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von 뮤즈 · 2026-03-20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빛은 더 떨렸다. 나는 문턱에서 한 번 더 멈칫했다. 지후가 쓱 내 팔꿈치를 밀었다.
지후: 가자.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도망갈 데도 없다.
안쪽 복도로 들어서자, 여의사는 자동으로 문을 닫고 잠금 버튼을 눌렀다.
딸칵, 작은 소리.
지후: 왜 잠가요?
여의사는 잠깐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 낮게 말했다.
여의사: 여기 CCTV 때문에요. 대기실 쪽은 거의 다 찍히거든요. 안쪽 상담실은 제가 꺼놨어요.
여의사: ...
여의사: 이제부턴,
여의사: ...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돼요.
뭔가 진짜 냄새가 났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방 안에 책상 하나와 의자 세 개, 진료용 침대 하나가 있었다. 좁은 공간이라 세 사람이 들어가면 금방 공기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여의사: 앉으세요.
여의사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습관적으로 환자 자리 쪽에 앉으려다가, 지금 내가 그 “환자”라는 걸 깨닫고 멈칫했다. 지후가 먼저 의자 하나를 당겨 앉고, 나를 옆에 앉혔다. 여의사는 우리 맞은편에 앉지 않고, 잠깐 책상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흰 가운 깃 아래로 보이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정 라 은〉
…여태까지 그냥 ‘여의사’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갑자기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그게 더 현실 같았다. 정라은은 두 손을 깍지 껴 잡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고르는 소리만 들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역시 지후였다.
지후: 아까… 이름 불렀죠.
그가 내 대신 물었다.
지후: 이 얼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윤지윤 씨’라고......
정라은의 시선이 나에게 박혔다. 그 눈빛엔 놀람도, 죄책감도, 묘하게 안도감도 섞여 있었다.
여의사: …네.
조용히 인정했다.
지후: 어떻게 알아봤는데요.
지후가 재빨리 물었다.
평소에도 환자들 성별 바뀌면 바로 알아보세요?
나: 강지후.
내 입에서 먼저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손등을 꽉 쥐었다.
나: 지금은, 좀…
지후: 지금이 언젠데.
나: 바로 지금이지.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후: …내가 대신 화낼 수 있게 해줘. 너 지금 울기 직전이잖아.
그 말이 더 아려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겨우 눈을 떴다.
지후: 설명해 주세요. 저…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정라은은 그 말에 아주 작게 눈을 감았다.
정라은: 그 질문을… 하실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허리를 바로 펴고, 우리 둘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정라은: 먼저 말씀드릴게요.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경력도, 이 클리닉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셋의 인생도… 한꺼번에 걸고 하는 말이에요.
그녀는 지나치게 진지해 졌다.
정라은: 그래서 가능하면, 녹음은 하지 말아 주세요.
지후가 움찔했다. 진짜로 녹음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 …안 할게요.
정라은: 그래요.
정라은은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한 번 두드렸다.
정라은: 지윤 씨.
내 이름을 부를 때, 그녀는 분명히 나를 여자처럼 불렀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 같았다.
정라은: 어제 여기 오셨죠. 저녁 8시 조금 넘어서.
나: 네.
목이 조금 탔다.
정라은: 피부 피로, 얼굴 컨디션, 전반적 호르몬 문제로 상담하셨고. 저는… 가벼운 피부 치료랑, 피로 회복용 약물을 함께 쓰는 시술을 제안했어요. 기억하시죠?
나: 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내가 떠올랐다. 차가운 알코올 냄새, 척추 근처로 스며들던 주사, 따뜻했다가 전기처럼 훅 올라오던 느낌.
정라은: 그때 사용한 약이…
정라은이 말을 멈추고,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작은 유리 바이알 하나를 꺼내왔다.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는 투명한 병.
라벨과 로고.
어제 내가 흘깃 본 것과 똑같았다.
〈네오젠 파마 – 피부재생 솔루션〉
정라은: 이거예요.
병 안에서 약액이 살짝 흔들렸다. 희미하게, 아주 옅은 연노란색.
정라은: 기존에 쓰던 약이랑, 포장도, 라벨도, 설명서도… 전부 똑같아요.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썼어요.
지후: 근데 지금 말투가 영 아니네요.
