸다.
이번엔 참지 않았다. 그냥 쏟아지게 놔뒀다.
나: 흑…
손등으로 눈을 대충 문질렀다.
거칠어진 손바닥이 눈가를 스칠 때마다, 또 한 번 마음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몸은 남자가 됐는데, 눈물 나는 건 하나도 안 줄었네.
‘이상 변이’라는 단어가
뉴스 속에서 흘러나올 때만 해도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지금은, 뉴스에 나오는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뉴스 뒤에 숨어 있는 악당은 이 작은 클리닉이 아니라 어디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제약회사의 로고일 거라는 것.
그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 *** ***
정라은: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검사하고.
정라은이 메모를 덮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를 넘어가고 있었다. 클리닉 안, 작은 상담실의 공기가 하루 내내 사람 세 명의 숨으로 채워진 느낌이었다.
정라은: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혈액 검사할게요. 수치 변화 추이를 봐야 하니까요.
나: 네…
대답하면서도 머리는 멍했다. 몸은 분명 더 가벼워졌는데, 머릿속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기분. 지후가 시계를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후: 야.
나: 응.
지후: 너, 회사, 아니, 병원은 뭐라고 할 거냐.
그제야 현실이 또 하나 떠올랐다.
대학병원 행정부. 내 자리. 모니터 두 개, 늘 쌓여 있던 차트, 야근할 때마다 같이 욕하던 동료들.
정라은: 출근을… 어떻게 해. 이 얼굴로.
정라은: 그래서......
지후가 너무 쉽게 말했다.
지후: 내가 다녀올게.
나: 뭐?
너 거기 계속 다닐 거잖아. 당장 사직서부터 내고 시작하면, 나중에 돌아갈 데도 없잖아.
나: 근데…
지후: 잠시 무급휴직 처리해 달라고 할 수는 있지. 가족이 대신 와서 얘기하는 거,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의 말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잠시 말이 막혔다.
나: 너무 위험하지 않아…? 거짓말하는 거잖아.
지후: 네가 직접 가는 게 더 위험해.
툭, 한 마디. 가볍게 내뱉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 깊은데 박혔다.
지후: …지금 너, 내가 보호자야, 강지후.
나: 원래도 반쯤 그랬어.
지후: 또 그렇게 얼버무린다.
정라은: 좋은 생각이에요.
정라은: 지금 상태로 직장까지 같이 흔들리면, 지윤 씨 완전히 고립돼요.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행정부 쪽이면… 담당 팀장님 계시죠?
정라은: 간단한 진단서 정도는 제가 써 드릴게요. ‘내분비계 이상으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정도로.
나: 그, 그렇게 함부로 써도 돼요?
정라은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라은: 이 정도 상황이면, 차라리 함부로라도 써야죠.
정라은: 거짓은 아닙니다. 지금 지윤 씨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분비계 이상’이에요.
그녀는 빠르게 메모를 적더니, 간단한 소견서를 출력했다.
〈호르몬계 및 내분비계 이상 소견, 단기 안정을 위한 휴식 권고〉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평범해서 더 웃겼다.
‘단기 안정’.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건 ‘단기’ 같은 단어가 아닌 것 같은데.
지후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지후: 그럼 이건 내가 갖고 갈게.
그가 일어나며 나를 보았다.
지후: 너는 집에 들어가서, 잠깐만 쉬고 있어. 오늘 너무 많이 흔들렸어.
정라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거든.
지후: 그래도 버텼잖아.
그 말에, 조금 웃음이 났다.
정라은: 오늘 저녁에는, 가능하면 사람 많은 곳은 피하세요. 급격한 자극은 안 좋을 수 있어요.
그 말은 즉,
“가능하면 집에만 있으라”는 뜻이었다.
나: 근데...
내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나: 저기요......
나: 입을 옷이 없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봤다.
지후: 아.
지후: 그렇네.
지후가 뒤통수를 긁었다.
지후: 여자 옷밖에 없으니까… 지금처럼 후드 하나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지.
나: 속옷도…
말 끝을 흐렸다.
서랍안에 있는 브라 , 레이스 팬티, 집콕용 잠옷들.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다른 세계 물건 같다. 정라은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라은: 한 번은, 밖에 나가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그 말이 의외였다.
나: 예?
나: 지금 이 몸으로…
정라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한 번은 경험해야 합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라은: 물론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혼자 나가시는 건 추천하지 않고요.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후에게로 갔다.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 옷 사러 가자.
나: …지금?
지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하냐. 씻고 갈아입을 속옷이나 있어? 집 가는 길에 들려서 사자.
말은 맞았다. 병원 휴직 처리, 제약회사, 몸안 검사…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정라은: 아니, 이렇게 하죠. 강지후 씨는 병원 먼저 다녀오세요. 지윤 씨는… 잠깐 집에 갔다가,
정라은: 오늘 저녁쯤 다시 여기로 오고요.
나: 여기로요?
정라은: 네. 당분간, 오늘 같은 예고 없는 연락이 또 올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정라은: 제약회사에서요.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지후: …벌써 연락 왔어요?
정라은은 잠깐 침을 삼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아까, 당신들 오기 직전에 한 번 왔어요.
정라은: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네오젠 파마 임상지원팀〉
정라은: 어제 시술 대상자 경과 보고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금일 중으로 꼭 회신해 달라’고.
정라은: ‘연락이 안 되면 직접 환자에게 방문하겠다’고.
직접 방문.
그 말이 목덜미를 쿡 찔렀다.
정라은: 그래서 제가… 이미 썼다고 했어요.
.
정라은: ‘별다른 이상 소견 없고, 피부 상태 양호, 피로감만 조금 있다’고요.
정라은: 거짓 보고.
정라은: 그럼…
정라은: 우리는 지금부터, 시간을 조금 번 거예요.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제약회사보다 먼저, 지윤 씨를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리는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생활. 그 단어에 목이 또 맸다.
지후가 숨을 내쉬었다.
지후: 알았어요.
지후: 일단 내가 병원 휴직 처리하고, 내일 옷 사러 가자.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