정라은: …네. 아니죠.
정라은이 씁쓸하게 웃었다.
정라은: 이건, ‘그 약’이 아니었어요.
나는 숨을 삼켰다.
나: 그게 무슨…
정라은: 지윤 씨.
그녀가 내 시선을 똑바로 받았다.
여의사: 어제 밤 9시쯤, 제약회사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네오젠 파마, 아시죠? 이 약 납품하는 회사.
나: 이름만… 대충요.
정라은: 그쪽 담당자가, 오늘 이 신제품을 사용한 환자의 경과를 ‘즉시’ 보고해 달라고 했어요. 그것도, 굉장히 집요하게.
말투가 점점 차가워졌다.
정라은: 어지럼증 없는지, 체온 상승은 없는지, 감각 이상은 없는지, 심장 두근거림, 호흡 곤란, 팔다리 저림… 세세하게 물어봤어요. 그냥 부작용 체크 수준이 아니었어요. 마치…
정라은이 잠깐 말을 고르더니,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라은: “마치,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밖에서 봤던, 그 평범해 보이는 간판이 떠올랐다.
〈호르몬 밸런스 & 체형 관리 센터〉
〈첫 상담 무료〉
‘호르몬’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다른 의미로 보였다.
정라은: 그래서… 이상해서요. 전화 끊고 나서, 약을 다시 봤어요.
정라은은 바이알을 조심스럽게 돌려 보였다.
정라은: 포장은 똑같았어요. 라벨, 글씨, 심지어 인쇄 눌린 자국까지.
바이알 목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라은: 근데… 색이 조금 달랐어요. 아주 조금.
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후: 그걸 구분해요?
여의사: 여기서 이걸로 몇 년을 일했어요.
정라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정라은: 이 약은 원래 거의 투명에 가까운 연노란색이에요. 자세히 보면, 빛에 비출 때 아주 특정 방향으로만 탁해지죠. 근데 이건… 전체적으로 미세하게 더 탁했어요.
그녀는 다시 서랍을 열더니, 비슷한 바이알을 하나 더 꺼냈다.
정라은: 이게, 이전에 쓰던 재고예요. 같은 회사, 같은 제품명, 다른 공급 시기.
두 병을 나란히 세웠다. 정면에서 보면 거의 똑같았다.
“잘 안 보이실 거예요.
근데 빛을 이렇게 비스듬히 통과시키면…”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비스듬히 비추자, 색이 아주 조금 달랐다. 오른쪽 병이 더 살짝, 밀도 있는 느낌. 내가 아니라, 의사 눈엔 즉시 티가 났을 것 같은 차이.
여의사: 그래서… 그냥은 못 넘기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클리닉 안에 있는 간이 분석 장비로, 두 약을 비교해 봤어요.
그녀는 책상 서랍 아래에서, 프린트 몇 장을 꺼냈다. 검은 선이 울퉁불퉁 그려진 그래프들.
정라은: 이건 원래 사용하던 약 성분 패턴. 이건 어제 새로 공급받은 약.
위, 아래. 한눈에 봐도 달랐다. 위 그래프는 비교적 완만했다. 밑에 그래프는 중간 부분에서 특히 뾰족한 봉우리가 몇 개 치솟아 있었다.
나: …무슨 뜻이에요?
지후 대신, 내가 물었다. 이 정도까지만 봐도, 심장이 불길하게 뛰고 있었다.
정라은: 쉽게 말해… 피부 회복 성분은 거의 없고요.
정라은이 손가락으로 그래프 일부분을 짚었다.
정라은: 대신, 호르몬 수용체에 직접 작용하는 계열의 물질이 아주 고농도로 들어있었어요.
지후: 호르몬… 수용체요?
정라은: 네. 우리 몸이 성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자물쇠’ 같은 부위가 있어요. 원래 호르몬은 거기에 열쇠처럼 맞물려서 작용하죠.
그녀는 잠깐 내 얼굴을 보았다.
정라은: 근데 이건, 열쇠도 아니고… 자물쇠를 통째로 갈아엎는 쪽에 가까워요.
말이 끝나자, 내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정라은: …그게, 무슨 의미냐면요.
입술이 저릿해졌다.
정라은: 단기간에 체내 호르몬 체계를 한 방향으로 강제 밀어붙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정라은: 여성 호르몬 분비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남성 호르몬 관련 수용체를 비정상적으로 민감하게 만든다든가.
머리 속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나듯, 뭔가 맞물렸다.
거울 속의 얼굴.
낮게 깔린 목소리.
평평해진 가슴.
거칠어진 손등과 도드라진 혈관.
나: 장난… 치지 마세요.
내가 먼저 내뱉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나: 그럼, 그 약 때문에… 제가 이 모양이 됐다는 거예요?
정라은은 정면으로 내 시선을 받았다.
거짓을 섞지 않는 눈빛이었다.
정라은: …네.
그 한 글자가,
총알처럼 쾅 박혔다.
여의사: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저도 상상 못 했어요.
나: 어느 정도면 상상했는데요.
내가 걸걸하게 되물었다. 목이 화끈거렸다.
나: 수염이 좀 난다거나, 목소리가 살짝 낮아진다거나, 체모가 좀 늘어난다거나… 그런 쪽이요?
정라은: 아니에요.
정라은이 고개를 저었다.
정라은: 이건…
정라은: 임상 단계에서 동물 실험 데이터만 잠깐 본 수준인데요.
그녀는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거기에는 익명 처리된 표와 간략한 숫자들이 있었다.
정라은: 정상적인 경우라면…
정라은: 이 약을 맞은 뒤에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까지 최소 3개월 이상 걸립니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내 머리가 멍해졌다.
그녀가 애써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정라은: 근데요.
정라은: 지윤 씨는… 하룻밤이었어요.
방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정라은: 어제 저녁 여덟 시에 시술 받으셨죠. 오늘 낮에… 이렇게 되어 오셨어요.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하룻밤.
3개월 걸릴 게,
내 몸에선 하룻밤 만에.
정라은: 그래서… 저는 이걸, 그냥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요.
정라은이 손을 떨며 바이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여의사: 이건 설계된 효과라고 봐야 합니다.
지후가 벌떡 일어났다.
지후: 씨발 , 그 제약회사, 미친 거 아니에요?! 임상시험이라고 말도 안 하고, 사람 몸에...
나: 강지후!
내가 겨우 붙잡았다.
나: 지금 소리 지르면… 밖에 까지 다 들릴거야.
목소리는 낮지만, 분명히 떨렸다.
나: 앉아. 제발.
지후는 이를 꽉 물고 다시 앉았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나: …그래서요.
나는 침을 삼켰다.
나: 그 사람들이, 이 결과를 알고 싶어서… 어제 그렇게 전화한 거예요?
정라은: 네.
정라은은 눈을 내리깔았다.
정라은: ‘특이 반응 있나요?’, ‘호흡이나 심장 박동에 이상 없나요?’, ‘혹시 체표 변화나 외형 변화 징후는 없나요?’ 그런 식으로 물었어요.
외형 변화.
그 단어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여의사: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어요.
그녀는 아주 낮게, 제약회사 담당자의 말투를 흉내냈다.
정라은: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다면… 바로 저희에게 연락 주세요. 혼자 처리하지 마시고.
방 안이 싸늘해졌다.
지후: …예상하고 있었네요.
지후가 이를 갈았다.
지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정라은: …네. 아마도 그런것 같아요.
정라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그래서 저는 어젯밤에… 치료 기록을 다시 확인하고, 환자 이름을 확인했어요.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박혔다.
정라은: 윤. 지. 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정라은: 그리고… …집으로 찾아가려 했어요.
그 말에 고개가 확 들렸다
나: 진짜로… 왔어요?
정라은: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밤 열한 시 조금 넘어서,
정라은: 여기서 택시 타고 바로 갔어요. 주소는 동의서에 적혀 있잖아요.
나: 어쩐지......
어제 밤, 잠들기 직전에 인터폰에 잠깐 불이 들어왔다 꺼진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꿈이었나 했는데.
정라은: 하지만…
정라은이 손가락을 꽉 쥐었다.
정라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계단에서… 멈췄어요.
지후: 왜요.
정라은: 위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거든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정라은: 누가 숨을 죽이려고 애쓰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기계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낮은 진동 같은 게, 벽을 타고 내려오는 느낌이었어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라은: 그게…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변화를 겪고 있던 순간이었을지도 몰라요.